Chapter Text
1941년 7월. 전선은 하루가 다르게 동쪽으로 밀려났고, 후퇴하는 붉은 군대의 발치에는 매캐한 화약 연기와 전우들의 선혈이 엉겨 붙었다. 우크라이나의 하늘 역시 불타는 들판처럼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제55전투항공연대 소속의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포크리시킨은 격전의 중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지상으로 내려왔지만, 그의 안색은 메서슈미트에게 꼬리를 잡혔을 때보다 창백했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찾아온 '주기'였다.
"빌어먹을..."
포크리시킨은 비행기 옆에 주저앉아 뒷목을 감싸 쥐었다. 뜨거운 열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소비에트 연방은 위대했다. 성평등과 함께, 크렘린의 주인인 이오시프 스탈린 동지 스스로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공표하며 세상의 편견을 박살 낸 나라였다.
'누구나 인민의 적을 격퇴할 수 있다'는 이념은 그 폐쇄적인 군대에 오메가를 받아들이게 했다. 아쉽게도 오메가는 섬세한 감각과 인내심, 포용력이 뛰어나다는 고정관념으로 참모직이나 정치장교에 몰리는 경향이 있긴 했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눈부시게 발전한 억제제는 세계적인 자랑이었다. 발정기 때문에 이성을 잃고 짐승 같이 구는 건 문명화된 연방에서 더 이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 '효율'이었다.
약으로 히트를 억누르는 것은 여성의 생리 현상을 관리하는 것과 비슷했다. 약만 챙겨 먹으면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아도 그냥 넘어갈 수 있었지만, 대가로 발정기 내내 약한 몸살에 시달려야 했다. 뼈마디가 쑤시고, 반응 속도는 미세하게 느려지며, 바닥을 친 컨디션으로 일주일 가량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평시라면 가벼운 업무를 맡거나 휴가를 내고 쉬면 그만이겠지만, 지금은 일 분 일 초가 급박한 전쟁의 한복판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죽는다.'
포크리시킨은 자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하늘 위에서는 0.1초의 판단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약으로 버티며 빠릿하게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위험천만한 일주일을 보내야 하나? - 출격을 안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그냥 시원하게 한번하고 찬물샤워하면 다 끝날텐데. 답은 이미 있었다. 억제제와 함께 군대 최우선 보급품 중 하나가 피임약이니 뒤탈도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행장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누구와 할 것인가? 조종사들은 일단 제외였다. 감정이 섞이거나 이후의 관계가 어색해지는 것은 전우애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게다가 그 혈기 왕성한 놈들을 받아줄 여유도 없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있었다. 연대의 수석 엔지니어이자 알파인 코필로프였다. 그는 애들과 달리 나이값을 하고, 기계를 만지는 손길처럼 매사 깔끔한 남자였다. 포크리시킨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정비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코필로프."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엔진을 살피던 코필로프가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포크리시킨의 얼굴 아래로 미약하게 새어 나오는 달큰하고 무거운 향기를 맡은 코필로프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사샤, 안색이 왜 그래. 기체에 문제라도..."
"아니, 내 몸이 문제야. 히트가 터졌어."
포크리시킨은 평소에 전술 기동을 설명할 때처럼 담담한 어조로 이어나갔다.
"약으로 버티기엔 시간이 아까워. 그러니 도와줄 수 있을까? 피임약은 이미 먹었어."
코필로프는 멍하니 포크리시킨을 바라봤다. 아무리 오메가 인권이 진보적인 소련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사무적이고 건조하게 잠자리를 제안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오메가가 먼저 뒤처리까지 확실히 하겠다며 부탁하는데 거절할 알파는 없었다.
"...그래, 가자."
어둑한 내무반 침대에 포크리시킨이 등을 기대고 누웠다. 코필로프는 그의 위로 올라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침대에서 내려다보니, 몸선이 은근 얄쌍하고 부드러웠다.
'이렇게 보니 영락없는 오메가네.'
코필로프는 그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포크리시킨의 하의를 끌어 내렸다.
알파의 페로몬이 방 안을 가득 채우자 포크리시킨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손대지 않아도 이미 잔뜩 젖은 곳에 코필로프가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것을 밀어 넣자, 뜨겁게 달아오른 오메가의 내부가 알파를 빈틈없이 조여왔다. 질척한 마찰음과 함께 오메가의 애액이 침대 시트를 적셨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코필로프는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며 포크리시킨의 반응을 살폈다. 아래쪽은 분명 기분 좋게 물을 내뿜으며 코필로프의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내벽은 경련하듯 꿈틀거리며 쾌락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포크리시킨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평온했다.
그는 신음 한 마디 섞지 않은 채 냉랭한 무표정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아래는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 왜 소리 하나 안 내는 거야? 부끄러워서 참는 건가? 그건 그거대로 대단한데...'
코필로프는 당혹감에 사정 직전의 쾌감마저 흩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결국 움직임을 멈추고 포크리시킨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사샤... 괜찮아? 내가 너무 못하는 거야? 아니면 뭔가 마음에 안 들어?"
코필로프의 목소리에는 자존심이 상한 남자의 당혹감이 묻어났다. 그러자 포크리시킨이 무언가 대수롭지 않은 일을 깜빡했다는 듯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아, 미안. 내가 무감각증이라는 걸 말 안 했네. 난 아무것도 못 느껴."
"...뭐? 불감증 말하는 거야?"
"아니, 그보다 더한 거야. 아래쪽의 어떤 감각도 뇌에 안 가. 그러니까 내 반응 살피지말고 그냥 빨리 싸고 끝내."
포크리시킨은 멍하니 굳어버린 코필로프의 허리를 재촉하듯 발로 툭 쳤다. 코필로프는 생전 처음 마주하는 '무감각증 오메가'라는 존재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뜨겁게 젖어 드는 감촉과 대비되는 그 서늘하고 투명한 눈동자 앞에서, 코필로프는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끼며 굳어버렸다.
코필로프는 가까스로 포크리시킨의 내부에 사정했다. 무감각증이라는 고백에 놀라 주춤거리는 코필로프의 허리를 포크리시킨이 허벅지로 강하게 조이며 억지로 끌어내린 결과였다. 정점이 지나간 후, 코필로프는 땀에 젖은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반면 포크리시킨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얼굴에 서렸던 미미한 열기가 가신 것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덕분에 개운하네. 고맙다."
포크리시킨은 대수롭지 않게 옷을 챙겨 입고는 수건을 집어 들고 씻으러 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코필로프는 한참 뒤에야 관사 밖으로 나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물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아래에서 뜨겁게 조여오던 육체와,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그 무표정한 얼굴의 괴리감이 연기처럼 머릿속을 헤집었다.
다음 날 새벽, 포크리시킨의 컨디션은 그야말로 최상이었다. 몸의 무거움은 씻은 듯이 사라졌고, 시야는 평소보다 더 또렷했다. 출격 준비를 마친 그가 활주로로 향할 때, 밤새 잠을 설친 코필로프가 초조한 얼굴로 다가왔다. 어제의 기괴한 경험이 계속 신경 쓰여 차마 배웅을 안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코필로프!"
포크리시킨이 밝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어제의 냉랭함은 온데간데없는, 평소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어제 진짜 고마웠어. 네 덕분에 오늘 임무는 걱정 없겠다. 몸이 아주 가벼워."
해사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보자 코필로프는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복잡하게 꼬였던 마음이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풀렸다. 그래, 이게 포크리시킨이지. 이 인간에게 섹스는 그저 전투기 정비나 비타민 섭취 같은 효율의 문제일 뿐이었다. 코필로프는 배웅의 손을 흔들며 더 이상 이 일에 연연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로부터 딱 한 달 뒤였다.
포크리시킨은 비행 직후 조종석에서 내리다 발을 헛디뎠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렁이는 불쾌한 진동, 그리고 뒷목을 타고 흐르는 끈적한 열기. 그는 경악했다. 분명 자신의 주기는 3개월이었다. 그런데 왜 한 달 만에 다시 터진단 말인가.
급히 군의관을 찾아가 억제제를 처방받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절망적이었다.
"요즘 자네 같은 케이스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어. 전쟁 때문이지."
"전쟁이랑 주기 불규칙이 무슨 상관입니까?"
"생존 본능이야, 사샤. 생물은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 종족을 보존하려는 번식욕이 극대화되지. 자네 몸도 마찬가지인 거야. 인간도 결국 동물이니까."
더 독한 약을 처방받았지만, 컨디션이 곤두박질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포크리시킨은 입술을 짓씹으며 곧장 코필로프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이번에 코필로프의 반응은 단호했다.
"미안하지만 사샤, 너랑 두 번은 못 하겠어."
"왜? 내가 반응을 안 해서 그래? 정 그러면 내 얼굴만 이불로 가리고 해. 내 아래는 기분 좋았잖아."
짜증 섞인 포크리시킨의 항변에 코필로프가 미간을 찌푸리며 팩트로 받아쳤다.
"그게 문제라는 거야. 난 널 고기 구멍으로만 취급하고 싶지 않아. 알파로서도 그건 모욕이고, 무엇보다 원치 않는 상대에게 이런 식으로 강요하는 건 명백한 폭력이야. 사샤, 정신 차려."
구구절절 맞말에 포크리시킨은 할 말을 잃었다. 솔직히 도덕적 허울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원치 않는 상대에게 강요하는 건 어떤 상황이든 바람직하지 않았다. 거절당한 그는 당장 협조해 줄 알파가 없다는 사실에 조바심이 났다.
최악의 기분으로 연병장을 가로지르던 포크리시킨의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다른 비행대의 그리고리 레치칼로프였다.
포크리시킨이 보기에 레치칼로프는 전형적인 '애새끼'였다. 여자랑 오메가라면 사족을 못 쓰고, 술과 놀이를 좋아하는. 저런 놈이라면 감정이나 예의 따위 따지지 않고 구멍만 쓰는 것도 좋다며 달려들 게 뻔했다.
생각을 마친 포크리시킨은 눈에 불을 켜고 성큼성큼 레치칼로프를 향해 걸어갔다.
한편, 멀리서 포크리시킨이 살기 어린 기세로 다가오는 것을 본 레치칼로프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포크리시킨? 나한테 오는 건가? 왜?
희번뜩하게 뜬 포크리시킨의 눈을 보며 레치칼로프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나 뭐 잘못했나...?'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레치칼로프의 몸을 감싸안는 것은 살기가 아니었다. 눅진하고 달큰하게 절여진, 본능을 자극하는 오메가의 향이었다.
"그리샤, 시간 괜찮으면 나랑 하자."
포크리시킨은 인사도 생략한 채 본론부터 던졌다. 레치칼로프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방금 저 입에서 나온 말이 격추 보고인지, 잠자리를 제안하는 소리인지 분간이 안 갔다.
"뭐? 사샤, 너 지금... 아, 혹시 히트야?"
"그래. 약으로 때우기엔 내일 출격이 걱정돼서 그래. 협조 좀 해줘."
레치칼로프는 당황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포크리시킨이 오메가라는 사실은 딱히 비밀이 아니었지만, 설마 자기에게 이런 제안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답지 않게 주저하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나야 뭐... 싫을 건 없는데. 정말 나로 괜찮겠어? 셀리베르스토프는? 걔가 더 낫지 않아?"
셀리베르스토프: 포크리시킨과 동갑이자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연대의 모두가 사랑하는 완벽한 전우였다. 포크리시킨 역시 그를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했다. 그래서 안 됐다. 셀리베르스토프에게 기분 나쁜 경험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포크리시킨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7살이나 어린 레치칼로프의 단순함을 공략하기로 했다.
"네가 더 어리잖아."
"어...?"
"젊은 놈이 체력도 더 좋을 거 아냐."
그 한마디에 레치칼로프의 경계심이 순식간에 풀렸다. 단순한 칭찬에 자존심이 한껏 고취된 그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흠, 하긴... 뭐, 사샤 네가 그렇게까지 원한다면야. 내가 또 거절 못 하는 성격인 거 알지?"
둘은 서둘러 인적이 드문 관사로 향했다. 문을 잠그자마자 포크리시킨은 거칠게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레치칼로프가 다가오기도 전에 근처에 있던 홑이불을 끌어당겨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사샤, 뭐해?"
"너한테 얼굴 보이기 부끄러워서."
레치칼로프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무리 오메가라지만 전우 얼굴을 빤히 보면서 관계를 맺는 건 본인도 조금 껄끄럽긴 했다. 얼굴이 안 보이면 오히려 죄책감 없이 본능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뭐... 나도 그게 편할 것 같네."
레치칼로프는 망설임 없이 포크리시킨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알파의 뜨거운 페로몬이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우자, 포크리시킨의 육체는 주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착실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코필로프 때와 마찬가지였다. 이불 아래 감춰진 얼굴은 석상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아래쪽은 이미 애액으로 흠뻑 젖어 레치칼로프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레치칼로프가 거칠게 밀고 들어오자, 포크리시킨의 내벽은 굶주린 짐승처럼 알파의 것을 뜨겁게 집어삼키며 조여왔다.
"와, 젠장... 사샤, 너.."
레치칼로프는 흥분으로 눈이 뒤집혀 짐승 같은 숨소리를 내뱉으며 허리를 쳐올렸다. 포크리시킨의 몸은 그의 거친 움직임에 맞춰 파도치듯 흔들렸고, 맞닿은 살과 살 사이에서 질척한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레치칼로프는 제 쾌락에 취해 포크리시킨이 달뜬 신음 한 마디 내뱉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이불에 가려진 그가 숨을 죽이고 있는지, 아니면 무표정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것을 터질 듯이 조여오는 오메가의 육체적 반응에만 열광하며, 그는 거침없이 사정하고 포크리시킨의 안을 가득 채웠다.
폭풍 같은 행위가 끝나고 레치칼로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포크리시킨의 몸 위로 무너져 내렸다. 이불 속의 포크리시킨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저 히트의 열기가 조금 가라앉은 듯한 안도감만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방 안에는 비릿한 정액 냄새와 무거운 페로몬의 잔향만이 감돌았다. 레치칼로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포크리시킨의 몸 위로 엎어져 있다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홑이불 아래로 드러난 포크리시킨의 하반신은 가관이었다.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흘러내리는 투명한 애액과 희뿌연 정액이 뒤섞여 침대 시트를 엉망으로 적시고 있었다.
혈기 왕성한 알파의 본능이 다시금 꿈틀거렸다. 레치칼로프는 몽롱한 기분으로 포크리시킨의 끈적한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밍기적거렸다.
"하아... 사샤... 피임약은 확실히 챙겨 먹은 거 맞지? 아프진 않았고?"
레치칼로프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욕정과 걱정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불 속에 파묻힌 포크리시킨은 지나치게 침착했다. 숨이 가쁘지도, 목소리가 떨리기도커녕 평소 작전 회의 때보다 더 명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번은 안 해. 볼일 끝났으면 그만 나가."
"아니... 내가 수건 가져와서 좀 닦아주기라도 할게. 이불은 언제까지 그렇게 뒤집어쓰고 있을 거야?"
레치칼로프가 이불 끝자락을 잡으려 하자, 포크리시킨이 단호한 목소리로 쳐냈다.
"부끄러우니까 그냥 좀 가라고. 씻는 것도 알아서 할 수 있어."
결국 레치칼로프는 입맛을 다시며 느릿느릿 옷을 챙겨 입었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까지도 뒤를 돌아보며 아쉬워했지만, 포크리시킨은 끝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레치칼로프는 문득 포크리시킨의 말투가 방금 섹스를 끝낸 오메가치고는 너무나 멀쩡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자존심이 세니까 참은 거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음 날, 포크리시킨의 컨디션은 다시 최고조에 달했다. 몸의 무거움이 사라지니 기분도 한결 가벼워졌다. 어찌 됐든 목적을 달성하게 해준 레치칼로프에게 코필로프 때와 비슷한 고마움을 느끼려던 찰나, 그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다.
레치칼로프가 선을 넘기 시작한 것이다.
식당에 가면 어느새 나타나 포크리시킨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들이밀었고, 별일도 없는데 비행기 점검 중인 그의 곁을 맴돌며 말을 걸었다. 가장 최악인 건 주변에 다른 조종사들이 뻔히 있는데도 눈치를 보며 속삭이는 소리였다.
"산, 그... 약은 잘 챙겨 먹었지? 몸은 좀 어때? 혹시 어디 불편한 데 있으면 말해."
포크리시킨은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 코필로프처럼 깔끔하고 어른스러운 녀석이 좋았던 건데. 레치칼로프는 어린애답게 한 번의 잠자리로 특별한 사이라도 된 양 굴고 있었다.
'확 그냥 한 대 쳐버릴까.'
주먹이 근질거렸지만 포크리시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참았다. 전쟁의 위협으로 인해 또 이르게 히트가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코필로프에게 거절당한 이상,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알파는 레치칼로프뿐이었다. 비효율적인 감정 소모를 견뎌서라도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최전선 조종사로서의 도리였다.
포크리시킨은 끈질기게 말을 거는 레치칼로프를 무시하며, 식당 안을 천천히 훑었다.
'레치칼로프처럼 질척이지 않으면서, 코필로프처럼 입 무겁고, 내 무감각증을 신경쓰지 않을 알파가 정말 없을까.'
그는 식판을 내려놓으며 새로운 인물을 찾기 위해 연대원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