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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한국어
Stats:
Published:
2025-11-23
Completed:
2025-11-23
Words:
27,783
Chapters:
2/2
Kudos:
1
Hits:
30

봄날의 제비

Summary:

1946년 4월에 뤼초가 살아 돌아옴

Notes:

* 전후 독일은 대충대충 묘사함 /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음

Chapter Text

나는 전화기를 찾아 K 대위의 번호를 넣었다. 그는 벨이 울리자마자 받았다.

“다행히 돌아오셨군요, 대령님. 대령님께 연락할 방법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가능하시면 갈란트 장군님께 즉시 전화하시길 바랍니다.” 그는 번호를 알려줬고, 곧바로 갈란트와 통화가 되었다.

“이봐, 자네, 어딜 다녀온 거야?”

“프란츨을 만나려고 했어요. 잘 안 풀렸지만요. 베로나에서 잡혀서 다음 기차편에 실려 돌려보내졌습니다. 바로 인사처로 가라던데.”

“뤼초를 만나러 갔다니, 무슨 그런 머저리 같은 생각이 다 있나! 뭐, 어쨌든, 인사처에 갈 필요는 없어. 비행하고 싶으면, 매키, 우리가 같이 창설할 예정인 제트기 전투비행대에서 하면 되잖아, 안 그래?”

 

 

 

* * *

 

 

 

“매키, 프란츨이 어제부터 실종이야. 슈바벤 알프스 상공에서 사발기들을 상대하는 임무에서 돌아오지 않았네…….”

심장이 별안간 목구멍으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억제할 수 없는 격앙된 감정이 나를 움켜쥐었다. 나는 그 소식의 의미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제 한 친구와의 몹시 가까운 관계가 끝나 버렸고, 그 슬픔은 나만의 몫이었다.

충성심과 전쟁의 광기에 대한 우리의 논쟁은 격렬했고, 때로는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어느 정도의 합의점에 도달했고, 재앙의 마지막 몇 달 동안 필요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시칠리아 방어전의 힘겨웠던 나날 동안 가까워졌다. 비판적이며 종종 너무 성급하게 의견을 입 밖으로 내곤 하는 비슷한 기질을 지닌 우리 두 사람은 의심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비행하고 싸우고 격추하는 것 밖의 대안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늦었을 때에야 반란에 가담했다. 우린 그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작은 반란자 무리의 대변인 역할을 용감하게 수행했고, 그 일은 그에게 분명한 만족을 주었었다. 나는 그가 괴링 앞에 서서 벽력같은 목소리로 외치던 모습을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제 말을 끊으시면, 제국원수 각하, 제 말을 끝까지 듣지 않으시면, 이 모든 논의는 무의미할 겁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그는 완전히 비관론자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제트 전투기로 비행하는 즐거움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고, 며칠 안으로 닥칠 종말밖에 보지 못하며 슬퍼하고 절망했다.

갈란트가 그 뒤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 자신과 죽은 친구에 대한 생각에 너무나도 깊이 사로잡혀 있던 탓이었다. 어쩌면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갈란트는 뤼초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았으니까.

그는 떠났고, 주위에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압도적인 우울감이 나를 짓눌렀다. 숨을 쉬려고 헐떡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친 채 베개 위로 다시 쓰러졌을 때 간호사가 내게 음식을 먹이려고 들어왔다. 나는 한쪽으로 돌아누우며 수면제를 놓아 달라고 손짓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었다. 이제 전부 끝났다. 끝이었다. 모든 게 산산이 부서졌다. 프란츨 뤼초가 죽었다!

 

 

 

 

 

 

0

 

그때 그녀가 커다란 빵 한 덩이를 들고 모퉁이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위에는 마블링이 아름다운 베이컨 한 조각이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그 훌륭한 것을 내밀었다.

“자, 이거 받아요. 배고프겠어요.” 그리고 “세상에, 정말 엉망이 됐군요.” 내가 감사 인사를 어물거리기도 전, 그녀는 돌아서서 온 길로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내가 정말 끔찍해 보이나 본데.” 나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좀 신기해 보이는 거지.”

“감동적이네. 하지만 타자기는 네가 가져와야겠어, 백작. 날 무서워하잖아.”

 

 

1

 

부활절을 앞둔 4월 어느 늦은 오후의 구름 낀 하늘에서 싸락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슈타인호프는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래 봐야 좁은 챙이 달린 모자가 얼굴을 전부 가려 주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또 몇 달의 입원 생활을 마치고 병원을 나선 그의 눈에 사람으로 가득한 거리는 다소 생경해 보였다. 거리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병원도 사람으로 가득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실제 세계는 낡아빠진 병원복을 입은 환자들, 흰 가운의 의사와 간호사로 가득한 무채색 공간과 사뭇 달랐다. 빗물에 뒤범벅이 된 거리는 채도가 잔뜩 죽었을지언정 색을 띠고 있었다. 사람들의 차림새는 단조롭지 않았으며 대부분이 사지가 멀쩡했다. 간간이 팔다리 중 하나 이상이 날아간 사람이 눈에 띄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에도 병원을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 비하면 그런 사람들은 아주 말짱한 편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병원을 나선 중환자 요하네스 슈타인호프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포로 수용소와 병원을 겸하던 오버푀링 군 병원을 나선 것은 7월이었다. 하지만 잊을 법하면 하나둘씩 고개를 들이밀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수술 부위 감염, 안구 궤양, 통증 따위에 시달리며 수시로 병원을 드나들어야 했던 그는 결국 이식 수술을 받을 겸 몇 달 동안 병원에 눌러앉기를 택했다. 소지품이 든 작은 여행 가방 하나를 달랑 들고 거리로 나서게 된 것은 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병원의 권유 아닌 권유에 가까웠다. 입원료도, 치료비도 지불할 능력이 없는 환자는 오래 데리고 있기에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보잘것없는 역사에 들어선 슈타인호프는 코트 주머니에 든 봉투에서 주섬주섬 돈을 꺼내고는 슈타른베르크로 향하는 차표를 끊었다. 그곳에 집이 있었다. 물론 그 집은 진짜 집이 아니었다. 튀링겐의 고향도, 포메른의 신혼집도 더는 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부터 한 해를 꼬박 보낸 바이에른이 어느새 그의 새 집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침대가 줄줄이 늘어선 병실이 더욱 집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지낼 곳을 구해 준 사람은 트라우트로프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오랜 여자친구였다. 연합군에게 붙잡힌 고위 장교가 당할 꼴을 예견한 트라우트로프트는 포로로 잡히자마자 수용소에서 도망치고는 여자친구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마이저 양이 기꺼이 그를 도와 편지를 대신 부치고 슈타인호프가 지낼 곳까지 구해 준 것이었다.

오베르스트도르프에서 날아온 편지봉투에는 일찍이 석방된 옛 동료들이 알음알음 모은, 적지 않은 돈이 들어 있었다. 전직 장교, 그것도 이름과 얼굴이 전 세계에 팔린 에이스 전투기 조종사들이 얼마나 일을 구하기 어려운지를 알았던 슈타인호프는 돈이 든 봉투를 반송했다. 무슨 이런 짓을 하냐는 짧은 메모와 함께. 봉투는 한 달 후, 장문의 편지와 함께 되돌아왔다. 긴 편지 내용의 요는 동향 사람의 호의니, 입 다물고 받아들이시라는 것이었다. 특히 요즘 같은 때엔 말이지, 라는 말과 함께. 슈타인호프는 친구의 전투기 동체에서 항상 눈에 띄던 녹색 하트를 떠올리고 웃음을 흘렸다.

기실, 호의란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였다.

빗물에 축축하게 젖은 역을 적잖은 수의 인파가 북적거리며 메웠다. 승강장 한쪽 끝에서 풍기는 기름 냄새와 기차가 지나간 뒤 올라오는 증기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빗방울이 일정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리저리 흩날렸다. 슈타인호프는 그 승강장 한구석에서 서성거리며, 이따금 사람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모자를 더 푹 눌러쓰고 손에 쥔 차표를 만지작거리며 열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바일하임 방면으로 가는 열차가 5분 후 도착합니다.”

승강장을 드문드문 메운 사람들이 바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슈타인호프는 그 소란 속에서 짐가방을 집어 들고 철로 쪽으로 다가서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윤기가 흐르는 진회색 가죽 코트 차림이었다. 어깨에선 금색 장식이 박힌 은빛 견장이 반짝거렸다. 목에 철십자 훈장이 매달려 있었다. 눌러쓴 모자는 공군 장교의 빛바랜 감색 정모였다. 한 발로 하켄크로이츠를 움켜쥔 독수리가 수 놓여 있었다.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과거의 망령 같은 그 모습을 잠시 얼빠진 채 쳐다보던 슈타인호프는 그 모자챙 아래의 얼굴을 보았다.

“프란츨?”

생각을 하고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심장 깊은 곳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소리에 가까웠다. 군복 차림의 남자는 승강장의 소음과 뒤섞인 그 소리를 분명히 들은 모양이었다.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그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슈타인호프는 눌러썼던 모자를 살짝 뒤로 젖히고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홱 돌려 눈을 피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짓는 표정과 보이는 반응에는 이제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프란츨 뤼초를 지독하게 닮은 남자의 얼굴을 스치는 충격과 본능적인 거부감에 가슴이 조여 오듯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을지도 몰랐다. 무슨 생각인지 유행이 한참 지난 옷을 걸친 몸을 돌린 채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저 남자가 그일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말이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무슨 기적이 일어나 뤼초가 돌아온다 한들 그를 알아볼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상처, 흉터, 그나마 수술로 얼기설기 기운 잿빛 피부, 비뚤어진 입과 부풀어 오른 입술, 반쯤 녹아버린 코, 알이 커다란 선글라스로 가린 눈. 요하네스 슈타인호프는 더 이상 금발의 말쑥하고 반듯한 30대 초반의 공군 대령이 아니었다. 낡고 초라한 정장에 보풀이 일어난 코트를 걸치고 있는, ‘얼굴을 잃은 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슈타인호프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프란츨.”

기차가 삐이익 소리를 내며 승강장으로 들어왔다. 상대의 주의를 끌어 보려고 목소리를 냈던 좀 전보다 훨씬 나직한, 탄식처럼 튀어나온 이번의 부름이야말로 그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군복 차림의 남자는 이번에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흠칫하며 눈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매키?”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망설이듯 물었다. 그 소리가 귀에 닿는 순간 슈타인호프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1년이라는 기나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그 목소리였다. 현기증이 일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릴 뻔했다. 그는 애써 바로 선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프란츨, 나야.”

프란츨 뤼초는 1년 전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물론 갈란트는 ‘실종’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슈타인호프는 그것이 죽음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애써 외면해 보려고 했음에도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그가 죽었다는 진실에 못을 박는 듯했다. 여전히 그가 부상을 입은 채 탈출에 성공해 어딘가에 숨어 치료를 받고 있거나 미군에 포로로 잡혀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 이들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는 겨울이 지나가기 전, 뤼초의 아내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손으로 간신히 타자기 자판을 꾹꾹 느리게 누르며 그가 돌아올 가망은 더 이상 없다는 내용을 써 보냈었다.

하지만 그 뤼초가 꼬박 1년이 지난 지금, 아주 말짱한 꼴로 군복까지 갖춰 입은 채, 마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이해가 전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몸이 이성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슈타인호프는 걸음을 빠르게 옮기기 시작했다. 남자가 그를 향해 달려왔다. 그가 정모를 벗자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와 황망한 표정이 드러났다. 두 사람의 걸음이 그리는 궤적이 승강장 한복판에서 교차했다.

“맙소사, 프란츨.”

“매키, 너, 세상에, 너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대체 여긴 뭐야? 이게 다 — ”

“프란츨, 진정해 봐.”

그는 정신을 못 차리겠다는 듯이 횡설수설하는 뤼초의 팔에 손을 얹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야말로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뤼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슈타인호프의 팔을 잡았다. 손에는 모직 장교용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그 너머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 나 림으로 가던 중이었어. 갈란트한테 뮌헨에서 새로 만든 비행대에 합류하라는 얘길 들어서, 방금 베로나에서 오는 기차를 타고 여기서 내려서 갈아타려고 하던 중이었는데……. 환승해야 하는 승강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을 뿐이라고. 여긴 대체 뭐야? 그리고 넌…….”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거야. 네가 왜 — ”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정의 파편들이 순간 몸 안에서 부딪혔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눈앞에 그대로 서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동시에 그가, 프란츨 뤼초가, 자신의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은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피하려 했다는 사실이 가슴을 저리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어찌 된 일인지가 전혀 이해 가지 않았다. ‘프란츨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겠습니다.’ 분명 그런 문장을 손으로 직접 써 보내지 않았던가? 너무나도 많은 생각과 감정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바람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뤼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를 잊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지난 1년의 시간이 있었는데 —

문득 정신을 차린 슈타인호프는 타야 하는 기차가 멈춰 섰으며 승강장에 서 있던 사람들이 탑승을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뤼초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타자. 타서 이야기하자.”

“난 림으로 가야 하는데…….”

여전히 그의 팔을 붙잡은 뤼초의 얼굴에는 망설이는 빛이 가득 어려 있었다. 슈타인호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따라와. 같이 가자.”

여전히 당황 반, 망설임 반 섞인 표정으로 잠깐 멍하니 서 있던 뤼초가 이내 어떤 결론에 도달한 듯 끄덕였다.

“그래.”

“너, 짐은?”

“……그것도 어디 갔는질 모르겠어.”

“음, 그래. 일단 타 보자.”

그는 뤼초를 기차를 향해 잡아끌었다.

 

 

2

 

금요일 이른 오후 기차는 제법 붐볐다. 그나마 한산한 칸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앉은 슈타인호프는 옆자리에 나란히 앉은 뤼초에게 말했다.

“프란츨, 훈장 벗어.”

“어?”

“철십자 떼라고. 그리고 견장도 —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뤼초가 본능적으로 손을 목깃으로 가져갔다. 여전히 단정하게 다려진 셔츠 목깃 부근에서 은빛 곡엽검기사철십자장이 조명에 어렴풋이 빛났다. 슈타인호프는 철십자를 향해 턱짓했다.

“그거 하고 다니면 안 돼.”

“무슨 소리야? 이건 내 훈장이고 계급장인데…….”

“지금 상황이 그래, 프란츨.”

“설명을 해 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기차가 덜컹, 하고 흔들리며 역을 빠져나가자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회색 건물과 헐벗은 나무들이 어지럽게 흘러갔다. 대체 이 상황을 어느 순서로 설명해야 덜 미친 소리로 들릴지를 잠시 계산해 보려 했지만, 그런 순서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머지않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 했다.

“어떻게 된 건진 나도 몰라. 하지만 넌 1945년에서 여기로 넘어온 것 같아. 지금은 1946년이야. 전쟁은 끝났어.”

뤼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분명 45년 봄이었어.”

“네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야. 어쨌든 지금은 1946년이 맞다고.”

“망할,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이게 무슨 — ”

“어찌 된 일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말투가 불쑥 날카로워졌다. 그에게 짜증스럽게 내뱉어버린 슈타인호프는 아차 싶어 얼굴을 굳혔다. 상대 또한 분명 혼란스러울 텐데. 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미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기차 바퀴가 철길과 마찰하는 규칙적인 소리와 다른 승객들의 말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뤼초가 눈치를 보는 듯이 눈을 굴리다 목에 건 훈장을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마음이 괴로웠다. 뤼초를 다시 만나는 상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이 했다고 표현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다른 이들이 뤼초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보일 때마다 그럴 일은 없으리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뤼초가 살아있다면, 그를 다시 볼 수 있다면, 하고 재회의 순간을 수도 없이 상상해 보았던 그였다. 상상 속 뤼초와의 재회는 절대 이런 식은 아니었다.

보통은 아주 눈물겨운 상봉이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수술을 받고 힘없이 병실에 누워 있는 그의 눈앞에 어느 날 뤼초가 나타난다. 똑같이 환자복을 입은 채 옆 침대에 누워 있을지도 모르고, 계급장이 다 뜯긴 군복 차림이나 사복 정장 차림을 하고 두 발로 걸어 들어올지도 모른다. 약을 너무 많이 맞아서 헛것을 보고 있나, 싶다가도, 그가 매키, 오랜만이야,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그것이 현실이라는 걸 자각한다. 추락 사고를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을 뤼초는 그를 보고 놀라거나 못 알아보지 않는다.

그다음은 어떨까? 분위기를 어떻게든 가볍게 만들어보려고 실없는 농담을 던질지도 모른다. 왜 이제야 왔어, 프란츨? 어딜 돌아다니다 이제 날 보러 온 거야, 응? 설마 내가 질린 건 아니지? 그러면 그는 당황하며 거세게 고개를 젓고, 그럴 리가 있겠냐고, 그냥 좀 사정이 있었다고 답한다. 어쩌면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네가 살아 있어서 기쁘다고 말해 주었을지도 몰랐다. 크루핀스키가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다들 죽었다고, 아니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령님이 살 거라고 말한 사람은 뤼초 대령님 뿐이었어요. 그것도 아니면 둘 다 말을 잇지 못하고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다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서로를 와락 끌어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재회는 엉망진창이었다. 뤼초는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바라보듯 그를 쳐다보았었다. 슈타인호프는 지금이 1946년 4월이라는 사실부터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납득시켜야 했다. 네가 살아 있어서 기쁘다고, 또는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대신 훈장부터 떼라는 말을 내뱉어야 했다.

저게 귄터 뤼초가 맞긴 한 걸까? 슈타인호프는 어느새 목에 건 철십자를 떼어내 주머니에 넣고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는 옆자리의 남자를 곁눈질했다. 하지만 뤼초가 아니라기엔 너무나도 똑같았다. 얼굴도, 말투도, 군복을 입고 뻣뻣하게 선 자세도, 처음 보는 사람을 경계하는 눈빛조차도 뤼초가 맞았다. 그렇다면, 만약 그가 뤼초가 맞다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뤼초가 아니라 무슨 기적 때문이든 1년을 뛰어넘고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온 프란츨이라면……

귄터 뤼초가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하지? 내가 당한 사고에 대해서도, 그로부터 일주일쯤 후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자신의 삶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는 4월 초, 막 이탈리아에서 탈출해 독일로 돌아와 림으로 향하던 뤼초에게 그 사실을 어떻게 —

“매키?”

그제야 슈타인호프는 자신이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기차는 이미 뮌헨을 벗어나 들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객차 안에는 낡은 교복 같은 옷을 입은 소년 둘이 장난치는 소리, 여자들의 나지막한 대화 소리, 맞은편에 앉은 노파가 신문을 넘기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뤼초를 바라보았다.

“미안, 생각을 좀 정리하느라. 왜?”

“검표하러 오는 것 같은데.”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객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름한 제복을 입은 검표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맞은편에 앉은 나이 든 여자가 먼저 표를 내밀었고, 경찰은 말없이 표를 받아 들고는 확인 구멍을 뚫었다. 슈타인호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코트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표를 받아 든 검표원이 뤼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슈타인호프는 그제야 뤼초 몫의 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장밖에 없습니까?”

검표원이 지적했다.

“그게, 급히 타느라…….”

그는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검표원이 그의 화상흉으로 엉망인 얼굴을 보고 흠칫했다. 그와 뤼초의 또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얼굴에 충격과 혐오가 어렸다. 고개를 아주 짧게 저은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됐습니다.”

그러고는 표를 슈타인호프에게 돌려주고는 다음 좌석으로 넘어갔다. 가슴을 쓸어내린 그는 일부러 가볍게 농담하듯 뤼초에게 말했다.

“그냥 지나가서 다행이네, 그치? 벌금 물거나 쫓겨났으면 곤란했을 텐데…….”

뤼초는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이 아주 안 좋았다. 슈타인호프는 그를 보고 멋쩍게 웃어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웃음을 지으려니 흉터 때문에 얼굴이 당겼다. 뤼초는 마주 웃어주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툭 떨구었다, 그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슈타인호프는 그 침묵을 깨려고 애쓰지 않았다. 더는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을 태운 기차는 남서쪽으로 느리게, 쉬지 않고 달렸다.

 

 

3

 

기차는 얼마를 더 달린 끝에 뮌헨 근교의 작은 마을 슈타른베르크의 역에 도착했다. 해가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뤼초를 기차에서 잡아끌어 내린 슈타인호프는 곧장 역사 근처의 식료품 가게로 향했다. 계산대 뒤편에 놓인 라디오에서는 뉘른베르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판 중계가 흘러나왔다. 피고인, 제4국 국장으로서 뮐러에게 베를린에 구금 중이던 특정 인사들을 독일 남부로 이송할지 아니면 사살할지에 관한 지시를 내렸습니까, 내리지 않았습니까?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당시는 러시아군이 베를린을 포위하고 있던 1945년 2월이었습니다. ‘예’ 또는 ‘아니오’로 답변하십시오……. 아니오, 1945년 2월에는 소련군이 베를린에 그리 가까이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전투가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기 계신 군사 전문가들이 더 정확한 정보를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 시점에 수용소를 남쪽으로 옮길 이유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국가보안본부 6A과장 마르틴 잔트베르거를 알았습니까? ……네, 그는 이미 몇 차례 언급한 셸렌베르크의 수석 보좌관이었고, 힘러와 셸렌베르크 사이에서 정보 중개자 역할을……

사람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이 자신의 얼굴 때문인지, 이질적인 뤼초의 옷 때문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둘 다일지도 몰랐다. 전쟁이 끝나고 부상을 입은 군인이야 많았지만 얼굴을 완전히 잃은 사람은 드물었다. 전쟁이 끝나고도 군복을 계속 입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렇게 말끔한, 몸에 꼭 맞는 가죽 코트와 반질반질 윤이 나는 군화를 신은 사람은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시선들이 이렇게 불편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말 한마디 없이 뒤를 졸졸 따라오는 뤼초에게 모든 소지품이 들어있는 작은 가방을 넘긴 슈타인호프는 재빨리 휑한 진열대를 헤치며 얼마 없는 빵과 버터와 잼과 소시지 따위를 집어 들었다. 당장 아침에 퇴원 수속을 밟을 때, 의사가 술을 마시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기억이 뇌리를 스치기는 했지만 맥주 두 병도 집어 들었다. 술이 필요했다. 얼마 남지 않은 돈을 털어 계산을 하는 동안, 그는 가게 주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애를 썼다.

구입한 식료품을 종이봉투에 담고 가게를 나선 그는 전차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뤼초가 얌전히 뒤따라왔다. 전차를 타고 시내에서 벗어나고, 얼마를 더 가서 내린 그는 조용히 걸었다. 길가의 표지판과 집마다 놓인 우편 상자에 적힌 주소를 보고 얼마간 헤맨 끝에 마침내, 길 끝에 자리한 작은 2층짜리 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트라우트로프트가 보내 준 봉투를 꺼내서 열쇠를 끄집어내고 문을 열었다. 집주인은 예전에 알고 지내던 한 공군 장교라고 했다. 지금은 영국군에 포로로 잡혔고, 함부르크에서 영국군의 독일어 통역사로 일하는 중이라고 했다. 한동안 비워 두었어서 좀 엉망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는데, 다행히 먼지와 거미줄과 오래도록 관리되지 않아 너저분한 정원만 무시하면 지극히 멀쩡했다. 무슨 기적인지 몰라도 독일 전역에 무차별적으로 떨어진 폭격마저 피해 간 모양이었다.

문을 닫자마자 뤼초가 다가왔다. 그가 다짜고짜 슈타인호프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약간 건조하지만 안쪽 점막은 촉촉하고 말랑거렸다. 흉터 때문에 부풀고 일그러진 자신의 입술과는 꽤 달랐다. 잊은 지 퍽 오래된 정상적인 입술의 감촉에 놀랐는지, 키스 자체에 놀랐는지는 분간할 수 없었으나, 어쨌든 슈타인호프는 그 서슬에 몸을 굳히며 들고 있던 봉투를 떨어뜨릴 뻔했다.

“프란츨, 잠깐, 읍, 기다려, 일단 — ”

뤼초의 입술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끝이 입안으로 삼켜졌다. 뤼초는 그의 말을 듣지도 못했다는 듯이 슈타인호프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입을 맞춰 왔다. 코가 부딪히며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달그락거렸다.

뮌헨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지 않은 시간 내내 기차에서, 전차에서, 길을 걷는 동안 머릿속을 헤집던 고민은 여적 풀리지 않았다. 이미 죽은 뤼초가 왜 여기 있지? 그것도 45년에서 46년으로 넘어온 뤼초가? 차라리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모를까…… 어떻게 된 일인지가 가장 큰 의문이었지만 이 문제는 아무리 고민을 해도, 눈앞의 뤼초를 괴롭혀도 답을 얻어낼 수 없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었으니, 집착은 무의미했다. 이제 어떻게 할지가 더 큰 문제였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타래 끝에서 아무런 해답도 얻어내지 못한 그는 가만히 있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이었다. 상공에서는 적을 만나면 주도권을 먼저 잡고 달려들어 상대를 해치는 편이 훨씬 유리했고, 수년간 전투기를 몰아 온 그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슈타인호프에게는 그렇게 예전처럼, 정면에서 무언가와 맞부딪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어차피 현시점에서 뤼초는 죽었으니 1946년의 본인을 마주치는 곤란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은 이곳을 찾을 사람도 없었다. 뤼초의 아내와 아이들은 독일 반대편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건 일시적인 오류 정도로 설명할 수 있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이 뤼초는 원래 속해 있던 세계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그러니 어디서 사고를 치거나 헤매고 다니지만 않도록, 하켄크로이츠가 달린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군복을 입고 나돌아다니다 시비가 붙거나 잡혀가지만 않도록 데리고 지낼 작정이었다. 가급적 대화도, 상호작용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기껏 결론을 내려놓았는데, 이렇게 몸을 붙여 오는 덩치 큰 남자 때문에 머리가 아파왔다. 그는 붙잡힌 채 허둥거리다 뤼초의 가슴팍을 밀었다.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1년간 병원 생활밖에 하지 않은 퇴역 군인과 몸 멀쩡한 현역 군인의 힘은 분명히 차이가 났다.

“하지 마, 으, 그만 — ”

“매키, 매키……”

뤼초는 그의 말에 따르는 대신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자꾸 들러붙으면서 그의 이름만을 계속 불러댔다. 뺨을 어루만지다 목덜미까지 흐르듯 미끄러져 내려가는 손, 허리를 끌어안는 단단한 팔 —

“프란츨, 제발!”

결국 그는 아주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언성을 높였다. 소리치다시피 내지른 말에 뤼초가 비로소 우뚝 멈춰 섰다.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자꾸 이러면 어떡하냐고!”

왈칵 화를 내자, 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미안, 내가 왜 그랬지……”

그 풀 죽은 모습에 곧바로 너무 심하게 말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슈타인호프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일단 짐 정리 좀 하고.”

뤼초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가 가죽 코트를 벗자 안에 입은 단정한 감색 공군 정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깃에 달린 노란 대령 계급장, 하늘색 셔츠와 검은 넥타이, 가슴팍을 장식한 독수리 문양과 여러 개의 훈장들, 철십자, 스페인 내전 참전장, 조종사 훈장……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차림새였다.

일단은 군복에서 훈장과 휘장을 모두 뜯고 입게 해야 할 것이다. 거의 집안에만 있을 테니 급하지는 않겠지만. 잠옷은 다행히 두 벌이 가방에 들어 있으니 빌려주면 될 테고……. 그는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옆에 있는 그의 존재를 무시해 보려는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슈타인호프는 사 온 물건이 담긴 봉투를 부엌 카운터에 올려놓고, 코트를 벗어서 뤼초가 걸어 둔 코트 옆에 두었다. 간단히 먹을 것을 좀 차리기 시작하자 뤼초가 옆에서 서성거렸다. 도와주려는 것일까? 도와 줄 만한 일이 딱히 없었다. 식사라고 해보아야 빵에 잼을 대충 발라 먹는 것이 전부였다.

“집 좋네.”

부엌 한가운데에 놓인 식탁에 마주 앉은 채 침묵 속에서 빵을 한참 씹던 뤼초가 대뜸 내뱉었다. 슈타인호프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내 집 아니야.”

“그럼, 누구 거야?”

“그냥…… 도움 좀 받았어.”

끔찍하게 어색했다. 대화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주 무시하고 지내기는 글러 먹은 듯했다. 결국 이렇게 계속 대화를 해야 한다면 프란츨은 분명히 캐물을 것이다. 분명 1945년 4월과 1946년 4월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 계속 물을 그에게 어떻게 둘러대고 납득시킬 것인가? ‘네가 죽었다’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지도 문제였다.

“……전쟁이 끝나긴 끝났네.”

최선을 다해 대화 소재를 찾아보려는 듯한 말투였다. 슈타인호프는 힘겹게 대꾸했다.

“응, 그렇지. 우리 모두 예상했던 대로…….”

어색했다. 대화를 끌어 나가는 것 자체가 어색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원래는 이런 식이 아니었다. 뤼초와 함께 있으면 대화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흘렀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을 고를 필요도 없이, 마음껏 우스갯소리를 하다 누군가를 험담하며 비아냥거리다가도 속내를 있는 그대로 터놓을 수 있었다.

“그럼 우린 어떻게 됐어?”

“뻔하지, 뭐, 모두 포로로 잡히고, 심문을 당하고, 대령급 이상과 일반참모들은 특히 요주의 인물이라고 아직도 잡혀 있어. 나머지는 대부분 풀려났지만. 당연히 전쟁 동안 저지른 짓에 대한 책임을 무는 사람들도 있고.”

그러나 그다음 순간 그가 한 말은 생각을 하고 내뱉은 것이 아니었다. 설명되지 않는 순전한 충동이었다.

“너도 그래서 계속 포로로 잡혀 있는 거야.”

내뱉은 그 자신마저도 기가 찰 만큼 빤한 거짓말이었다. 이 따위 인간이 되어버린 거냐, 요하네스 슈타인호프?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친구에게 되지도 않는 거짓말이나 핑계 삼아 지껄이는 인간이나 되어버린 거야?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가 없었다.

“어디 잡혀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있어? 장군님이랑? 하네스, 에두, 다른 단장급 친구들하고?”

“하네스는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쳐서 오베르스트도르프에 숨어 있어. 여자친구네 집에. 돌포는 에두랑 같이 잡혀간 것으로 기억하는데…… 넌 모르겠어.”

“모른다고?”

“응, 어디 있는지는 몰라. 연락도 안 닿고……”

그 대답만큼은 사실이었다. 귄터 뤼초의 행방을 아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갈란트는 그가 임무에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말해 주었을 뿐이었다. 슈타인호프는 몇 달 후 병원에서 만난 크루핀스키가 4월 24일 그날 있었던 일을 더 자세히 설명해 줄 때까지 얄팍한 희망 한 가닥을 붙잡았었다. 뤼초가 죽지 않았으리라고, 프란츨 뤼초처럼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격추당하더라도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며 무리한 비상착륙을 시도하는 대신 낙하산을 피고 탈출했으리라고, 그렇게 어딘가에 불시착해서 밀려드는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리라고.

크루핀스키가 풀어 놓은 이야기는 몇 달간의 실낱같은 희망이 헛되었다고 못을 박아 주었다. 그럼에도 슈타인호프는 이따금 그런 상상을 했다. 누군가는 그를 발견했으리라고. 아무리 추락하며 폭발했다고 한들,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과 전투기가 모조리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수가 있나? 그는 미군의 포로가 된 뤼초를 상상했다.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으니 갈란트와 마찬가지로 아직 수용소에서 풀려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날 심한 부상을 입어 아직도 어디선가 치료를 받고 있을지도 몰랐다. 혹은 몇몇 옛 동료들처럼 소련군에게 인도되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현재의 프란츨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뤼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연락도 없었어? 내가 편지 한 통도 안 썼을 리가 없는데.”

“못 보내게 막은 건 아닐까?”

“그런가? 그래도 제네바 협약대로 편지 정도는 보낼 수 있게 해 줬을 거 아냐. 아니다, 음, 되게 비밀스럽게 심문하는 상황이면 그럴 수 있으려나?”

프란츨이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던가? 뤼초는 술을 마시지 않는 이상 과묵한 편이었다. 둘이 대화를 나눌 때면 주로 말을 하는 사람은 슈타인호프였고, 뤼초는 예의 뚱한 표정을 짓고 앉아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대개는 술이 들어가는 순간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병원 생활만 일 년쯤을 했더니 사람과의 대화가 어색해진 모양이었다. 슈타인호프는 쓰게 웃었다. 뤼초는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아무튼 좀 이상하네. 하지만 확실히 이런 시기엔 모든 게 혼란스럽겠지……. 뭐든 상식적으로 굴러가지 않는 것도 이해할 만하긴 해.”

“그래, 맞아.”

“그래도 다른 친구들하고는 연락 되지 않아? 만나러 가면 안 되나? 아니면 여기로 부른다거나 — ”

“안돼.”

“왜?”

“네가 둘이 돼서 돌아다니면 다들 얼마나 당황하겠어? 그리고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지, 수감 중인 포로가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으면……”

되는대로 내뱉다 보니 제가 듣기에도 조잡한 논리였는데, 뤼초는 그걸 납득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러겠다.”

“그러니까, 일단은 집안에만 있어.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니까.”

더 이상 맨정신으로 계속하기가 힘들었다. 슈타인호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에 올려 둔 맥주병을 꺼내 들었다.

“너도 마실래?”

“응, 줘. 그런데 넌 마셔도 되는 거야? 그…… 있잖아.”

뤼초가 손을 들었다가 머뭇거렸다.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뻔했다. 얼굴을 가리키려고 했을 것이다. 슈타인호프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안 되지.”

“그러면 왜……?”

“우리가 언제부터 의사 말을 잘 들었다고.”

그는 약간 까칠하게 말하며 병 따서 건네주었다. 맥주는 미지근하고 묽고 맛없었지만, 적어도 불편한 침묵을 이기는 데에는 도움이 그럭저럭 되었다. 오랜만에 마셔서인지, 취기가 금세 오르는 기분이었다.

뤼초가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있잖아, 매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뭔데?”

“나도 그 제트기를 몰았어?”

“Me 262?”

“그래, 그거. 난 아직 타 보지도 못했잖아. 너야 경험이 많지만……. 나도 그걸 탔어? 갈란트가 날 비행대 부관 보직으로 불러낸 건 아는데, 그걸 직접 조종해 볼 기회는 있었을까 싶어서.”

“프란츨, 그게……”

“그게 그렇게나 대단한지 궁금하긴 하거든. 물론 너야 그전에도 꽤 타 봤으니까 감흥은 별로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너희도 정식 교전 임무는 거의 처음이었을 거 아냐. 제7전투항공단은 겨울까지 교전 준비밖에 못 한 수준이었으니까. 성과는 얼마나 냈어? 난 어땠어? 괜찮았어?”

말을 끊을 새도 없이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내는 뤼초에게 그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이 무엇이 있을까? 갓 뮌헨-림 비행장에 도착한 뤼초는 거의 2년 만에 무장이 달린 전투기, 그것도 기존에 타던 기종들과는 판이한 전투기의 조종석에 올랐었다. 자연히 적응하는 데에 어려움이 조금은 있었지만, 결국에는 해냈다. 귄터 뤼초는 뛰어난 조종사였으니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격추는 두어 기가 전부였지만, 불과 일주일, 제대로 된 훈련 교본도 뭣도 없이 구두로 된 설명만을 듣고 금세 조종법을 익힐 만큼의 재능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제비라고 불리던 그 전투기를 사랑했을까? 그것을 조종하며 하늘을 활공하는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는 있었을까?

짐가방 하나를 덜렁 든 채 베로나에서 뮌헨으로 온 뤼초는 갓 도착한 날에야 그럭저럭 들떠 있었으나 날이 갈수록 침울해졌다. 밤마다 모여 술을 마시는 대원들과 어울릴지언정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고, 하루가 갈수록 웃음과 희망을 잃은 사람처럼 굴었다. 가슴 속에 초조와 불안과 절망 밖의 감정이라고는 들어 있지도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의 모습이 어찌나 걱정스러웠던지.

훗날의 슈타인호프는 그 마지막 며칠간의 그가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기라도 한 것이 아닐지, 어쩌면 그러한 형태의 최후를 맞기를 선택하기라도 한 것이 아닐지, 따위 끔찍한 생각을 간간이 떠올렸다 애써 지워버리기를 반복하기도 했었다. 그런 마당에 그에게 어떻게 진실을 곧이곧대로 말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애써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조종은 도착하고 바로 다음 날부터 내가 직접 가르쳤지. 내가 훈련 담당도 겸하고 있었으니까.”

“금방 배웠겠지? 아무래도 전투기를 제대로 몰아본 지가 한참인데…….”

“관점에 따라 다르지. 너, 질문이 어찌나 많던지……. 결국 내가 설명은 그만두고 당장 이륙해서 직접 몰아보고 오라고 했었지? 그랬더니 바로 감을 잡더라.”

뤼초가 그 말에 멋쩍게 웃었다. 슈타인호프는 아주 잠시 그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다 정신을 차렸다. 저 쑥스러운 미소가 어찌나 그리웠던지,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

“정말 천사가 뒤에서 밀어주는 것 같았어?”

“아니, 그건 그냥 갈란트가 하는 소리고. 그래도 굉장하긴 했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항공기였으니까.”

“임무는 어떻게 했고?”

“뭐, 그럭저럭. 갈란트가 얘기 안 해 줬어?”

“아는 게 거의 없어. 장군님이 이틀 전에 전보로 제트기 부대를 만들었는데 일할 사람이 모자라니까 뮌헨-림으로 오라고, 추방 문제는 해결해 뒀다고, 원하면 비행도 할 수 있다는 말만 보낸 게 끝이었으니까.”

잠시 상황을 가늠해 보던 슈타인호프는 이 정도는 이야기해 줘도 되겠지 싶어 말하기 시작했다.

“임무야 뻔하지, 매일 몰려드는 폭격기들을 요격하고 폭격 임무를 방해하는 정도가 끝이었어. 매일 몇 번씩 슐라이스하임의 레이더 담당자들이 폭격기가 이륙했다는 무전을 보내오면 시간에 맞춰 출격해 교전하고, 가끔은 호위기들과 싸우기도 했고. ……솔직히,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루프트바페의 전설 아돌프 갈란트가 손수 모은 에이스들의 부대로 알려진 제44전투단의 실체는 보잘것없었다. 높으신 분들께 찍혀 나가리가 되었으나 그냥 죽이거나 묻어 버리기엔 실력이 아까운 군인들, 또는 전쟁이 다 끝나가는 마당에 병원이든 요양소든 어딘가에 앉아 있다가도 제트기를 태워 준다는 말에 눈이 돌아서 목숨을 걸고 도박하겠답시고 뛰쳐나온 부상자들, 그것도 아니면 그런 제정신 아닌 동료들이 걱정되어 꾸역꾸역 옆을 지키러 달려온 조종사들의 집합일 뿐이었다.

“부대 창설 과정부터 모든 게 얼렁뚱땅이었어. 제트기 부대라지만 연료도, 탄약도, 전투기 자체도 아직 공군 사령부에 밉보이지 않은 제7전투항공단으로 가버린 덕분에 모든 게 부족했거든. 제대로 된 활동은 고작 한 달밖에 하지 못하기도 했고…….”

“그래도 무언가를 하긴 했잖아. 폭격에 당해 죽었을지도 모를 사람을 꽤 많이 구했을 거 아냐?”

“그게 의미가 있었냐, 이거지. 슈바인푸르트 때 같은 효과는커녕 그 근처에도 못 갔으니까. 그게 네가 기대하던 효과였잖아. 안 그래? 갈란트가 내게 제7전투항공단장을 맡겼을 때 네가 신나서 찾아와서는 그런 얘기를 했었잖아.“

“하지만 폭격기 몇 대는 잡았을 거 아니야. 그럼 된 거지.”

“……적을 격추한 만큼 우리도 너무 많은 것을 잃었는걸.”

그 말에 뤼초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비행대가 잃은 그 많은 것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럼 넌…… 어떻게 된 거야?”

“뭐가?”

“그……”

뤼초의 손이 두루뭉술하게 움직였다. 그 손짓은 슈타인호프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그날도 그냥…… 뭐, 뻔하지. 폭격기들이 몰려온다는 통신을 받고 출격하려고 나섰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설명하려고 애썼지만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이 귀에 선연하게 들렸다. 그날로부터 1년 가까이가 흘렀다. 병실에 가만히 누워 흐릿한 시야로 허연 천장이나 응시하며 자신이 당한 사고와 그로 인한 결과,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시간은 충분했다. 슈타인호프는 자신이 모든 후회와 고통을 마음속에서 지워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같은 병실을 쓰던 어린 말상대들과 대화를 하는 일은 도움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뤼초에게 다시 이야기하려니, 분명 덜어 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마치 그날, 약에 잔뜩 취해 모든 감각이 무뎌진 채 침대에 누워 의식과 무의식 사이 어드메를 부유하다 아돌프 갈란트의 옷에서 풍기는 화염과 전쟁과 공중전의 냄새를 맡고 불현듯 정신을 차렸던 것처럼. 그리고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에 치밀었던, 고용량의 모르핀도 차마 덮어줄 수 없었던 아픔처럼.

“백작과 우리 꼬마 페어만이 나랑 같이 날기로 했고. 새로 개발된 로켓탄 같은 걸 받아서 그걸 써 본다고 전투기에 달았거든. 웃기지 않아?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도 온갖 새로운 무기가 튀어나오는 꼴이란. 그래서 기체가 너무 무거워진 거지. 그 와중에 폭탄 구덩이에, 아, 매일 비행장에 공습이 떨어져서 말이야, 아무튼 거기 바퀴가 걸렸고, 그리고…….”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혹시라도 취기에 실수로 진실을 말하지 않도록, 프란츨에게는 오직 반쪽짜리 진실만을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머리에 박아 놓은 채였다. 하지만 그 사고 이야기를 마치면 더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아주 단순했으니 말이다. 일주일쯤 비몽사몽 약에 취해서 누워있다 별안간 듣게 된 청천벽력 같은 소식 — 그 이야기를 저도 모르게 울컥 토해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하지만 뤼초는 그가 입을 다문 것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미안, 괜히 물어봤지.”

“아니야.”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을까?”

“응, 프란츨, 아무것도. ……그래도 네가 있어서 훨씬 나았어. 그땐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누가 죽여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

뤼초가 인상을 쓰고 몸을 움츠렸다. 그는 유쾌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백작이 날 정말로 죽이려고 했다더라. 약속을 지킨다고. 의리 하나는 정말 인정해 줘야 한다니까.”

농담으로 던진 소리였다. 그러나 그 말에 뤼초의 얼굴이 더욱 사정없이 구겨졌다. 슈타인호프는 억지로 최대한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 괜찮아, 프란츨.”

“……정말?”

“응, 정말로. 내 걱정은 마.”

얼굴에 떠오른 우울하고 미심쩍은 빛은 거두어지지 않았으나, 뤼초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술병과 접시가 비었다. 창밖에는 어느샌가 어스름이 찾아든 후였다. 식탁을 대충 정리한 슈타인호프는 2층 욕실로 향했다. 오래 방치되어 녹물이 좀 나오기는 했지만, 수도관이 멀쩡히 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 제법 감격스러웠다. 그는 먼저 적당히 씻은 뒤 나와서 작은 여행 가방을 뒤적거려 잠옷을 꺼냈다. 병원 냄새가 잔뜩 배어 빠질 줄을 모르는 낡은 옷이었지만 다행히 두 벌이었다. 한 벌은 입고, 한 벌은 꺼내서 침대에 올려놓았다. 이러면 씻고 나와서 알아서 입을 것이다. 뤼초가 빈손으로 비행장에 놀러 올 때면 가끔 그러곤 했다. 물론 보통은 같이 씻어서 이럴 일이 드물기는 했지만 말이다.

머지않아 물소리가 꺼지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밖으로 나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뤼초가 꺼내 놓은 옷을 주워 입는 동안, 슈타인호프는 그를 등지고 침대에 누운 채 커튼이 쳐진 창을 바라보기만 하다 물었다.

“내 옷인데 입을 만해?”

“응. 잘 맞아.”

“다행이다.”

“우리 옷 사이즈 같잖아. 군복도 잘못 바꿔 입어도 잘 맞기는 했으니까…….”

슈타인호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다시 그들을 에워쌌다. 뤼초는 더 말을 거는 대신 비워 놓은 침대 옆자리에 누웠다. 매트리스가 그의 체중에 푹 꺼졌다. 같이 누워 있자니 옛날 생각이 괜히 나는 바람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뤼초가 팔을 뻗어 그를 안았다. 손이 또 슬그머니 움직이며 몸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골반을 밀착하자, 엉덩이에 눌리는 발기한 성기에 화들짝 놀란 슈타인호프는 그를 걷어찰 뻔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너 진짜 이래야겠어?”

“싫어?”

황당하게 묻자 돌아온 답은 퍽 단순했다. 그리고 부정으로 답하기도 어려운 물음이었다. 사실 결코 싫지는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하지 않은 탓에 쌓인 것이 컸다. 사실상 24시간 감시당하는 병원에서 붙어먹을 상대를 찾거나 실제로 그런 행위를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수술이든 뭐든 치료를 받고 나면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기만 하느라 섹스는커녕 자위도 할 기력이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몸이 붙어 있으니 자연스럽게 동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슈타인호프는 자신을 타일렀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도 모르는데 몸부터 붙이는 게 맞나? 짐승 새끼도 아니고? 하지만 곧장, 마음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반박했다. 전쟁 때는 상황이 좋아서 그렇게 열심히 붙어먹었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꼴을 하고는 차마 —

“너 급하면 차라리 손으로 해 줄게.”

결국 그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어깨에 닿은 뤼초의 고개가 제법 단호하게 절레절레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나만 즐기는 꼴이잖아.”

“나, 난 별로 안 하고 싶어. 힘들단 말이야. 그리고 꼴이 이런데 무슨 — ”

“난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다니까?”

쏘아붙이듯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뤼초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이대로 하자. 뒤에서 안고.”

잠시 고민하던 슈타인호프는 결국 수긍했다. 사실 진작에, 뤼초가 자신의 엉덩이에 성기를 문지르는 뜨거운 감각이 느껴졌을 때부터 서버린 상태였다. 의지와 무관한, 학습된 본능에 가까웠다. 얼굴을 보지 않고 하면 그럭저럭 괜찮을지도 몰랐다.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뤼초의 입술이 귀에 닿았다. 귓바퀴에 입을 맞추고 혀를 내어 훑으며 애무하는 그의 손이 잠옷 셔츠 목깃으로 향했다. 옷을 벗기려는 것이었다. 슈타인호프는 그의 손목을 홱 잡아채며 재빨리 말했다.

“벗기 싫어. 입고 할래.”

“보는 사람도 없는데……”

“아, 싫다고. 할 거면 그냥 빨리 박고 싸고 끝내. 나 피곤해.”

짜증스럽게 말하자 뤼초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알았어. 바셀린 같은 거 있어?”

“내 가방에 있을 거야.”

“꺼내 올게.”

잠깐 떨어져서 침대에서 내려간 뤼초가 가방을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머지않아 돌아온 그가 다시 슈타인호프를 뒤에서 안고 잠옷 바지와 속옷을 오금 아래까지 내려 주었다. 반쯤 선 성기가 옷 속에서 튕기듯 나왔다. 앞에서 액이 조금씩 흘러내려 약간 축축했다. 뤼초의 손이 그것을 움켜쥐고 기둥을 두어 차례 쓸다 선단을 손끝으로 문지르자, 그 순간 자극이 치솟았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쾌감에 앓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앞에서 맑은 액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뤼초가 픽 웃는 것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괜히 부끄러워져 그를 걷어차고 싶은 마음이 솟았다. 왜 부끄럽지? 너무 오랜만이라?

앞에서 손을 뗀 뤼초의 한 손이 그의 둔부로 향했다. 그가 살 한쪽을 잡아 벌리고, 언제 바셀린을 퍼서 발랐는지 모를 손가락 하나를 구멍에 삽입했다.

“아, 흐으 — ”

갑작스러운 이물감이 불편했다. 역시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 듯했다. 항상 꼼꼼한 전희를 고집하는 뤼초에게 그딴 건 됐으니 빨리 박기나 하라고 독촉하곤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런 객기를 부리면서 비슷한 요구를 했다가는 정말 피를 봤을지도 몰랐다.

“아파?”

조금씩 움직이려던 손이 바로 멈칫했다. 슈타인호프는 고개를 저었다.

“참을 만해. 계속 해.”

다른 손이 긴장을 풀라는 듯 허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미끈거리는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검지와 중지가 뜨거운 속을 꾹꾹 누르며 다물린 구멍을 가위질하듯 넓히는 것이 느껴졌다. 슈타인호프는 몸에서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안에서 살며시 굽어졌다 펴진 손가락이 내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부피감이 상당했다. 아, 겨우 이 정도로 벌써 힘들면 안 되는데, 얘 엄청 큰데, 같은 생각을 하며 숨을 차분하게 쉬어보려고 애썼다. 그때, 단단한 손끝이 어느 지점을 압박하는 바람에 신음을 터뜨려야 했다.

“흐, 윽!”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자신의 것 같지 않은 목소리에 놀란 슈타인호프는 손등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몸을 움찔거리며 떠는데도 뤼초는 계속해서 같은 지점을 집요하게 건드렸다.

“야, 그만, 흐윽, 응, 그만 해애 — ”

“조금만 더…….”

뤼초의 손은 고집스럽게도 그 한 곳만을 꾹꾹 압박했다. 이러다가 본판을 시작하기도 전에 가버리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 으, 그만, 하라고, 아, 윽, 진짜!”

결국 참지 못하고 뤼초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나서야 그가 아얏, 하며 손을 멈추었다.

“너 진짜, 뭐 하는 거야!”

“미안. 그런데 네가 풀어주는데 얌전히 있는 게 오랜만이라…… 흥분했나 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멋쩍었다. 그가 슈타인호프의 목덜미, 어깨에 얼굴을 문지르듯 기댔다.

“이제 넣어도 될 것 같아.”

“응.”

부스럭거리며 잠옷 바지를 벗는 소리가 들렸다. 뜨겁고 뻣뻣하게 선 성기가 구멍에 닿았다.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안은 뤼초가 성기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윤활제를 꽤 써서 뒤를 풀었는데도 두껍고 평균적인 크기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 밀고 들어오는 걸 받아내기가 힘겨웠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애써 숨을 쉬며 힘을 풀려고 하니, 뤼초가 도와주려는 듯 허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천천히, 하지만 꿋꿋하게 성기를 욱여넣었다.

“아, 윽, 매키, 너 너무 조여. 힘 좀 더 빼봐.”

“나도 노력하고 있다고…….”

간신히 뿌리 끝까지를 받아내니 속이 꽉 찬 것 같았다. 아랫배가 살짝 부풀어 오른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 적응하려고 숨을 몰아쉬는 동안 뤼초가 잠시 멈추고 그를 뒤에서 꼬옥 안았다. 목덜미에 입맞춤이 잘게 떨어졌다. 아, 거기도 흉터가 좀 많이 남았을 텐데 —

“움직여도 돼? 괜찮아? 혹시 불편하면 — ”

“아냐, 해줘.”

그가 허리를 뒤로 조금 물렸다 다시 밀어 넣기 시작했다. 벌어진 입에서 날카롭게 허덕이는 소리가 튀었다. 크기가 커서 느끼는 곳을 찌르는 것도 아니고 짓누르며 움직이니 자극이 더욱 심했다. 슈타인호프는 이불을 긁듯이 움켜쥐었다. 바셀린을 얼마나 듬뿍 썼는지, 움직임이 아주 매끄러웠다. 허벅지끼리 부딪히고 철썩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렸다. 살과 살이 맞닿는 적나라한 소리에 둘의 신음이 섞여 들었다.

“흑, 읏, 프란, 츨, 아, 프란츨 — ”

제 입에서 튀어나오는 소리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금욕 1년은 좀 너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상황이 지나치게 어색했다.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

현실감이 들지 않을 때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쾌감이 그를 다시 현실로 끌어내렸다. 두 사람의 몸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외설스러운 마찰음, 뤼초의 헐떡거리는 숨소리. 신음 섞인 나지막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연이어 부르는 소리가 귀에 가까이 붙은 그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 자극적이었다. 느끼는 곳이 뭉개질 때마다 허리가 파드득 절로 튀어 올랐다.

슈타인호프는 이제 완전히 선 성기를 쥐었다. 옆으로 누운 자세 때문에 팔을 편하게 움직일 수가 없었지만 그럭저럭 자극은 줄 수 있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뤼초가 제 손을 그 위로 겹쳤다. 앞뒤로 동시에 오는 자극이 과했다. 뤼초의 반응을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얼굴을 마주 보고 할 자신은 없어 체위를 바꾸자고 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가 어떤 상태인지를 확인할 유일한 방법은 소리뿐이었다.

혼자만 너무 느끼고 있나, 싶어 배에 힘을 주어 출납하는 성기를 조여 보니 곧바로 탄성처럼 신음이 터져 나왔다. 허릿짓에 속도가 붙었다. 반의 반도 빼지 않았다 다시 밀어 넣고, 박기보다는 넣고 뭉근하게 허리를 굴리는 식이었던 움직임이 점점 강해졌다. 반동 때문에 성기가 더 깊숙하게 처박히는 것 같았다. 슈타인호프는 뤼초가 박아대는 박자에 맞추어 허리를 뒤로 붙이듯이 움직였다. 오랜만에 하는 짓이라 움직이는 것이 어색했다.

“흐, 나, 아, 갈 것, 으응, 같, 응 — ”

“나도, 으, 흣, 나도 — ”

결국 그는 앞뒤로 몰아치는 자극에 덜덜 떨다 몸을 굳히고 절정했다. 정액이 튀어 두 사람의 겹쳐진 손을 적셨다. 그래도 내내 제법 규칙적이던 뤼초의 허릿짓도 삐그덕거리다 마지막으로 한 번 깊이 처박히더니 멈추었다. 그의 몸이 잘게 경련하듯 부르르 떨렸다. 안에서 뜨거운 것이 퍼지는 감각이 뒤따랐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적 쾌감은 분명 좋았지만 너무나도 지쳤다. 손에 뒤범벅이 된 데다 침대 시트와 잠옷 자락에도 튀었을 정액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뒷정리고 나발이고 신경 쓸 힘이 없었다.

뤼초가 그를 등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한때의 그들은 질펀하게 붙어먹고 나면 마주 누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었다. 가끔은 정사 후의 탈력감에 어울리는 제법 로맨틱한 대화를, 가끔은 비행과 비행기와 공중전 이야기를, 가끔은 전술과 전황에 대한 토론을, 그리고 가끔은 집단적 독백과 실없는 농담만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다시 불이 붙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처럼 다시 몸을 붙이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얼굴을 마주 볼 자신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너무 지쳤다. 너무나도 많은 일이 벌어진 하루였다. 졸음이 쏟아졌다.

“프란츨, 나, 가방에서 안대 좀 꺼내 줄래?”

“응, 어? 무슨 안대?”

“자려면 필요해. ……눈이 안 감겨서.”

“아, 알았어.”

그를 안고 있던 뤼초가 몸을 떼어냈다. 안에 들어 있던, 이제는 말랑해진 성기가 빠져나가자 정액이 흘러나오는 감각에 또 움찔하게 되었다. 이것도 빼야 한다는 생각이 무색하게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이거지?”

그의 가방을 뒤적거리던 뤼초가 붕대와 거즈로 된 조잡한 안대를 꺼내 건넸다.

“응. 고마워.”

간신히 상체만을 일으켜 뤼초를 등진 채 일어나 앉은 슈타인호프는 안대를 눈가에 둘렀다. 시야 가득 어둠이 들어찼다. 다시 침대에 몸을 누인 그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뤼초의 손이 어깨에 닿는 온기를 잠결에 느낀 것도 같았다.

 

 

4

 

음식 냄새가 그를 잠에서 깨웠다. 눈을 덮은 안대를 조심스레 밀어젖히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뤼초가 누워 있어야 할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가슴이 덜컥했다. 설마 사라졌나? 어딜 갔지? 슈타인호프는 다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오다 소리 내어 신음했다. 허리며, 허벅지며, 골반이며, 아주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는 목소리를 높여 불러 보았다.

“프란츨? 어디 갔어?”

“아래층이야.”

아래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슈타인호프는 제 몸이 말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젯밤 분명 그대로 잠들었었는데, 여기저기 묻어 그대로 말라붙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정액은 흔적도 없이 지워져 있었다. 잠옷 상의 앞자락에는 옅은 얼룩이 남았지만 말이다. 간밤에 뤼초가 뒷정리를 해 놓은 모양이었다.

하체의 둔통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가방을 뒤져 낡은 로브를 꺼내 걸친 슈타인호프는 절뚝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낡아서 밑단이 해진 잠옷 바람으로 부엌에 서 있던 뤼초가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일어났어? 잘 잤어?”

“응.”

“몸은 좀 어때?”

“죽겠어. 아주 온몸이 쑤시는데.”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부러 과장스럽게 말해 보니 뤼초의 표정이 바로 안 좋아졌다.

“미안, 내가 어제 너무 심하게 했지, 나도 오랜만이라 좀 흥분해서…….”

“아냐, 아냐. 깨우지 그랬어?”

“너무 잘 자고 있어서……. 아침 좀 준비하고 있었지. 거기 앉아 있어 봐.”

슈타인호프는 그가 손을 휘저으며 가리키는 식탁 앞에 앉았다. 전날 사 온 빵과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소시지가 놓여 있었다.

“어제 사 온 소시지 좀 삶았고, 감자수프도 끓였는데 맛있을지는 모르겠네.”

해군에서 짧게 복무하는 동안도 여러 번 이름을 들어 보았을 만큼 뼈대 있는 프로이센 장교 가문 출신이라 이런 일을 못 할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뤼초는 요리를 꽤 잘하는 축에 속했다. 러시아에서 가까운 비행장에 주둔해 있을 때면 슈타인호프는 그의 부대에 놀러 가서 뤼초가 변변찮은 야전 보급품으로 뚝딱 만들어내는 음식을 얻어먹곤 했었다.

그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앉아 있는 동안, 뤼초가 냄비에서 끓는 수프를 접시에 덜어 앞에 놓아 주었다.

“뭐야, 파슬리는 어디서 났어?”

“여기 찬장에 있던데.”

“상한 거 아냐?”

“에이, 설마…….”

뤼초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쇠숟가락이 접시 바닥에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변변찮은 재료로 만든 수프는 생각보다 걸쭉했고, 소시지는 적당히 짭짤했다. 빵을 한 조각 베어 물던 뤼초가 그를 힐끗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었다. 끔찍하게 어색한 정적만 계속 흐르던 전날보다는 분위기가 괜찮았다. 섹스 덕분인가? 처음에 싫다고 빼기는 했지만, 결국엔 좋았으니까. 슈타인호프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 주고 있던 힘을 뺐다.

“집을 좀 치워야겠다, 그치? 엉망진창이잖아. 먼지도 너무 많아.”

“응, 그러자.”

뤼초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어제 들어오면서 봤는데 뒷마당도 좀 엉망이더라고. 나중에 손질 한번 하면 좋겠는데…….”

하긴 정말 엉망이었지, 슈타인호프는 소시지를 잘라 포크로 찍으며 생각했다. 정원 잔디는 반쯤 파먹혀서 흙이 드러나 있었고, 한편에는 또 제멋대로 자라난 덤불과 담쟁이덩굴이 우거져 있었다. 폭격으로 폭삭 무너지지나 않은 것이 다행이었으니 불평이든 뭐든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네 옷도. 외출복으로 쓸 만한 게 없으니까, 휘장 다 뜯은 다음 입고 다니면 될 거야.”

“군복 입고 다니면 안 된다지 않았어?”

“그러고 다니는 사람이야 많아. 다들 옷을 새로 살 여력이 없을 테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에 쥔 포크를 만지작거렸다.

“월급도 연금도 안 나오는데 어떡하겠어. 듣자 하니 장교 출신들에겐 일자리도 잘 안 준다던데…….”

다시 대화가 끊겼다.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뿐이었나 싶어진 슈타인호프는 수프를 한 숟갈 더 떠서 삼키고는 다른 화제를 찾았다.

“병원 얘기나 해 줄까?”

그는 일부러 가벼운 목소리를 내 보았다. 뤼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이 어쩐지 떨떠름해 보였다.

“이런 얘기 싫으면 말고.”

“아냐, 나는 좋아. 그간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어. 다 얘기해 줘.”

뤼초가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해명하듯 말했다. 어쩐지 그를 조금 놀리고 싶어진 슈타인호프는 짓궂게 말했다.

“그런데 왜 대답은 안 하고 고개만 끄덕거려? 싫은 줄 알았잖아.”

“아니, 먹고 있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

억울하다는 듯이 곧바로 항변하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슈타인호프는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군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병실을 다른 두 명하고 같이 썼거든? 한 명은 기상청에서 일하다 온 물리학 박사님이셨는데, 맙소사, 가끔은 정말 끔찍했어, 그 친구. 제국원수 각하를 어찌나 존경하던지.”

“그런 인간들은 어디서 자꾸 튀어나오는 거람?”

“우린 모르는 무슨 매력을 느꼈나 보지.”

“한 소리 해 줬지? 제발 했다고 말해줘.”

“당연하지. 그 뒤로 뚱땡이 찬양은 더 이상 안 하더라.”

최선을 다했지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종전 이전의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으므로. 교전 중 부상을 입고 실려 온 갈란트에게 끔찍한 소식을 전해 들었던 그날과 그 이전의 이야기를 어찌 할 수 있겠나? 결국 슈타인호프의 최선은 포로 신분인데도 생각 없이 철십자 훈장을 목에 걸고 나돌아다니다 머리통이 박살 나 죽을 뻔한 크루핀스키의 이야기 정도였다. 그리고 반병신이 된 에이스 둘과 같은 병실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좋아라 하던 전차병 홀츠아머의 이야기도.

“……걘 우릴 무슨 이야기보따리 정도로 취급하더라.”

“이상할 것도 없지.”

“뭐가 그렇게 궁금했던 건지, 참.”

“생각해 봐, 매키. 네가 부상으로 입원했는데 같은 병실에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 누워 있는 수준이라고.”

“음, 그런가? 그 정돈 아닐 텐데.”

“우리 얼굴 그려진 엽서가 한두 장만 팔리진 않았지.”

“일리 있는걸.”

천천히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릇이 비었다. 슈타인호프는 설거지를 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릇을 닦아내고 있으니 식탁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치운 뤼초가 뒤에서 뭐라도 할 일을 달라는 듯이 어색하게 기웃거렸다.

“할 일 없으면 네 옷에서 휘장이나 뜯지 그래? 뒤져 보면 반짇고리 하나쯤은 나오겠지.”

“응.”

어깨 너머로 그렇게 말하자마자 뤼초가 대답을 하더니 곧장 부엌을 나서 어딘가로 가버렸다. 거실을 뒤적거리는 소리가, 서랍장을 열었다 닫고, 위층까지 올라가 여기저기를 들쑤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한 소리였는데 진심으로 성실하게 임하는 모습이 프란츨다웠다. 머지않아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살짝 돌린 슈타인호프는 뿌듯한 기색이 가득한 뤼초의 얼굴과 그의 손에 들린, 아주 작은 양철 뚜껑 달린 상자를 보고 피식 웃었다.

사용한 그릇의 물기를 행주로 닦아 찬장에 도로 차곡차곡 넣은 후 돌아보니, 뤼초가 식탁 앞에 앉아서 벗어 놓은 군복을 붙잡고 있었다. 핀으로 고정해 놓은 훈장만 떼어 놓고, 아직도 목깃에 달린 계급장을 겨우 반밖에 뜯어내지 못한 상태였다.

“너 정말, 이런 건 아직도 잘 못하는구나.”

의자를 그의 옆에 끌어다 놓고 앉으며 핀잔을 주니 뤼초가 고개를 들었다.

“해본 적이 있어야지. 네가 늘 해줬잖아.”

하긴, 정말 그랬다. 러시아에서 함께 주둔해 있던 시절에는 늘 있던 일이었다. 항공 작전이 불가능한 날씨면 뤼초가 단장으로 있는 제3전투항공단의 비행장으로 가서 그와 실컷 붙어먹곤 하던 슈타인호프는 늘 옷을 벗다 한두 개씩 떨어지고 마는 뤼초의 옷에 단추를 매번 다시 달아 주었었다. 처음에는 직접 하라고 하니 엉망으로 바느질을 해 놓는 꼴이 답답해서 도와준 것이었는데, 나중엔 좀 당번병에게 시키지 그러냐고 잔소리를 하니 부끄럽다고 주장한 탓이었다.

“요리는 그렇게 잘하면서. 이리 줘.”

그는 뤼초의 손에 들린 군복 상의와 쪽가위와 바늘을 빼앗았다. 손끝으로 박음질 된 장식의 모서리를 밀어 올리고 실밥을 자르며 바늘을 이용해 능숙하게 빼내는 동안 뤼초는 팔짱을 낀 채 그의 손놀림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가슴팍의 공군 휘장을 뜯어내고 있을 때, 그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몸을 살짝 기울이더니 슈타인호프의 귓바퀴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란 슈타인호프는 움찔하며 들고 있던 바늘로 손가락을 찌를 뻔했다. 그는 뤼초에게 눈을 흘기며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손 찔리게 하려고 작정했나.”

“아, 아파, 아무튼 안 찔렸잖아.”

“너 때문에 찔릴 뻔했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심으로 성을 낼 생각은 아니었다. 뤼초도 그의 마음을 아는지 얻어맞은 옆구리를 문지르며 웃기만 했다. 머지않아 작업이 끝났다. 장식이 모두 사라진 군복은 별 볼 일 없는 감색 정장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 다 됐다.”

슈타인호프가 건넨 옷을 받아 든 뤼초는 잠시 말이 없었다. 휘장과 훈장을 모두 떼어낸 옷을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는 것이, 이걸 입으면 얼마나 눈에 덜 띌지를 가늠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창밖의 해는 조금 더 기울어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슈타인호프는 반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 뭐 하지.”

“그러게.”

“집이나 좀 청소할래? 남의 집이긴 해도 한동안 여기서 지낼지도 모를 일이니까.”

“난 좋아.”

둘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과 거실을 뒤졌다. 부엌 카운터 아래에서 낡은 헝겊 조각 몇 장과 세월의 흔적이 훤히 보이는 빗자루 하나, 손잡이가 헐거운 먼지떨이 하나가 나왔다. 뤼초가 빗자루를 들고 먼저 거실 한쪽 모서리를 쓸었다. 묵은 먼지가 한 번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와, 먼지.”

“아무래도, 사람이 아무도 안 산 지 몇 년 됐다니까…….”

슈타인호프는 헝겊에 물을 조금. 적셔 창틀에 쌓인 희뿌연 먼지부터 시작해 여기저기 내려앉은 먼지를 닦기 시작했다. 집안에 라디오랄 것도 없었으므로 집 안의 정적을 채울 방법은 대화뿐이었다. 라디오를 틀어 보았자 전범 재판 같은 우울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만 한창이었겠지만. 그마저도 대화 소재가 모두 떨어진 나머지 어느 순간부터는 침묵밖에 흐르지 않았다.

아주 평범하고 무료할 지경인 하루였다. 그저 함께 오래도록 사람이 살지 않아 곳곳에 먼지가 내려앉은 집을 청소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인. 갓 새로운 비행장에 도착하는 날이면 으레 있는 일상이었다. 가까운 민가가 되었든, 철판으로 세운 간이 막사든, 정말 간신히 천막만 치고 침대만 놓은 공간이든, 새 숙소를 마련하고 나면 청소를 하고 취향껏 꾸미곤 했으니 말이다. 나중엔 하도 옮겨 다닌 나머지, 새 보금자리에 대한 설렘은 사라지고 귀찮음만 남아 당번병에게 청소를 떠맡기기 시작했었다. 벗은 여자 사진이나 가족사진을 한 보따리 들고 다니는 어린 조종사들과 달리 짐을 줄이고 줄여 책 몇 권이나 머리맡에 놓아두는 것이 전부였었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프란츨과 함께 보내고 있자니 참 좋았다. 비행과 군 생활이 무엇보다 최우선이었기에 아내와도 제대로 즐겨 보지 못한 신혼 분위기 같다는 실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게다가 어색하긴 했어도, 계속 누워 지내다 가끔 산책을 나서기 정도밖에 할 일이 없는 1년간의 생활 끝에 소소하게나마 제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즐거웠다.

그는 문득 제 얼굴만큼이나 망가진 홀츠아머의 얼굴을 떠올리고 웃었다. 그 꼬맹이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한동안은 병원으로 편지와 연락을 주고받았었지만, 어느 날부터 퇴원한 건지 뭔지 연락이 뚝 끊긴 후였다. 어린애답게 병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는 일의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온종일 몸을 비틀던 그 녀석이 마침내 할 일이 생겼을 때 어찌나 기뻐했던지. 이젠 그의 심경이 십분 이해되었다.

얼마나 움직였다고 허리가 쑤셨다. 1년간의 치료와 재활에도 불구하고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전날 밤에 붙어먹다 얻은 근육통에 더해 전신에 흔적을 남긴 부상 때문일지도, 혹은 너무 오래 누워 지낸 탓이었을지도 몰랐다. 식탁을 문지르던 젖은 천을 내려놓은 그는 뤼초가 곁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벽에 몸을 기댔다. 프란츨은 언제나처럼 강인했다. 전선에서 적의 전투기와 싸우는 대신 쏟아지는 서류와 씨름하기 시작한 지가 오래였음에도 말이다. 슈타인호프는 천장의 거미줄을 털어내는 친우의 뒷모습을 감상하며 좋던 그 시절을 떠올렸다.

회의 때문에 베를린의 공군 사령부를 방문했던 날이었다. 그날은 천만다행으로 제국원수의 헛소리가 짧았던 덕에 회의가 일찍 마무리되었고,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떠 버리자 친구의 집무실로 따라 들어섰었다. 뤼초는 다시 책상에 앉아 일을 하려고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무실에서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아, 매키? 겨우 그런 이유로 할 일도 없는 날 혼자 내버려두시겠다? 그런 줄 몰랐는데 매정한걸. 야, 아직 근무 시간이라고,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그는 항의하는 뤼초의 입을 제 입술로 틀어막고 재빨리 정복 벨트와 단추를 풀어냈었다. 빨리 끝내면 되지. 그의 입술을 살며시 깨물고 떨어지며 나지막하게 속삭이자 뤼초가 두 손을 들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슈타인호프는 그의 셔츠 자락을 바지춤에서 단숨에 빼내고는 그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결 좋은 맨살에 덮인 단단한 근육의 감촉이 참 좋았었는데.

자연스럽게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들킬 염려가 있거나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면서 옷도 다 벗지 않고 붙어먹었을지언정, 뤼초와의 섹스는 언제나 그렇듯 기분 좋았다. 허리를 붙잡는 그의 단단한 손힘, 길고 두꺼운 성기가 뱃속을 헤집는 아주 익숙한 감각 —

뤼초가 몸을 돌렸다. 시선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뭐?”

“왜 웃어?”

그제야 슈타인호프는 제가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음을 깨닫고 재빨리 정색했다. 그러고는 대꾸했다.

“안 웃었어.”

“웃었잖아. 나 구경하고 있었지?”

“……감은 아직 안 죽었네.”

짙은 선글라스 너머의 시선까지를 알아차린 것은 역시 조종사다운 감일 것이었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언제나 주변을 살펴야 하는 전투기 조종사에게는 또 하나의 본능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그런 감.

“감은 무슨, 네가 하는 게 뻔하지.”

뤼초가 그리 말하며 멋쩍은 웃음을 짓고는 다가왔다.

“할래?”

“대낮이야, 프란츨.”

“3시는 대낮이라기에 좀 늦지. 그리고 뭐 어때? 이제 군인도 아니잖아.”

“그래, 이젠 아니지.”

“우리가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새 좀 꼰대 늙은이 같아졌다?”

“진짜로 늙었잖아. 우리 이제는 사실상 동갑이라고. 아, 엉덩이 만지지 말고…….”

그는 절반 정도만 진심인 항의를 힘없이 내뱉어 보았다. 과연 그 진심의 농도를 알아차렸기 때문에 그러는지, 그냥 제멋대로 굴고 싶어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뤼초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손으로 그의 바지 앞섶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야, 너, 진짜 — ”

“쉿.”

익숙한 손길에 몸이 금세 반응했다. 한 번 더 소심하게 저항해 보려던 슈타인호프의 말은 퍽 단호한 뤼초의 목소리에 끊어졌다. 입맞춤이 뒤따랐다. 뤼초가 그의 입술을 핥았다. 슈타인호프는 키스를 끊지 않고 자신을 벽으로 밀어붙이는 친구의 팔을 붙잡았다 신음을 내뱉으며 벨트로 손을 내려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너도 하고 싶었지, 매키? 어제도 그랬고?”

급한 마음에 손이 미끄러지자 뤼초가 그의 입술에서 입을 잠시 떼며 물었다. 어두운 렌즈 너머, 눈앞에 가득 들어찬 그의 진지한 얼굴에는 은근히 의기양양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슈타인호프는 코웃음을 쳤다.

“그럼 네가 그렇게 만져대는데 가만히 있어?”

그리 말하며 벨트를 풀던 손을 조금 아래로 내려 다리 사이에 잡히는 살덩이를 움켜쥐자 뤼초가 낮게 신음했다.

“너도 벌써 세웠으면서.”

뤼초는 대답하는 대신 슈타인호프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밀어 끼우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뤼초의 손이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슈타인호프는 그 손에 닿은, 그가 느끼고 있을 살갗의 감촉을 상상해 보았다. 예전의 그 매끈하고 기껏해야 덜 민 수염만 까끌까끌하게 나 있을 얼굴은 간 데가 없었다. 이젠 말랑한 피부 대신 켈로이드가 울퉁불퉁하게 자리 잡은 피부뿐이었다. 혹시 불쾌하게 느끼지는 않을까? 끔찍한 생각이 마음 한편을 스쳤다.

“프란츨, 잠깐.”

그는 뤼초를 살며시 밀어내며 입술을 떼어내기 위해 고개를 뒤로 물렸다. 얌전히 밀려난 뤼초가 숨을 고르며 의중을 읽어 보려는 듯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물었다.

“너 서서 하는 건 좀 불편하려나?”

슈타인호프는 그 물음에 참지도 못하고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고작 자세가 불편하다고 멈추게 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고? 프란츨 뤼초는 정말이지 눈치가 없었다.

“응, 뭐, 별로 상관은 없는데 — ”

“네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건 싫어. 이리 와 봐.”

그가 슈타인호프의 손을 덥석 잡더니 아까 식사를 하던 식탁으로 향했다. 슈타인호프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다시 입을 맞췄다. 뤼초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가, 벌어진 입술 틈새로 혀를 밀어 넣으며 입안으로 침범하자 말랑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마중 나오듯 입안에서 그와 얽혀들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뒤섞여 주룩 흘러내렸다.

슈타인호프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어깨와 팔뚝을 쓰다듬듯 만지작거리다, 더 아래로 내려와 뤼초의 바지를 풀기 시작했다. 그의 뺨을 연신 붙잡고 쓰다듬던 뤼초의 손도 더듬더듬 아래로 내려와 셔츠 윗단추로 향했다 멈칫했다.

“벗겨도 돼?”

잠시 키스를 끊어낸 그가 물었다.

“음, 아니…… 입고 할래.”

다시 입술이 부딪혔다. 이번에는 뤼초의 손이 곧장 그의 바지로 향했다. 벨트가 풀리고, 바지와 속옷이 한 번에 허벅지까지 끌어내려지자 슈타인호프는 식탁에 엎드렸다. 높이가 아주 적당했다. 몸이 달아서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정작 뤼초는 그에게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빨리 해, 프란츨.”

“잠깐, 바셀린이……”

“그냥 넣어.”

“안돼, 너 어제도 힘들어했잖아. 어젯밤에 쓰던 걸 — ”

“너 설마 지금 위층 올라갔다가 오겠다는 소릴 하는 거야? 먼저 하자고 해 놓고?”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킨 그는 고개를 돌려 뤼초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마주 닿은 뤼초의 아랫입술을 조금 아프게 물자 그가 움찔 떨었다.

“열심히 안 풀어줘도 돼, 어젯밤에도 했잖아.”

“어젠 힘들어했으면서.”

“정 그러면 침으로 대충 해.”

슈타인호프는 마침내 수긍하는 뤼초의 반응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식탁 위로 엎드렸다. 등 뒤에 뤼초의 몸이 다시 겹쳐졌다. 엉덩이에 뜨거운 감각이 닿았다. 입안으로 손가락 두 개가 들어왔다. 무얼 하라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지만 무엇을 요구하는지는 뻔했다. 그는 뤼초의 손가락을 핥았다. 침에 충분히 젖은 손가락이 입안에서 빠져나가고 잠시 후 아래를 비집고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삽입에 몸이 잠시 긴장되었지만 의식적으로 최대한 힘을 빼려고 해보았다.

“그냥 해도, 으으, 된다니까, 정말……”

“빨리 할게.”

무어라 한 마디를 더 얹으려던 슈타인호프는 제 뒤를 푸는 뤼초의 손길에서도 느껴지는 다급함에 입을 다물어주기로 했다. 금세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느끼는 곳을 성실하게 자극해 주며 꼼꼼하게 구멍을 넓히던 그는 슈타인호프가 급한 마음에 더는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들썩거릴 즈음에야 손가락을 뺐다. 엉덩이에 성기가 문질러졌다.

“넣을게.”

“응.”

젖은 구멍으로 성기가 밀려 들어왔다. 내장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두꺼운 살기둥의 감각에 파드득 떨며 반사적으로 몸을 굳히자 뤼초가 머뭇거렸다. 힘을 풀어야 움직이기 시작할 텐데, 속으로 파고든 커다란 성기가 어쩐지 유난히 버겁게 느껴져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괜찮아?”

“응, 계속, 해.”

“일단 힘 좀 빼.”

뤼초가 손으로 그의 등뼈 부근을 부드럽고 느릿하게 문지르며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급했는지 금세 속도가 붙었다. 키가 180센티미터쯤 되는 성인 남자 둘의 움직임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슈타인호프가 손을 짚은 채 몸을 지탱한 나무 식탁이 흔들리는 정도도 심해졌다. 삐걱거리는 소리, 살이 부딪히는 소리에 온갖 액체가 뒤섞여 질척거리는 소리가 섞여들었지만 머릿속을 온통 뒤덮는 쾌감 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서서 버티는 것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절정이 가까워졌음을 알아차린 뤼초가 허리를 자국이 남을 만큼 억세게 붙든 손을 떼어 바짝 서 있는 그의 앞을 감싸 쥐고 이미 끝에서 선액이 줄줄 흐른 덕분에 젖어 미끈거리는 성기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붉게 부풀어 오른 선단부를 엄지로 문지르는 손길이 너무 자극적이었다. 슈타인호프는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몸을 덜덜 떨며 신음을 토해냈다. 식탁 위로 정액이 흩뿌려졌다. 사정하며 몸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출납하던 성기를 꽉 조이는 감각이 견디기 어려웠는지, 이내 뤼초도 멈칫하더니 안에 깊이 파정하고는 엎드린 그의 몸 위로 쓰러졌다.

“야, 너 무거워.”

힘 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은 기분이 좋아지는 종류였다. 숨을 몰아쉬는 뤼초의 빠른 심박이 그대로 몸을 타고 느껴졌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 감각에 방금 사정했음에도 아래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뤼초가 몸을 꾸무적거렸다. 마찬가지로 방금 사정하고 힘이 빠진 것이 금세 크기를 부풀리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너 또 세우는 거야? 벌써?”

뤼초의 손이 다시 앞으로 슬그머니 향해서 슈타인호프의 성기를 더듬었다.

“너도 비슷한 것 같은데. 많이 쌓였어?”

“병원 생활 1년 해볼래? 섹스는커녕 딸 치기도 어려운 걸 네가 어떻게 안다고.”

“나도 부상당해서 입원한 적 있어.”

“그게 그거랑 같니? 그리고 너야말로 왜 이래? 몇 달은 못 한 사람처럼.”

“나도 너 못 본 지 오래됐단 말이야. 두 달? 거의 세 달?”

그러고 보니 뤼초 역시 1월에 이탈리아로 추방당한 뒤로 한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슈타인호프는 그를 만나러 가다 헌병에게 붙잡혀 도로 독일로 끌려왔었고 말이다. 좀 전에 자신도 오랜만이라고 하던 것이 그 의미였던 모양이었다. 허벅지에 힘을 주자 뤼초가 앓는 소리를 냈다. 슈타인호프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키스했다. 뤼초가 뿌리 끝까지 삽입한 채로 허리만 둥글게, 아주 천천히 돌리자 입안으로 얕은 신음이 먹혀들어 갔다.

“매키.”

“응.”

“너 계속 옷 입고 하려고 할 거야?”

“응. 왜?”

목덜미의 맨살을 살살 훑던 손이 셔츠 아래로 살금살금 기어들어 왔다. 목덜미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뤼초의 축축한 입술이 닿는 곳마다 화끈거렸다.

“아쉬워서. 너랑 더 닿고 싶은데…….”

미련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에, 슈타인호프는 대답을 망설였다. 아주 오랫동안 대답이 없자 계속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얼굴을 문지르던 뤼초가 말했다.

“상처 때문이지? 네가 정 싫다면 더는 안 고집할게. …하지만 난 정말 상관없어, 매키. 네가 무슨 꼴을 하고 있던 간에, 넌 매키 슈타인호프라고.”

“프란츨, 그게 — ”

“혹시 뭐, 내가 널 보고 못 흥분하기라도 할까 봐 그러는 거야?”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 묻는 그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정곡을 찔린 슈타인호프는 대답이 궁해져 입을 다물었다. 얌전히 다음 말을 기다리듯 조용하던 뤼초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뱃속에 들어 있던 반쯤 발기한 성기가 빠져나가며 약간의 정액도 함께 주륵 흘러나왔다.

“누워봐.”

“뭐?”

“여기 올라가 보라고.”

대뜸 요구하는 뤼초에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어 보인 슈타인호프는 조금 얼떨떨하게 시키는 대로 했다. 식탁 위에 올라앉아 반쯤 누우며 두 팔로 상체를 받치자 뤼초가 그의 신발을 벗겼다. 그다음은 반만 벗겨진 잠옷 바지였다. 헐렁하고 얇은 하의가 쑥 끌어내려졌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은 뤼초가 다시 몸을 겹쳤다. 두꺼운 성기가 다시 몸 안으로 들어왔다.

“난 이런 너도 좋은데.”

뤼초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슈타인호프는 받아쳤다.

“너 혹시 흉터도 전부 훈장이라는 뻔한 소리 할 거면 집어치워라?”

“아니, 그런 거 아닌데? 그냥 너라서 좋단 말이야.”

얜 무슨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는 거람? 괜히 부끄러워지는 바람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도 같았다. 얼굴이 이 모양이라 그게 상대의 눈에도 보일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보통은 슈타인호프가 뤼초를 실없는 소리로 놀리고 곤란해하는 그를 즐겁게 구경하곤 했지만, 아주 가끔은 그의 무뚝뚝한 진심을 듣고 얼굴을 붉힐 때도 있었다. 그러면 프란츨은 은근히 뿌듯한 미소를 짓다 그에게 등이나 팔뚝을 찰싹 얻어맞곤 했었다.

뤼초의 손이 느리게 웃옷 단추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끝이 얼굴만큼 심하게 얽지는 않았더라도 여기저기 얼룩덜룩하게 남은 화상 흉을 더듬었다. 따뜻한 체온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간질거렸다.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상의 단추가 완전히 풀리고 옷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슈타인호프는 그의 도움을 받아 가며 소매에서 팔을 뺐다. 옷을 벗어 한쪽으로 치운 후에야 뤼초의 표정을 제대로 본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상기된 얼굴, 약간 풀린 눈, 벌어진 입, 한창때의 10대 남학생이 난생 처음으로 타인의 맨살을 보고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도저히 한 마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뤼초 씨?”

뤼초가 급하게 표정을 갈무리하려는 듯이 입을 다물었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슈타인호프가 계속 키득거리자 그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리다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너, 너무 말랐어.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마른 것 같은데…….”

“그래? 난 살이 좀 붙었을 줄 알았는데. 움직이지도 않고 누워만 있었잖아.”

“아니, 확실히 더 말랐어. 병원에서 밥 잘 안 챙겨 줬어?”

“병원 밥이 병원 밥이지, 뭐. 맛대가리 없고…… 야, 근데 넌 말만 많고, 옷은 다 입고 있다?”

“아?”

“벗어. 당장.”

그의 지시에 순순히 따른 뤼초가 잠옷 셔츠 단추를 풀고 벗으니 끝내주는 상체가 고스란하게 드러났다.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가슴, 갈라진 복근 — 슈타인호프는 셔츠를 식탁 의자에 거는 그의 튼튼한 팔뚝을 감상하다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아, 이렇게 정을 자꾸 붙이면 안 되는데,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이 프란츨은 현재에 속하지 않으니 언제든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따위 생각이 끊임없이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긁었지만 이성과 본능은 별개였다. 잠깐 옷을 벗는 동안 조금 가라앉은 아랫도리에 다시 피가 몰렸다.

뤼초가 그를 자신의 몸과 상판 사이에 가두듯 양옆을 손으로 짚고 박기 시작했다. 슈타인호프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손끝으로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뚜렷하게 갈라진 등 근육의 결을 따라 쓰다듬었다. 뤼초의 것이 끝만을 남기다시피 빠져나갔다 제자리로 돌아올 때마다 배가 뚫리는 것 같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가 박을 때마다 아랫배가 성기 모양대로 조금씩 불룩해지는 모습이 보였다. 슈타인호프는 목에 두른 손 하나를 내려 뤼초의 손등을 감쌌다. 그러고는 끌어당겨 배를 만지게 해 주자 뤼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매키, 너, 흣, 너 진짜, 자꾸 이러면 — “

“이러면 뭐? 아, 응, 읏 — ”

뤼초의 성기가 뱃속 깊숙이, 아주 세게 처박혔다. 아프다 싶을 정도로 강한 쾌감이 머릿속을 휩쓸었다. 그는 신음하며 고개를 뒤로 젖혀야 했다. 훤히 드러난 목에 내려앉은 뤼초의 입술이 자국을 단단히 남길 작정인 양 굴었다.

 

 

5

 

결국 두 사람이 남은 하루 내내 한 일이라고는 섹스뿐이었다. 뤼초가 정액으로 엉망이 된 식탁 상판을 치우는 동안 슈타인호프는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뤼초가 문을 벌컥 열고 따라 들어왔다. 옷은 다 벗고 물에 쫄딱 젖은 남자 둘이 그다음에 벌일 일이야 뻔했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고 물에 퉁퉁 불어서 간신히 욕실을 나서고 옷을 챙겨 입었더니 이번엔 또 상대의 촉촉하게 젖어 흘러내린 머리칼을 보고 동해 버리고……

저녁때가 되어야 겨우 떨어져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슈타인호프가 그릇 따위를 정리하고 있으니 뤼초가 슬그머니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다음에 이어진 일은 뻔했다. 둘은 식기는 그대로 식탁에 내버려둔 채로 뒤엉켜서는 2층의 침실로 직행했다. 무릎에 피멍이 든 것이 층계참에서 정신없이 입을 맞추다 같이 넘어지는 바람에 마룻바닥에 찧은 탓인지, 침실 바닥에 엎드린 채로 뤼초를 받아낸 탓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제정신인가? 슈타인호프는 검은 렌즈 너머로 빵을 우물거리는 뤼초를 빤히 쳐다보다 생각했다. 이게 서른 넘긴 남자 둘이 할 짓인가? 그러나 생각해 보자니 둘의 관계는 전쟁 때에도 늘 이런 식이었다. 눈만 마주쳐도 불이 붙고 시간과 장소가 허락하는 대로 정신없이 몸을 붙이곤 했으니 말이다. 횟수는 그저 바쁜 업무와 어린 후배 조종사들의 시선에 제한당한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뭘 그렇게 쳐다봐?”

빵 한 조각을 더 뜯어 입에 넣던 뤼초가 물었다.

해가 중천에 뜬 지는 오래였다. 습관적으로 일찌감치 눈을 뜨자마자 홀딱 벗은 채 옆자리에 누운 친구를 보고 또 불이 붙어버렸다 겨우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점심이라기에도 너무 늦은 무언가를 먹게 된 것이었다.

“그냥, 너 먹는 거 구경하는데?”

“……볼 게 대체 뭐가 있다고?”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던 뤼초는 알아서 납득한 것인지, 이해를 포기한 것인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빵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슈타인호프는 대낮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주 앉아서 느긋한 식사를 하고 있자니 참 좋다고 생각했다. 식사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언제 이렇게 여유롭게 서로와 함께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었던가? 러시아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브란덴부르크에서도 매번 이런 식이었다. 얼마 주어지지 않은 시간을 최대한으로 써 보려고 허겁지겁 옷을 절반만 벗고, 전희를 생략하고, 양쪽 모두 절정을 맞고 나면 급히 흔적을 정리한 다음 군복을 챙겨 입고 다른 방, 다른 침대로 떨어질 필요가 없는 것이 좋았다. 커다란 침대에 옷을 벗고 나란히 누워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고 담배를 피우며 상대방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뤼초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고, 슈타인호프는 얼마간 그의 품에 더 안겨 있었다. 땀 때문에 몸이 끈적거렸지만 씻으려고 일어설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참을 더 잠든 뤼초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침대 옆 협탁에서 안대를 집어쓰고는 어느새 까무룩 잠들었었다.

문득 심한 우울감이 들었다. 정말 프란츨이 언젠가는 돌아가게 되는 걸까?

선물 받은 말을 잘 들여다보면 이가 하나쯤은 빠져 있는 법이다. 헤르베르트 일레펠트와 한스요아힘 마르세이가 그에게 눈물날 만큼 사무치게 가르쳐 준 삶의 법칙이었다. 슈타인호프는 세상에 거저는 없음을 알았다. 말도 안 되는 행운 따위도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이 상황도 마찬가지일 것이 분명했다. 말도 안 될 만큼, 말 그대로 꿈 같은 일이었으니까. 죽은 줄 알았던 뤼초가, 과거의 그가 한 사람의 사고와 한 사람의 실종을 모조리 뛰어넘고 온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누군가 그에게 주는 선물?

그냥 우연?

혹은, 잠시 후면 사라져 버릴 신기루 같은 것?

내가 네게 마음을 줘도 되는 걸까? 혹은 아무런 기대도 없이 흘려보내다 네가 마침내 사라지기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 난 어째야 하지?

그 누구도 답을 줄 수 없는 물음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마음을 줘 버렸을지도 몰랐다. 정말 울고 싶은 기분이 된 슈타인호프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최대한 긍정적인 딴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뤼초가 약간 놀란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야, 누구 올 사람 있어?”

“아니, 없는데……. 잘못 찾아온 거 아냐?”

그 말이 무색하게 정체 모를 불청객이 현관문을 다시 두드리며 아주 요란하게 소리쳤다.

“매키! 집에 없어요?”

그를 ‘매키’라고 부를 사람은 공군 시절에 알던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저 쾌활하고, 약간은 경박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는 생각 이상으로 친숙했다.

“백작? 크루핀스키?”

슈타인호프는 자신을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뤼초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방금 그 말을 실제로 내뱉었음을 깨달았다.

“응, 걔 같은데.”

“둘이 연락하고 지냈어?”

“아니, 그건 아닌데…….”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리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백작이 왜 여기에? 여긴 어떻게 찾아왔지? 하네스가 알려줬나? 용건이 뭐지? 설마 뤼초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알았나? 누군가 역에서, 또는 기차에서 프란츨을 보기라도 했을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왜 왔는지 알아보고 올게.”

“같이 가.”

뤼초가 그리 말하며 같이 일어서려고 했다. 슈타인호프는 손사래를 쳤다.

“아냐, 넌 여기 있어.”

“왜?”

“프란츨, 부탁이야.”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뤼초가 뭐라고 항의하려는 듯이 입을 벌렸지만, 슈타인호프는 듣지 않고 바로 몸을 홱 돌려 문간으로 향했다.

문을 살며시 열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자, 현관 앞에서 서성거리는 남자 하나가 보였다. 이젠 군복도, 병원복도 아닌 낡은 사복 차림이었지만 영락없는 발터 크루핀스키였다. 크루핀스키는 슈타인호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밝게 웃으며 외쳤다.

“대령님!”

“나 이제 대령 아니야.”

그는 건조하게 받아쳤다. 크루핀스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아직도 영락없는 어린애군, 슈타인호프는 생각했다.

“그래도 제겐 대령님이신걸요.”

“왜 왔어?”

“어떻게 살고 계신가 보려고 왔죠. 여기서 지내고 계실 거라고 얼마 전에 들었거든요. 드릴 것도 좀 있고……. 들어가도 돼요?”

슈타인호프는 곁눈질로 집안을 보았다. 뤼초가 식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지금 이 대화를 듣고 있으려나?

“지금은 좀 곤란한데. 밖에서 얘기하자.”

그는 문틈을 비집고 밖으로 나온 후 등 뒤에서 문을 닫았다. 이렇게까지 뤼초를 숨기려고 드는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뤼초가 어떤 단서를 얻어 진실에 다가갈지도 모를 가능성뿐이 아니었다. 어떤 공포가 가슴 속에서 도사렸다. 지금 이 일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원인도 모르는 마당에 더 많은 사람에게 뤼초를 노출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제삼자가 끼어드는 순간 이 부자연스럽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균형이 산산이 깨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게다가 그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인 크루핀스키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더더욱 둘을 만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근거 하나 없는, 오직 느낌일 뿐이었고, 어쩌면 제대로 된 직감보다는 그의 개인적 감정이요, 욕심일지도 몰랐지만 — 직감을 믿는 것이 곧 정답이었던 시절은 분명 존재했기에, 슈타인호프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스스로에게 합리화했다.

그런 생각을 알 턱이 없는 크루핀스키가 쫑알거렸다.

“왜 못 들어가게 해요? 설마 뭐 숨기는 거 있어요?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뭔데?”

“같은 병실에서 몇 주나 동고동락한 사이?”

“용건만 말하지?”

“뭐야, 대령님, 엄청 쌀쌀맞아지셨어요. 제가 이렇게 힘들게 왔는데. 그것도 퇴원하자마자!”

스물다섯 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 후배의 쾌활한 수다스러움이 거슬렸다. 어째서 이렇게 기분이 불편한지는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병원에 갇혀 지내는 동안에는 그렇게 위안이 될 수가 없었는데 말이다.

“너, 헛소리나 할 거면 가.”

“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그가 으름장을 놓자, 크루핀스키가 급하게 발밑을 향해 손짓했다. 슈타인호프는 그제야 그의 발치에 놓인 나무 상자와 그 위에 얹혀 있는 파일철을 보았다. 아주 평범한 나무 상자였지만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버푀링 군 병원에서 급하게 전역 및 퇴원 수속을 밟을 때 미처 들고 나오지 못했던 레밍턴 타자기였다. 지난여름, 크루핀스키와 함께 병원에서 탈주극 한 편을 찍으며 회수해 왔던 그 타자기였다.

“내 타자기 가져왔네.”

“네! 그리고 저건 그때 병원에서 같이 썼던 원고예요. 홀츠아머, 걔가 퇴원하면서 저한테 넘기고 갔거든요. 그동안 제가 시간 순서대로 다 정리해 뒀어요. 아, 혹시 허락도 없이 읽어 봐서 기분 안 좋으셨다면 죄송한데, 정말 엉망이었거든요. 없어진 페이지라도 있으면 어쩌지 싶어서 — ”

“그래, 고맙다.”

입을 좀 다물게 하려고 한 말이었지만, 그 감사 인사에 크루핀스키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가 슈타인호프가 상자를 집어 드는 것을 도와주었다. 꽤 무거웠다. 지난여름, 타자기를 받아 든 크루핀스키가 어째서 그렇게 비틀거렸는지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보다 더 야윈 것 같기도 했다. 항상 얼굴이 말랑말랑하다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그간 고생을 많이 했는지 좀 마른 것 같기도 했고 —

“고마우신 김에 집 구경 좀 시켜주시면 안 돼요? 이것도 같이 들어드릴 겸 해서요. 무겁잖아요.”

“응, 안돼.”

딱 잘라 말하자 크루핀스키의 표정이 조금 어색해졌다. 너무 단호하게 굴었나 싶어지던 찰나, 그가 머뭇거리는 듯싶더니 입을 열고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어요, 매키?”

“뭐?”

“아니, 사람이 너무 이상하게 구는 것 같아서요. 아무리 마지막으로 본 지가 거의 1년 다 됐다고 해도, 요즘 상황이 이러니 사람들이 좀 유별나게 구는 게 보통이라고는 해도…… 너무 제가 아는 대령님답지가 않아서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싶은 거 있죠. 혹시라도 제가 도울 게 — ”

“크루핀스키.”

슈타인호프는 그의 말을 끊었다. 늘 부르던 별명, 크루피, 푼스키, 백작, 따위가 아닌 이름으로 불린 크루핀스키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부탁인데, 그냥 가줘.”

아주 잠시, 크루핀스키의 어깨가 축 처졌다. 서운하다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알았어요.”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슈타인호프는 그것을 애써 외면했다.

“타자기 잘 아껴 주세요. 제가 그동안 열심히 관리해 뒀으니까요.”

“그래.”

“잘 지내세요, 대령님. 가끔 연락도 하시고요…….”

“그래, 가 봐라.”

크루핀스키는 정말로 가버렸다. 슈타인호프는 그가 풀 죽은 발걸음으로 약간 비틀거리며 흙길을 따라 걸어 멀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조금 성가시기는 해도 아끼는 축에 속하는 후배를 이렇게 문전박대하자니 기분이 전혀 좋지 않았다.

다시 현관을 열고 실내로 들어오니, 뤼초는 그가 밖으로 나섰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던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왜 안 데리고 들어오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바쁘대. 가볼 일이 있다고.”

불쑥 거짓말이 또 튀어나왔다. 뤼초는 그를 잠깐 빤히 쳐다보더니, 별로 설득당하지는 않은 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뭐야?”

그가 슈타인호프가 품에 안다시피 들고 있는 상자와 그 위에 쌓인 종이 뭉치를 보며 물었다.

“그때 얘기했던 그 타자기. 백작이랑 같이 가지러 나갔던 그거 있잖아.”

“종이는?”

“몰라.”

대답이 너무 빨리 나가 버렸다. 슈타인호프는 순간 이를 악물었다. 그는 거짓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말해 버렸다 사달이 났던 적이 몇 번이던가? 점점 진실을 숨기는 것이 버겁게 느껴졌다.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고 합리화해 보아도, 상대가 뤼초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프란츨은 무슨 이야기든 건넬 수 있는 친구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완전히 믿고, 필요한 순간에는 목숨마저 믿고 맡길 수 있는 이였다. 반대로 그는 슈타인호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어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으면 어땠을까? 넌 죽었다고, 종전을 이주일 남짓 남기고 죽었으며, 시체도 찾지 못하고 영영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이건 위층에 올려다 놓고 올게.”

“좀 무거워 보이는데, 안 도와줘도 돼?”

“혼자 해도 돼.”

일단은 원고부터 숨겨야 했다. 그는 급하게 뤼초의 제안을 쳐내듯 거절하고 품에 상자를 꼭 끌어안은 채 계단으로 향했다. 조급한 마음에 발끝이 층계 첫 턱에 걸렸다. 몸이 앞쪽으로 기우뚱했다. 손에 든 것이 많아서 난간이든 균형이든 잡을 여유도 없이 그대로 무릎이 층계참에 부딪쳤다. 품에서 미끄러진 상자가 떨어지며 와장창 소리를 냈고, 위에 얹어 놓았던 종이 몇 장이 파일에서 빠져나와 팔랑팔랑 도망치는 새처럼 흩어졌다.

“매키!”

부엌 쪽에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다급했다.

“너 괜찮아? 그러게 내가 도와준다니까!”

아픈 것보다도 쏟아진 종이가 먼저였다. 슈타인호프는 뤼초가 다가오는 소리에 급하게 종잇장을 그러모았다. 글자 면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고 쌓아 가리는 것이었다. 방금 떨어진 장들에 그 말 — 그 끔찍한 문장들이 있었을까? 심장이 별안간 목구멍으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억제할 수 없는 격앙된 감정이 나를 움켜쥐었다. 나는 그 소식의 의미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제 한 친구와의 몹시 가까운 관계가 끝나 버렸고, 그 슬픔은 나만의 몫이었다……. 간신히 원고를 수습한 그는 옆으로 미끄러져 떨어진 타자기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동안 다가온 뤼초가 그의 옆에 쭈그려 눈높이를 맞추었다.

“괜찮아?”

“응.”

슈타인호프는 그에게 건성으로 대답하며 자판과 캐리지를 만지작거려 보았다. 떨어뜨릴 때 무언가 깨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망가지지는 않은 듯했다.

“다행히 타자기도 멀쩡하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안 다쳤어? 세게 부딪힌 것 같은데…… 좀 봐도 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그의 손이 바짓단으로 살며시 향했다. 쾅 소리가 날 만큼 세게 찧은 무릎이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슈타인호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무슨 도자기라도 되는 줄 알아? 나도 군인이었어.”

“그래도.”

“기껏해야 멍이겠지.”

뤼초는 여전히 풀이 죽은 듯한 표정이었다. 슈타인호프는 그의 얼굴을 살피다 덧붙여 보았다.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레짝인데 멍 좀 더 드는 게 큰일은 아니잖아.”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농담이라고 던진 말이었는데, 뤼초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지기만 했다. 음, 망했군, 싶어진 그 멋쩍게 말했다.

“그냥 농담이었는데…….”

“너 지금 그런 소리를 농담이라고 하는 거야? 하나도 안 웃기단 말이야.”

뤼초의 손이 그의 잠옷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갓 올라온 자줏빛 멍이 무릎뼈 주변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 가장자리를 조심스레 문질렀다.

“피는 안 나네, 다행이다.”

눈이 마주쳤다. 진심 어린 걱정과 애정이 듬뿍 담긴 회갈색 눈이 자리한 얼굴은 여느 때처럼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어쩐지 불안해 보였다.

그 순간 수없이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뤼초는 죽음을 불사하는 종류의 군인은 아니었다. 비행이 아니면 살아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조종사 역시 아니었다. 하늘에서 젊음을 불태우고 자신의 생명을 장작 삼아 피워낸 불꽃과 함께 사라지는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겐 아내가 있고, 아이 둘이 있고, 수많은 동료와 친구가 있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을 사랑했고, 동시에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으며, 생에 소중한 것이 너무도 많은 그에게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해 주어야 하겠는가?

“……프란츨.”

어쩌면 그저 프란츨이 걱정되어서뿐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뤼초가 지을 표정을 생각하고 싶지 않고, 마주하고 싶지도 않은 슈타인호프 자신의 욕심과 나약함일지도 몰랐다.

“매키.”

뤼초가 대답하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타자기 상자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린 슈타인호프는 고개를 숙여 두 사람 사이 거리를 좁혔다. 뤼초도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기울였다. 먼지 냄새, 오래된 나무 냄새 따위가 뒤섞인 가운데서 두 사람의 입술이 아주 조심스럽게 맞닿았다.

10년 전 전투기 조종 훈련을 받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입맞춤이었다. 소위 계급장을 단 두 청년은 만취한 부대 동료들로 난장판이 된 술자리에서 가로등 몇 개가 드문드문 밝힌 거리로 나섰다. 노르스름한 빛 아래에서 취기인지 부끄러움인지 구분되지 않은 홍조를 얼굴에 띄우고, 어설프게 감정을 고백한 후 상대가 자신을 버려두고 도망치지만 말기를 기도하며 주먹을 꾹 쥐고 잔뜩 긴장한 스물다섯 살짜리와 너무 취한 나머지 청각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좀 깨 보려고 얼굴을 문지르는 스물네 살짜리가 처음 나눠 본 키스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상대의 의중을 재어 보듯 천천히, 수줍게 입술만 마주 대었다 떨어지고, 시선을 한 번 교환하자마자 다시, 이번에는 보다 격렬하게 맞붙는 입맞춤. 뤼초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그를 뒤로 밀어 눕혔다. 잠옷 상의를 여민 단추를 풀고 옷을 벗기기 시작하는 손길이 다소 거칠었다.

에라, 모르겠다. 슈타인호프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6

 

안대를 걷어내자 시야가 밝았다. 커튼이 걷혀 있었다. 창밖에서 흰 아침 햇살이 들어와 방을 밝혔다. 텅 빈 옆자리가 차게 식어 있었다. 어제는 잠에서 깨자마자 느낀 것이 내게 꼭 매달린 뤼초의 온기였었는데, 그게 참 좋았는데, 같은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킨 그는 불러 보았다.

“프란츨?”

“나 아래층에 있어.”

대답은 바로 돌아왔으나 목소리가 별로 밝지 않았다. 기껏해야 또 식사 준비를 해 두려고 먼저 내려갔나 싶었는데 말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에 휩싸인 슈타인호프는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뤼초가 보였다. 그가 식탁 앞에 서 있었다. 상판에는 노란빛 도는 종이 뭉치가 잔뜩 늘어져 있었다. 슈타인호프는 그게 무엇인지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가 병원에서 갇혀 지내는 무료한 시간 동안 쓴 글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불러 주고, 홀츠아머가 타자기로 받아 적었던 글. 홀츠아머가 퇴원한 후 크루핀스키가 보관하고 있다 어제 타자기와 함께 들고 온 그것이었다.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입에서는 변명부터 나왔다.

“프란츨, 이건, 그러니까…….”

“네가 쓴 거지?”

“그러니까……”

“네가 쓴 거겠지. 네 문체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니까.”

“…….”

다 봤고, 다 알았군. 더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오히려 머리는 차가워졌지만, 가슴은 그 반대였다. 심장이 가슴뼈 안을 쿵쿵 울렸다.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무슨 말을 더 할 수가 있지? 다행이라면 다행이랄지, 그가 먼저 말을 할 필요가 없게 뤼초가 천천히, 차분하게, 아주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왜 말 안 했어? 아니, 왜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포로로 잡혀가서 아직까지 수용소에서 못 나오고 있다고? 연락도 안 닿는다고? 내가 둘이 돼서 돌아다니면 다들 모두 당황하고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집안에만 있어라?”

“프란츨, 들어 봐.”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슈타인호프는 해명을 해보려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이 원고는 다 뭐야? 응? 대답해, 매키.”

그리 말하는 뤼초의 얼굴이 아주 창백했다. 그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차분했지만, 슈타인호프는 그것이 뤼초가 가장 분노했을 때 내는 목소리임을 알았다. 조용하고 차가운 분노, 그리고 그 속에 얽힌 짙은 실망감이 읽혔다. 뤼초가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사실보다 제게 실망했다는 사실이 더욱 괴로웠다.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야, 그거, 사실도 아니야, 병원에 있을 때 심심해서 뭐라도 써볼까 하고 — ”

“그거 아니잖아.”

뤼초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지막하고 차분했다.

“난 널 잘 알아, 너 지금 사실대로 말하고 있지 않잖아. 대체 왜 그러는데, 날 못 믿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걸 함께해 왔는데, 내가 그 정도 신뢰도 네게 못 줄 사람이라는 거야?”

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이 잠깐 멈추어 숨을 들이켰다가 내쉰 그가 덧붙였다.

“아니면 네가 변한 거야? 그 1년 사이에?”

무슨 스위치를 누르는 것 같은 발언이었다. 심장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확 치밀어 올랐다. 분노인지, 억울함인지, 두려움인지, 무슨 감정인지 단번에 알기는 어려웠고, 그것을 정의하고 앉아 있을 여유도 없었다. 차분히 고르던 호흡도, 단어도 더는 없었다. 파도가 밀려 들어오듯 말이 앞질러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변했다고? 그래, 그랬을지도 모르지. 이 꼴이 됐는데 사람이 한결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프란츨?”

뤼초가 흠칫했다. 그 상처를 입은 듯한 반응을 보자 이상하게도 순간 쾌감 비슷한 것과 아픔이 뒤섞인 무언가가 가슴 속을 스쳤다.

“너야 1945년 4월을 첫 주밖에 살아보지 못하지 않았어? 응? 그런데 네가, 내가 살아야 했던 지난 1년의 무게를 알 수나 있을 것 같아? 그런 주제에 변했다는 얘길 입에 올리는 거야?”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언쟁을 벌일 때 먼저 흥분하는 쪽이 지는 법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데 자꾸 목소리가 떨리고, 되는 대로 말이 내뱉어지고, 단어가 정돈되지 못한 채 앞질러 튀어왔다. 애초에 이런 이야기는 그들이 나누어야 하는 생산적인 논의와는 전혀 무관했지만, 끓어오르는 감정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뤼초가 무어라 말하려는 듯이 입을 벙긋거렸다. 사과를 하려는 걸까? 뤼초라면 그럴 만도 했다. 그는 항상, 슈타인호프가 앞에서 화를 잔뜩 내고 있으면 일단 사과부터 해댔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 싶지가 않았다. 가뜩이나 울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흐를 것 같은 눈물을 꾹 참느라 목소리가 떨렸다. 저 입에서 튀어나오는 미안하다는 말, 방금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순순한 사과가 튀어나오면 눈물도 같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는 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꽉 쥐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넌 몰라, 그 1년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약에 취해서 정신도 못 차리고 있을 때 들은 소식이 네가 실종됐다는 얘기였어. 개고생하면서 계속 수술받고 여기저기로 옮겨지는 내내 점점 들려오는 얘긴 네가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시신도 못 찾고 있다는 얘기뿐이었다고. 아니, 그마저도 다들 날 찾아와서, 아니면 편지로 연락을 해서 네 얘기만큼은 끝내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더라. 갈란트도 그랬고, 트라우트로프트도 그랬고, 크루핀스키도 그랬고…… 다들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집요하게 캐묻고 나서야 그 얘길 다 들을 수 있었다고. 교전이 벌어졌었고, 갑자기 통신이 끊어졌고, 멀쩡히 잘 날던 네 전투기가 갑자기 선회해 방향을 바꾸더니 급강하해서 땅에 처박혀 폭발했다고. 그렇게 네가 영영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호하겐 소령이 지휘 본부에서 항공기의 행방을 추적했습니다. 항공기가 적과 교전하기 전까지 지도상에서 완벽히 제대로 비행하다가, 갑자기 서쪽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합니다. 그 후 울름 남쪽, 메밍겐 근처에서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습니다. 당시 해당 지역은 이미 적군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기에 수색이 불가능했습니다. 영국, 미국, 프랑스 측에 항공기의 행방에 대해 물었으나 성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프란츨이 아직까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해야겠습니다. 그의 마지막 비행 당시 있었던 일은 아마 불분명하게 남을 듯싶습니다……. 석 달 전 뤼초의 아내에게 편지했듯 불분명했기에 희망을 조금이나마 품어 보려고 애썼지만 결국엔 현실로 돌아와야 했던 나날들을 떠올리며, 슈타인호프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널 잊어 보려고 애썼다? 하루에 한 번씩만 생각하자고, 그 다음엔 사흘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그러다 나중엔 네 이름을 아예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지. 그러다 보니 되더라, 그게. 그래서 이제 다 됐나 했어.”

고개를 들자 뤼초의 얼굴이 보였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네가 나타났잖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베로나에서 출발했다느니, 림으로 가야 한다느니,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느니. 거기서 내가 뭘 어떻게 말했어야 하는데? 넌 여기 속하지 않아, 넌 이미 죽었어, 라고 말해? 어떻게 그래? 네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그 따위로 듣고 싶을 것 같아?”

뤼초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그가 머뭇거리듯 끼어들었다.

“난…… 네가 말해줬어도 괜찮았을지도 몰라. 어쨌든 그게 진실이잖아, 매키. 난 진실을 듣고 싶었을 뿐이야.”

“그 망할 진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아냐고. 네가 죽었다는 그 모든 이야기도 진실이었어. 그런데 봐! 1년 동안 네가 없었어. 네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말이 안 되는 거 있지. 늘 하던 식사를 해도, 어디선가 익숙한 비행기 엔진 소리가 들려도, 라디오에서 아는 옛날 노래가 나와도, 네가 없으니까 다 이상하기만 했다고. 프란츨이었으면 여기서 이렇게 했을 텐데, 같은 생각만 들었어. 그게 1년이야. 그 1년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길었어. 몇 달쯤 떨어져 지내다 다시 만나는 게 익숙하던 옛날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을 할수록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화가 났다. 머리로는 뤼초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모든 일에 그의 잘못만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말이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왔다. 그간 꾹꾹 눌러 담고 죽이려고 애썼던, 그리고 끝내는 죽었다고 착각했던 감정이 들끓듯 목구멍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내가 얼마나 매일을 후회했는지 알아? 당연히 모르겠지, 넌 죽어버렸으니까! 나를, 우리 모두를 여기 남겨놓고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시신 수습도 못 하게 사라져 버렸으니까. 널 괜히 그 부대에 끌어들였나 싶어서, 그 무의미한 짓에 널 괜히 데려왔나 싶어서, 네게 괜히 그 망할 슈발베를 조종하는 법을 가르쳐줬나 싶어서, 네가 매일 우울해하면서 땅이나 파고 있는 꼴을 보다 속상해져서 이렇게라도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어서 교전 임무에 한번 나서 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걸 후회한다고. 매일같이.”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뤼초의 숨소리가 빠르고 얕았다. 그 숨 사이로 흐끅, 하는 소리가 섞였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젠장, 왜 이렇게 화를 냈지, 달라졌다는 말 한 마디에 자극당해서…… 이렇게까지 감정을 모조리 쏟아낼 생각은 없었는데.

“난 그냥, 그냥…… 네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어.”

그는 서둘러 덧붙였다. 눈물에 젖은 뤼초의 얼굴을 보건대, 진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다지 훌륭한 설득력을 띠는 말은 아니었다.

“다 알겠어. 알겠다고.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알게 되는 것보단 나았을 거 아냐. 네게 직접 전해 듣는 게.”

다시 얼마간 이어진 침묵 끝에 뤼초가 마침내 말했다. 목소리에 물기가 잔뜩 어려 있었다.

“그렇게까지 숨길 필요가 있었어? 다른 친구들한테도 전부 숨기고, 날 여기 숨겨 놓고…… 다 같이 고민해 볼 수도 있는 일이었잖아. 혼자 감당하려고 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잖아. 대체 언제까지 숨기고 지낼 생각이었던 거야? 영원히 말 안 하면 내가 끝까지 모를 줄 알았어?”

“네가 언젠간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말이 입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슈타인호프는 스스로도 놀랐다. 우는 뤼초를 보고 마음이 흔들린 탓이었을까?

“넌 여기 속하는 사람이 아니야. 이건 부자연스럽고, 비현실적인 일이잖아. 넌 이미 죽었다고. 실종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사실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네게 마음도 주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돌아다니다 사고만 치지 않게 데리고 지내기만 할 생각이었단 말이야.”

가슴 속에 숨겨 두었던 말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멈출 수가 없었다. 뤼초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입을 벌렸지만 들어 주기 위해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난 그냥, 네가 다시 내 곁에 있으니까 너무 좋았단 말이야. 꿈 같고 행복하기만 했어. 널 다시는 잃고 싶지 않고, 이게 무슨 기적이든, 아니면 그냥 내 망상이어도 상관 없으니까 네가 다시는 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고. 나도 모르겠어, 이제. 처음엔 멀쩡히 살아있는 네게, 네가 종전을 코앞에 두고 죽었다는 소리를 해서 상처든 충격이든 주기 싫었던 것 같은데, 좀 더 지나고 나니까 네게 진실을 말해주면 갑자기 아, 잘못 왔구나, 하고 돌아갈까봐……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다른 사람이 여기 끼어드는 순간 이 모든 환상이 깨질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겠어, 정말.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그는 상처받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크루핀스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배신감을 느낄 사람은 적잖았다. 아돌프 갈란트, 하네스 트라우트로프트, 에두아르트 노이만. 슈타인호프와는 다른 방식일지 몰라도, 그만큼이나 뤼초를 사랑했고, 아마 여전히 사랑할 수많은 동료들. 하지만 그럼에도, 욕심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네가 가버리면 난 그 끔찍했던 1년을 다시 살아야 한다고. 이번엔 더 길지도 몰라. 그게 싫었어. 네가 지금 딱 모습으로, 지금 말투로, 내 곁에 있는 게…… 그게 너무 좋았는데, 그걸 내가 직접 깨버리고 만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감정에 휩쓸린 채로 말을 잔뜩 했더니 급격한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어야 할 지경이었다. 목이 바짝 말라 목울대를 몇 번이나 울려야 했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니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묻어났다.

그는 뤼초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얼굴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말한 것 같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들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굴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조금 더 차분하게 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좀 더 성숙하게, 어른스럽게……. 내지른 말을 주워 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슈타인호프는 그에게 한 걸음을 다가가며 말했다.

“프란츨 — ”

“아니, 매키, 잠깐.”

뤼초가 그의 말을 홱 끊으며 뒷걸음질 쳤다.

“나 생각 좀 하게 해줘.”

그가 현관으로 걸어갔다. 닳은 손잡이가 돌아가며 짧게 딸깍, 소리를 냈다. 현관문이 열리자 서늘한 바깥 공기가 실내로 들이쳤다.

“너 어디 가?”

당황한 슈타인호프는 그를 붙잡으려 손을 앞으로 뻗었다.

“프란츨!”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밖으로 나서던 뤼초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에 남은 물기가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어디 안 가. 그냥 여기 바로 앞에, 뒷마당에 있을게. 정말로. ……그냥 잠깐 혼자 있고 싶어.”

문이 닫혔다. 슈타인호프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다 자신이 주먹을 꾹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 주고받은 말의 열기만이 손바닥에 남은 손톱자국만큼이나 실내에 선명하게 잔류했다.

멍하니 서 있다가 주저앉았다, 다시 집안에서 서성거리기를 얼마나 반복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창가로 향해 낡은 커튼을 살며시 들추어 보았다. 뤼초는 정말 뒷마당에 서 있었다. 담배를 물고 있었다. 벌써 몇 개비째인지, 바닥에는 다 탄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숨을 깊이 빨아들였다 허공으로 연기를 내뿜는 모습을 얼마간 훔쳐보던 슈타인호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창문을 손마디로 콩콩 두드렸다. 뤼초가 반쯤 탄 담배를 입에서 빼고 그를 돌아보았다.

“나가도 돼?”

슈타인호프는 물었다. 창문 너머로 소리가 전달될 리는 없었지만, 뤼초는 그의 입 모양을 제대로 읽었는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침착했지만 눈가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는 정원이라고 불러 주기도 민망한 뒷마당으로 나왔다. 이틀 전, 뤼초가 나중에 손질을 좀 하면 좋겠다고 한 마디 하던 것이 떠올랐다. 슈타인호프를 발견한 뤼초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필래?”

“응.”

뚜껑을 열자 안에는 딱 한 개비가 남아 있었다.

“마지막이네.”

그렇게 말하며 건네는 담배를 받아들고 입에 물자, 뤼초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제 입에 문 담배로 불을 붙여 주었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전후에 담배는 몹시 귀했으니 말이다.

담배를 빨며 집 외벽에 몸을 기대자 뤼초가 그 동작을 따라 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나란히 서서 조용히 담배를 피우기만 했다. 입에 문 연초가 다 타버리자 뤼초가 그것을 땅에 떨어뜨리고는 군화 뒤꿈치로 밟아 껐다. 슈타인호프는 제가 피던, 아직 절반쯤 남은 것을 그에게 건넸다. 천천히 한 모금을 빤 뤼초가 그에게 연초를 돌려주며 말했다.

“아까는 화내서 미안해.”

“내가 할 말이지, 그건…….”

“화낼 만도 했어. 네가 쓴 걸 함부로 허락도 안 받고 읽었잖아. 나 같아도 기분 나빴을 거야.”

“…….”

“그런데 네가 뭘 숨기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아는데, 뭘 숨기고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게 너무 답답해서, 혼란스러워서, 그만…… 미안해, 정말로. 내가 뭘 어째야 할지를 전혀 모르겠었어.”

프란츨은 자꾸 사과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그러곤 했다. 줏대가 없는 성격도 아니고, 정말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무릅쓰고 제 할 말을 할 줄도 알았지만, 가까운 사람들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이상하리만큼 한없이 숙이고 들어가는 면이 있었다. 비록 그런 면이 적잖게 사랑스럽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저렇게 구는 모습은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그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알 수가 없었다. 이해한다고? 당연히 이해할 수 없었다. 뤼초가 느끼고 있을 충격, 혼란, 혹은 배신감을 감히 그가 어떻게 이해하겠나? 그래서 슈타인호프는 입을 다물고 있기를 택했다. 정적은 불편했지만, 적절하지 못한 말을 내뱉기를 선택했다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 분명했다.

“……나 죽기 싫어, 매키.“

한참의 정적 끝에, 마침내 뤼초가 말했다.

“죽음이 두려워. 이미 내가 죽었다는 사실도…….”

말꼬리를 흐리며 다시 조용해지는 그에게, 슈타인호프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게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프란츨. 비록 우리 조종사들이야 항상 언제든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감수하고 살아왔지만.”

“아니, 죽는 그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야. 아주 안 무섭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럼?”

“남겨진 사람들이…….”

다시 연초를 건네 받은 뤼초가 연기를 한 번 빨아들였다 한숨처럼 뱉어냈다.

“어쩌다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항상 했어. 그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그 이후엔 어떻게 될지를 깊이 생각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특히 남겨질 사람들 생각은 최대한 안 해 보려고 했지. 그래도 다들 자기 삶이 있으니까, 다들 인생에 나 말고도 사랑하는 것이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니까, 조금 슬퍼하다가도 잘 살아갈 거라고 어렴풋하게 믿고 말았단 말이야.”

다시 슈타인호프에게 넘어온 담배는 거의 끝까지 타 있었다. 말없이 그것을 받아든 그는 끝에 매달린 담뱃재를 톡톡, 땅으로 털어냈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나 때문에 힘들었다고, 죽을 듯이 괴로웠다고.”

“프란츨,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내게 책임이 있기도 한걸. 넌 심지어 완전히 혼자잖아. 아내, 아이들, 부모님, 다 못 만나고 있다며. 내가 포로수용소에 있다는 건 네 거짓말이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다 갇혀 있다는 건 사실이란 걸 알겠어. 넌 부상이 심해서 정식으로 끌려가 심문당하는 건 면했다는 것도. 널 이대로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 ……그래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그럼 여기 남아.”

불쑥 튀어나온 발언은 다소 유치했다. 그는 그것이 누군가의 의지대로 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원인도, 사유도,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이 미지뿐인 상황은 공중전을 벌일 때 다음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는 것과 몹시도 유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담겨 있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있을까? 내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어떡해? 다시 1945년으로 돌아가버리면, 여기 혼자 남겨져 버린 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슈타인호프는 다 타버린 담배를 버리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나도 그게 무서웠어. 사실 아직도 무섭지만…… 요 며칠간은 아무 일도 없었잖아. 어쩌면 앞으로도 아무 일 없을지 몰라.”

“확신할 수는 없잖아. 정말 네 말대로, 누군가 뭐라도 잘못 건드리는 순간 모든 게 무너져버리면 어떡해? 그게 만약 내 잘못이라면, 난……”

“프란츨, 그만.”

슈타인호프 자신도 별로 확신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그의 바람일 뿐이었다. 뤼초가 여기 영원히 남아 주면 좋겠다는 바람, 상공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 없이 이곳으로 아주 넘어와 오래도록 자신과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고작 희망사항이 말 좀 한다고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6년의 전쟁이 사무치게 가르쳐 주었지만, 뤼초가 저런 소리를 하며 주눅 드는 모습은 더욱 보기가 싫었다. 이 모든 일에 그의 잘못은 단 한 조각도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바람을 내뱉어 보았다.

“네가 여기 온 건 어쩌면…… 내게 널 돌려준 게 아닐까?”

“대체 누가?”

“그건 모르지, 하느님이라든가…… 기적 같은 거지.”

“하지만 전혀 설명되지 않잖아. 논리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공학자들도 비행기가 정확히 무슨 원리로 떠다니는지도 모른다잖아. 그냥 되니까 하는 거지. 그리고 설명되면 그게 기적이겠어? 과학이지.”

“넌 기적을 믿어?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응, 그럴지도 모르지.”

침묵이 흘렀다. 벽에 기댄 채 나란히 서서 같은 방향을 향해 허공을 바라보던 슈타인호프는 뤼초의 옆얼굴을 흘끔거렸다. 정말 알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투성이였다.

“넌 나를 잃게 될 거야. 제대로 기억은 안 나지만…… 난 분명히 그 현장에서 날 지켜봤고, 내 곁을 지켰고, 내가 병원으로 가는 모습까지 보고, 그게 마지막이었어. 그리고 넌 사라졌지. 그렇게 나도 널 잃게 되었고.”

뤼초는 여전히 그를 마주보는 대신 앞만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우린, 지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서로를 되찾은 거란 말이야”

그 말에 그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서 슈타인호프를 바라보았다. 회갈색 눈에 물기가 잔뜩 어려 있었다.

“그러니까 이러고만 있지만 말자. 깊이 생각하지 말고, 그냥 기회라고 생각하자고. 뵐케가 그랬잖아, 응? 기회가 오면 끝장을 보라고. 이렇게 싸우거나,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면서 시간을 버리지 말자는 거지.”

“이건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니잖아.”

“하지만 이것보다 즐거운 일은 얼마든 많은걸. 그냥 우리가 제일 잘 하던 짓을 계속 하면 돼. 다 잊고, 눈앞에 닥친 일만 바라보는 거. 설령 그게 잘못되었을지라도, 옳지 못하더라도……. 넌 나랑 하고 싶었던 거 없어? 전쟁이 끝나면, 이라든가. 아니면 언젠간 같이 하고 싶었지만 현실이 허락하지 않았던 거라든가.”

“구체적으로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망설이듯 말했다.

“그래도 스페인은 같이 한번 가보고 싶었어. 너 그때 못 갔다고 엄청 속상해했잖아.”

“스페인? 스페인 좋지. 거기도 지금은 못 가겠지만.”

“왜? 스페인은 그래도 우리한테 꽤 우호적이었잖아.”

“그건 맞는데, 아무래도 당장은 어려울걸. 여권 문제도 있고, 출국 자체도 거의 불가능하고. 그리고 기차 타고 프랑스를 통과해야 하는데 쉽지 않을걸. 머리 깨진 백작을 생각해 봐. 걔들은 우리를 정말 싫어한다고.”

현실을 줄줄이 읊다 보니 조금 비참해지는 바람에, 슈타인호프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가고 싶지만.”

적당히 얼버무리듯 말을 맺자 뤼초가 물었다.

“비행기 하나 구해서 갈 수는 없어? 기차가 안 되면 하늘로라도 가면 되지 않나.”

“독일 민간 비행도 싹 금지당했는걸…….”

그리 말하고 나니 비참함이 두 배가 되었다. 그 말을 들은 뤼초도 약간 풀이 죽은 듯했다. 슈타인호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못 할 일이 이렇게 많다니. 다시 허공을 쳐다보며 담배만 뻑뻑 빠는 뤼초를 곁눈질한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다 무언가를 떠올렸다. 허리를 바짝 세우며 벽에 기댔던 상체를 홱 일으키니 뤼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괜찮은 생각이 났어.”

“뭔데?”

“같이 나갈래?”

 

 

7

 

4월 바이에른의 날씨는 화창한 봄날과는 거리가 멀었다. 낮게 드리운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했고, 해가 들지를 않으니 대기는 여전히 습하고 싸늘했다. 얇은 빗방울이 흩날리다 말기를 변덕스럽게 반복했다. 하지만 대로변에 늘어선 가로수의 나뭇잎과 길가의 들풀은 푸른빛 생기를 조금이나마 되찾은 후였다.

전차를 타고 시내로 나온 두 사람은 거리를 걸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던 마을은 여전히 황량했지만, 지난 1년간 조금이나마 생기를 되찾았다. 제각기 할 일을 하는 거리의 사람들, 복구된 몇몇 건물과 여전히 드문드문 쌓여 있는 부서진 잔해들, 얼마 없는 물건을 쌓아 둔 진열대와 간간이 보이는 꽃집들.

한참을 걷다 꼬르륵 소리가 들리자 아침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뭔가를 먹자고 눈에 가장 먼저 띄는 식당으로 들어선 그들은 적당한 요리와 맥주 두 잔을 주문했다. 고급 레스토랑도, 값비싼 술집도 아니었지만 배가 차고 술이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졌다.

식사를 절반쯤 마쳤을 때 흩날리던 빗방울이 제대로 비가 되어 내리기 시작함. 잠시 쏟아지다 다시 멈추려나 싶었는데 멎기는커녕 점점 거세지기만 했다. 계산까지 마치고 나온 후 전차를 타고 좀 가서 내리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은 당연히 없었고, 빌려줄 사람도 없었다. 트라우트로프트의 말마따나 호의라는 것을 찾아보기 드문 시대였다. 수차례 선전에 동원된 전쟁 영웅들의 얼굴을 알아보고 당장 도움을 주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민간인들이 넘쳐나던 시절은 가버린 지가 오래였다.

“어떡하지?”

뤼초가 그에게 물었다. 잠시 그와 시선을 교환한 슈타인호프는 되물었다.

“여기서 집까지 얼마나 걸리지?”

“음…… 아깐 걸어서 10분 정도 걸렸는데.”

“그럼 뛰자.”

“어?”

얼빠진 소리를 내는 뤼초에게 대답해 주는 대신, 슈타인호프는 모자를 손으로 푹 눌러쓰고 안경이 벗겨지지 않도록 다른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고는 쏟아지는 비를 막아주는 정거장 지붕 밖으로 걸음을 내딛고 뛰기 시작했다.

“야, 같이 가!”

뤼초가 허둥지둥 코트를 벗어 머리를 덮고 비를 최대한 막아 보려고 하며 그를 뒤따라 달려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그새 도로에 고인 빗물이 찰박찰박 튀었다. 구두 안으로 물이 다 튀어 양말까지 흠뻑 젖어들었다.

쫄딱 젖은 채로 겨우 집에 도착해 현관을 열고 실내로 들어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발밑의 매트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이었지? 슈타인호프는 생각했다. 씁쓸한 미소, 장단에 맞추기 위한 억지웃음과는 전혀 다른 웃음을 마지막으로 지었던 것이 지난 생의 일이라도 되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꼴이 엉망일 게 분명했다. 눈앞에 보이는 뤼초의 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다 젖은 앞머리가 흘러내려 이마에 가닥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별 이유도 없이 웃었다. 마치 별안간 시간을 되돌려 20대 초반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들 모두가 너무도 어리고 순진하던 시절, 철도 덜 들어서 무모한 짓도 종종 하곤 하던 시절로. 얼간이 같은 짓을 저질렀다 징계를 먹은 다음 선배에게 한 번만 봐달라며 싹싹 빌고, 외출 금지 처분을 받아도 감시하는 눈이 없을 때면 몰래 도망쳐 나와 술을 퍼마시던 그 시절로.

10년 전의 루프트바페는 그랬다. 분명 군대였지만, 새로 창설된 군종이니만큼 사람을 옭아매는 규율이 적었다. 선배이자 상관인 이들은 후배들에게 무척이나 관대했다. 슈타인호프는 더 이상 등록금이며 생활비 문제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대신 하늘을 날 수 있었다. 폐부를 채우는 상쾌한 공기, 비행용 헬멧이 덮지 않은 피부를 가볍게 스치는 바람결,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빠르게 발밑을 지나쳐 가는 땅 — 그런 것들을 보며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 모두가 그랬다. 그들은 어렸고, 아직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질 필요도 없었다. 그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젊음의 축복을 양껏 만끽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얼마나 웃어댔을까, 숨이 차기 시작한 슈타인호프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힘껏 내달린 지가 벌써 1년이었다. 그는 코트를 벗어 바닥에 팽개쳐 놓은 뒤 허리를 숙이고 벽을 손으로 짚은 채 숨을 고르려고 애썼다. 얼굴에 뒤범벅이 된 빗물을 닦아 보려고 애썼으나 소매도 마찬가지로 푹 젖어 있는 바람에 별 소득 없이 손을 내린 뤼초가 다시 웃기 시작했다.

“너 운동 좀 다시 해야겠다, 매키.”

슈타인호프는 그를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시끄러워, 프란츨.”

그래도 뤼초가 키득거리길 멈추지 않자, 그는 냉큼 그의 입을 키스로 막아버렸다.

열렬하고 뜨거운 키스는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입술로 상대의 입술을 막는 장난스러운 입맞춤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뤼초의 입을 틀어막는 데에 성공한 슈타인호프는 고개를 뒤로 물리며 슬쩍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뤼초의 회갈색 눈동자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뤼초가 입은 셔츠는 다 젖어서 속이 고스란하게 비치고 있었다. 더는 전투기에 올라가 교전하지 않고, 기껏해야 전선 비행장들을 찾아올 때에나 조종간을 잡는 사무직을 몇 년이나 맡았음에도 꾸준히 몸을 군인답게 관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듯 두껍고 탄탄하게 짜인 몸이 눈에 들어왔다. 슈타인호프는 아마 자신도 비슷한 모양일 것이라고, 뤼초도 비슷한 광경을 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아주 짧은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맞붙었다.

코가 부딪히는 서슬에 안경이 달그락거렸다. 입술을 정성껏 탐닉하던 혀가 이내 입술 사이로 벌어진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 내부를 탐색하듯 더듬기 시작했다. 치열을 따라 훑듯이 움직이다 입천장까지 간지럽히듯 움직이는 축축한 살덩이의 온도가 말도 안 될 만큼 뜨겁게 느껴졌다. 그를 쿵 소리가 나게 문에 밀어붙인 뤼초가 그의 다리 사이에 제 다리를 끼웠다. 슈타인호프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들썩거리며 그 단단한 허벅지에 성기를 문질렀다. 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코트와 군복 상의를 벗어 던진 뤼초가 그의 뺨을 어루만지다 귓불을 지분거리는 동안 슈타인호프는 그가 여전히 걸치고 있는 젖은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별것도 하지 않았는데 열에 들뜬 손이 덜덜 떨렸다.

뤼초가 잠깐 숨을 고르려는 건지, 혹은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고개를 뒤로 빼려고 했다. 슈타인호프는 그의 뒤통수를 힘주어 붙잡고 멀어진 거리만큼을 재빨리 따라붙어 다시 입을 맞추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물기 어린 소리가 두 사람의 겹쳐진 입술 사이에서 열띤 신음과 뒤섞여 사방으로 튀었다. 간신히 뤼초의 셔츠 단추를 모두 풀고 젖어서 피부에 들러붙은 천을 양옆으로 젖히며 벗겨냈다. 뤼초도 그의 행동을 따라 했다. 옷 단추를 푸는 그의 손길 역시 평소처럼 차분하기보다는 들떠 있고 다급했다.

입맞춤은 마침내 두 사람 모두 상체에 걸친 젖은 옷가지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질 때까지도 이어졌다. 발기한 채 바지 안에 갇혀 있는 뤼초의 것이 허벅지 위쪽에 닿았다. 그의 허벅지에 성기를 비비듯 문지를 때마다 묵직하고 뜨거운 그의 것이 같이 느껴졌다. 간신히 입술을 떼어낸 뤼초가 헐떡거리며 말했다.

“방으로 가자.”

슈타인호프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이미 바지 앞섶을 불룩하게 부풀리고 있는 뤼초의 성기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아니, 여기서 해.”

뤼초가 끄응, 신음하고 다시 달려들듯 입술을 붙여 왔다. 좀 전에 밀쳐지는 바람에 문에 부딪힌 등이 욱신거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뤼초가 허벅지 사이에 끼운 다리를 뒤로 물리자 슈타인호프는 벨트를 풀고 허겁지겁 바지와 속옷을 함께 끌어 내렸다. 셔츠와 마찬가지로 다 젖어 있는 바람에 살에 달라붙어 쉽지가 않았다. 구두를 어찌저찌 걷어차듯 벗어내고 바지까지 다 벗으니 벨트를 풀고 바지 앞섶만 겨우 풀어 헤쳐 성기를 꺼낸 뤼초가 그를 다시 벽으로 밀어붙이고 여전히 빗물이 뚝뚝 흐르는 몸을 붙였다. 그의 손이 여기저기를 문지르고 만지고 움켜쥐다 슈타인호프의 엉덩이로 향했다. 구멍을 더듬어 찾고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삽입하는 속도가 너무 느려 조바심이 났다.

“손 당장 치워, 프란츨.”

“기다려, 그래도 풀어야 — ”

“됐어, 그냥 해!”

분명 그저께도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뤼초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그땐 많아야 주에 한두 번, 가끔은 한두 달 간격으로 만나 몸을 섞지 않았던가?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살다 눈만 마주치면 일단 붙어먹고 보는 지금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너 진짜, 자꾸 답답하게 굴래?”

“미안…….”

다행히 곧바로 입구에 뜨거운 살덩어리가 문질러지더니 별안간 속으로 파고들었다. 평소처럼 넣겠다는 말도 없었고, 여느 때처럼 조심스러운 삽입도 없었다. 슈타인호프는 굵은 성기가 단번에 끝까지 뱃속에 처박히는 압박감에 신음했다. 그 부피감에 적응할 새도 없이, 뤼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앞이 번쩍거리고,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대로 절정하지 않은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슈타인호프는 한 다리를 뤼초의 다리에 감고 숨을 헐떡거렸다.

“흑, 프란츨, 아, 으 — ”

앓는 소리를 내자 뤼초가 움찔하더니 움직이기를 멈추고 황급히 물었다.

“아파?”

준비도 없이 바로 끝까지 들어온 두꺼운 성기가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통증이 못 견딜 만큼 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속을 조금 버거울 정도로 가득 채우는 감각이 좋았다. 느끼는 곳을 언제나처럼 빈틈없이 압박해 오는 것이 좋았다.

“아니, 좋아, 계속, 으응, 해줘.”

일부러 뤼초의 귓가에 대고 신음을 흘려 주니 그도 낮게 목을 긁듯 으르렁거리며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치솟았다. 짜릿한 감각이 허리가 덜덜 떨릴 만큼 기분 좋았다. 박힐 때마다 이미 완전히 발기한 앞에서 물이 줄줄 흘렀다. 뤼초도 이번만큼은 그다지 절제든 뭐든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섹스를 할 때조차 신중함이 묻어나는 평소의 움직임과 달리 성급했고 배려도 없었다.

“아, 읏, 프란츨, 으읏, 응, 프란츨 — ”

성적인 쾌감도 쾌감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뤼초가 그답지 않은 성마른 움직임으로 속을 마구잡이로 치받는 동안, 두 사람 모두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 채 이렇게 정신없이 몸을 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슈타인호프는 뤼초에게 다시 입을 맞추었다. 뤼초는 순순히 고개를 앞으로 하고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허릿짓은 멈추지 않았다. 빗물과 땀에 젖어 척척한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리는 동안 살집도 얼마 없는 엉덩이며 허벅지를 손으로 움켜쥐고 주무르는 손길이 제법 우악스러웠다.

독일의 조종사들은 더 이상 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고 있으니 그 시절, 막 하늘을 날기 시작했던 시절, 젊음을 방패 삼아 아무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모두 프란츨 덕분일까? 프란츨이 함께해준다면 앞으로도 매일 이럴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계획하고, 앞으로는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앞으로의 독일은 어떻게 될지, 이따위 생각에 매달릴 필요가 없던 시절로, 얼굴을 스치는 바람결과 무전을 타고 귀엣가로 흘러드는 동료의 목소리만이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에 그랬듯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살던, 우리가 알아 왔던 세상은 흔적도 없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코끝이 시큰해질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바람에 잠시 입술을 떼어내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반쯤 풀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뤼초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던 슈타인호프는 그와 이마를 마주 댔다. 거칠게 몰아쉬는 습하고 따뜻한 숨결이 얼굴에 닿았다.

“사랑해, 프란츨.”

숨을 들이쉬던 뤼초가 찰나의 순간 동안 얼어붙었다. 곧이어 웃음 비슷한 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나도.”

“사랑해, 정말로.”

“응, 나도, 매키.”

 

 

8

 

한 번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둘 다 사정하고 몸을 겹친 채 벽에 기대서 숨을 고르는 것도 잠시였다. 그를 꼭 안고 있던 뤼초가 별안간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슈타인호프는 뭐 하는 짓이냐고 바둥거리며 웃었고, 뤼초는 힘든 기색 한번 없이 그를 공주님처럼 안아 든 채 2층의 침실로 향하는 층계를 올랐다.

불 꺼진 방 안으로 창에 쳐 놓은 커튼 사이로 저녁노을의 불그레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내려놓아진 슈타인호프는 친구에게 손가락을 까딱했다. 아직까지도 걸치고 있던 바지와 신발을 급하게 벗은 뤼초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침대 위에 뒤엉킨 채로 또 한참 동안 입을 맞추었다. 슈타인호프는 그를 밀어 눕히고 위에 올라탔다. 빗물은 거의 다 말랐지만 이젠 땀이 몸을 적시고 있었다.

허벅지 안쪽 살을 따라 뤼초가 방금 싸질러 놓은 정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대로 말라붙을 때까지 방치하면 나중에 닦아내기도 힘들 테고, 가렵거나 따가울 게 뻔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정리한답시고 부산을 떨며 떨어지는 것보다는 계속 몸을 붙이고 있는 편이 훨씬 좋았다. 금세 다시 발기한 뤼초의 성기 위에 자리 잡은 슈타인호프는 천천히 몸을 내리며 그를 품었다.

“아, 프란츨 — ”

안에 남아 있는 액 덕분에 삽입이 좀 전보다는 더 매끄럽고 수월했지만, 굵은 성기가 서서 할 때보다 더 깊이 들어오는 바람에 숨이 턱 막혔다. 도무지 익숙해지기가 어려운, 그렇기에 영영 퇴색되지 않는 듯한 감각이었다. 뤼초가 신음하며 그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슈타인호프가 먼저 움직이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느라 바짝 긴장한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

“응, 너무 좋아.”

“그럼, 움직여도 돼?”

그리 묻는 뤼초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슈타인호프는 입을 열어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기가 반쯤 빠져나갔다 완전히 들어올 때마다 민감한 곳을 짓눌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떨리는 숨을 내쉬던 뤼초가 그의 허리를 붙잡고 움직임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아, 매키 — ”

“으응, 으, 프란츨.”

“네 안, 읏, 정말 뜨겁고, 기분 좋아 — ”

슈타인호프는 몸을 숙였다. 이마를 뤼초의 땀으로 축축한 이마에 가져다 대자, 열락에 들뜬 숨결이 입술에 후끈 닿았다. 입술이 부딪히고, 입을 맞추자 뤼초의 손이 그를 제자리에 고정하듯 뒷머리를 감쌌다. 다른 손은 그의 등을 잠시 와락 끌어안은 채 문지르다 천천히 그의 척추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슈타인호프는 신음하며 다시 허리를 흔들었다. 아까만큼의 다급한 열기는 없었지만 전혀 부족할 것이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상대의 몸이 보이는 반응을 음미할 수가 있었다. 힘을 주어 뒤를 조일 때마다 숨통이 막힌 사람 같은 소리를 내고, 몸통을 단단히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손가락이 살로 파고들려는 듯이 그를 움켜쥐었다.

허리와 허벅지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들었다가 주저앉듯이 그를 다시 품는 순간에 맞춰 뤼초가 허리를 쳐올리며 속을 치받았다. 마찰과 열기의 무게에 온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만지지도 않은 앞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뤼초의 배 위로 떨어졌다.

“매키.”

뤼초가 헐떡거리며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슈타인호프는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응?”

“……안경 벗겨도 돼?”

슈타인호프는 잠시 고민을 하다 허리를 움직이기를 멈추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뤼초가 방금 낸 목소리만큼이나 조심스럽게, 그의 허리를 붙들고 있던 손을 들어 뺨을 어루만지다 슈타인호프의 안경에 손을 댔다. 눈을 가린 검은 렌즈가 치워졌다.

뤼초의 손끝이 눈가를 스치듯이 더듬었다. 어느 정도는 회복이 되었다만, 피부는 여전히 보기 흉한 상처의 잔흔으로 울퉁불퉁했다. 손길 자체는 익숙했다. 뤼초는 그전에도, 입대 전부터 슈타인호프의 왼뺨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칼자국을 자주 만지작거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펜싱을 하다 얻은 흉터와 추락 사고로 인한 화상 흉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멍하니 그의 손길을 느끼던 슈타인호프는 뤼초의 눈에 눈물이 잔뜩 고여 있음을 깨달았다.

“뭐야, 왜 울어.”

“네 눈, 어떡해.”

“뭘 새삼. 괜찮아, 나는”

“하지만 눈이잖아. 앞으로 비행도 어려워지면 어떡해.”

이 와중에도 비행 생각뿐이라니, 정말이지 뤼초다웠다. 물론 슈타인호프도 그 생각을 해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팔다리 한두 개쯤 날아가고도 다시 조종석에 앉는 비행사야 적지 않았지만, 부상으로든 질병으로든 눈에 문제가 생기는 이는 으레 조종간을 놓을 수밖에 없기 마련이었다. 한쪽만 망가져도 공간감을 잃고 격추는커녕 제대로 비행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니.

불길에 녹아내리는 바람에 절반만 겨우 남아 완전히 감기지 않는 눈꺼풀 때문에 고스란히 노출된 그의 눈은 자극에 지나치게 취약했다. 염증이 생기기 일쑤였고, 그로 인해 시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눈이 예전만큼 날카롭지 않다는 사실도 나날이 절감해야 했다.

그는 쓰게 웃으며 뤼초를 달래 보려고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다니까. 이젠 익숙해졌어. 눈꺼풀은 재건 수술도 할 수 있대,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못 하는 것뿐이지. 그리고, 어쨌든 앞은 보이잖아. 그럼 된 거 아냐?”

“아니, 그래도…….”

“울지 마, 프란츨.”

슈타인호프는 뤼초의 뺨에 흐른 눈물을 손으로 문질러 닦아 주며 말했다. 뤼초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다시 주르륵, 방금 닦아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난 정말 괜찮아. 그리고, 이제 전쟁은 없을 테니까…… 조종사에게 예전만큼 날카로운 시력을 요구하지는 않을 거야. 어쨌든 두 눈 다 보이기는 보이니까 그냥 조종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고.”

느리게 내뱉은 말은 슈타인호프가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자신을 달랬던 방식 그대로였다. 다행히 뤼초에게도 같은 논리가 통한 모양이었다. 잠시 그의 발언을 재어 보듯 머뭇거리다 이내 눈물 젖은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으니 말이다.

“맞는 말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는 고개를 숙여 뤼초의 축축한 뺨에 입을 맞추었다. 뤼초의 팔이 그를 꼬옥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이 상체의 맨살에 닿는 감촉이, 피부와 피부가 맞닿으며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이 기분 좋았다.

“……정말 이제 전쟁이 없을까?”

얼마간 그렇게 가만히 슈타인호프를 끌어안고 있던 그가 물었다.

“적어도 우리가 군인으로 참전할 일은 없을걸.”

“…….”

앞으로의 독일에 군대가 존재할까? 두 차례의 전쟁을 겪은 이들이 군의 존재를 허용해 줄까? 물론 이제 독일이 반공산주의의 최전선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몰랐지만, 육군과 해군은 몰라도 공군의 전망은 몹시 불투명했다. 지난 대전쟁의 끝에서도 육군과 해군은 축소될지언정 존재했지만, 공군은 완전히 사라질 것을 강요당했으니.

“독일군은 새로 생길지 모르지만,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너무 먼 일일지도 모르고…….”

그렇게 천천히 말하자 뤼초가 또 훌쩍거렸다.

“야, 왜 또 울어, 나랑 하는 게 싫어?”

그 말에 뤼초가 재빨리,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말을 고르듯 머뭇거리는 그의 팔에, 마치 품에 끌어안은 슈타인호프가 어딘가로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며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이 힘이 들어갔다.

“그냥, 네게 이제 뭐가 남았는지를 모르겠어. 네가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프란츨.”

“고향으로도 못 가고, 날지도 못하고, 다시 군인으로 일하지도 못하고, 당장 돈도 벌기 어렵고, 몸도 엉망이고… 가족과도 연락이 안 된다며. 그리고 이젠 독일도 없는 거나 마찬가진데…….”

“그래도 친구들은 남아 있는걸. 우리 옛 전우들 말이야. 그리고…… 프란츨, 네가 있는걸.”

“하지만 나는 — ”

“사실, 다 상관없어. 너만 있으면… 너만 있다면, 지상에서도 기댈 곳이 생기는 것과도 같으니까. 계속 살아가야 하는 방향이 잡히는 것도 같으니까.”

슈타인호프는 그리 말하며 뤼초에게 키스했다. 뤼초가 눈물을 또 왈칵 쏟는 통에 뺨이 미끌거렸다. 입술을 살며시 떼어낸 그는 손으로 눈물을 훔쳐 주며 말했다.

“울지 마, 프란츨. 네가 울면 속상하단 말이야.”

“미안해,”

그가 슈타인호프의 목덜미를 문지르던 손에 힘을 주어 그의 고개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또 한 번의 입맞춤 — 이번에는 로맨틱하기보다는 다소 절박했다. 뤼초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눌러댔고, 입안을 휘젓던 혀와 혀가 만나 부딪히고 얽혔다. 슈타인호프는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뤼초의 움직임이 느긋하던 방금보다 조금 더 거칠었다. 상대의 체온을, 서로의 존재를 진득하게 느끼려는 듯이 매달리고 있었다. 몸 여기저기 자국을 남길 듯이 움켜쥐고 주무르는 동안 허릿짓에 속도가 더해졌다. 그의 손이 슈타인호프의 앞을 쥐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척척한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체액이 뒤섞이며 내는 쿨쩍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 프란츨, 나, 응, 아 — ”

슈타인호프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통제되지 않는 교성이 섞여 드는 바람에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 뤼초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에 응답하듯이 거칠게 목을 긁으며 허리를 더욱 강하게 쳐올렸다. 점점 요란해지는 두 사람의 신음, 뱃속을 깊이 치받는 감각, 자신의 이름을 몇 차례 더 부르는 소리 —

“나, 갈 것, 흣, 아!”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절정을 맞이했다. 몸이 바짝 경직되자 구멍이 반사적으로 조여들었다. 그에 반응하듯 계속해서 허리를 위로 짓쳐 올리던 뤼초가 신음하며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몸 안으로 뜨거운 액체가 쏟아졌다. 뤼초의 손이 피부 속으로 파고들고 싶어하듯 그의 허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후들거리는 팔로는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다. 그는 뤼초의 가슴팍 위로 쓰러지듯이 몸을 숙였다. 그가 슈타인호프를 품에 안았다. 한동안 두 사람 모두 움직이지 않고 몸을 꼬옥 붙이고만 있었다. 창밖의 빗소리와 두 사람이 숨을 몰아쉬는 숨소리만이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땀범벅에 정액까지 여기저기 튄 피부가 끈적거렸다.

비행 후 긴장이 턱 풀리고 찾아오는 탈력감과 유사한 감각이 몸을 엄습했다. 몸이 노곤노곤했다. 고작 두 판으로 이렇게, 싶었지만 오전에 정신적으로 기운을 잔뜩 뺀 다음 외출했다 비에 쫄딱 젖어 뛰어 들어온 것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숨을 고르며 가만히 몸을 붙이고 있던 슈타인호프는 허리를 들어 뤼초의 것을 제 안에서 빼냈다. 말랑해진 성기가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다리 사이에서 희고 끈적한 액체가 왈칵 흘러내리며 뤼초의 이미 젖은 아랫배를 더욱 더럽혔다. 옆으로 굴러내려 와 침대에 나란히 누우니 뤼초가 다시, 이번에는 슈타인호프의 가슴팍에 고개를 박은 채 그를 꼭 끌어안았다. 슈타인호프는 부드러운 손길로 뤼초의 다 헝클어진 밝은 갈색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이렇게 몸을 맞대고 누워 있으니 참 좋았다. 체온이 따뜻하고 포근했다.

“매키.”

마침내 침묵을 깨고 그렇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약간 쉬어 있었다.

“응.”

“내가 어떻게 실종됐다고?”

“응?”

“그 얘길 자세히 듣고 싶어.”

슈타인호프는 대체 왜, 싶어 그를 살며시 올려다 보았다. 뤼초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인 모양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입을 열었다.

“오후 출격이었대. 잉골슈타트와 도나우뵈르트 사이 부근에서 머로더 대형을 호위하는 썬더볼트들과 붙었다고. 너랑 백작 포함 넷이 비행 중이었고. 얼마 동안 교전을 벌이다 썬더볼트 두 대가 네 뒤에 붙었대. 넌 공격받고 있다고, 상승해서 떼어내겠다고 무전을 했고, 지휘 본부에서 호하겐이 나머지 대원들과 합류해서 림으로 돌아오라고 했는데, 그때…….”

“그때?”

“갑자기 무전이 끊어졌대. 네 전투기는 멀쩡히 잘, 대형 끄트머리에서 잘 날고 있었다는데 말이야. 다들 몇 번이고 교신을 시도했대. 듣고 있냐고, 무전기에 문제가 생겼으면 날개를 흔들라고. 그런데 답은 없고…… 별안간 오른쪽으로 선회해서 항로에서 벗어나더니 남쪽으로 날기 시작했대.”

“남쪽으로……”

“그래. 그쪽에 미군 말고 뭐가 있다고. 아무튼 백작이 마지막으로 본 건 알프스를 향해 수직 하강하는 모습이었대. 그리고 폭발. ……그게 끝이야.”

뤼초는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슈타인호프는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왜 그랬는지 도통 모르겠어. 대체 왜…… 왜 돌아오지 않고 갑자기 그렇게 했는지. 죽고 싶었던 걸까? 넌 확실히, 베로나에서 돌아온 이후 내내 우울해했으니까.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고, 일과 중에는 멍하니 앉아 있는 날만 늘어나고……. 네가 정말 걱정됐어. 매일.”

뮌헨-림 비행장에서 뤼초를 보고 느꼈던 감정은 시칠리아에서 플라잉 포트리스와 처음 대면했을 때, 호위기도 전혀 없었으나 아무것도 격추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촘촘한 방어 포화에 대원들만 여럿을 잃었던 그 시절 항공단장으로서 느꼈던 압도적 절망감과 성질이 유사했다.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하루하루를 지배했다.

대체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영영 풀리지 않을 의문일 것이다. 그에게 직접 답을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눈앞의 프란츨의 얼굴에 떠오른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건대 그도 답을 내주지 못할 듯싶었다.

“어쩌면 전쟁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는 와중에, 그간 우리가 애써 외면해 왔던 모든 추악한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던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스스로…….”

말을 더는 이을 수가 없어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다물자, 뤼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내가 내 목숨을 스스로…… 그랬을 리가 없어. 그런 선택을 했을 리가.”

“확신해?”

“응. 내가 전에 얘기해 줬잖아. 우리 삼촌이 그러셨다고. 난…… 남은 가족들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오래도록 봐 왔어. 남겨진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줄 권리가 내게 있을까? 삶이 마냥 사랑스럽지 않을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존재하니까.”

그의 손이 살금살금 다가와 슈타인호프의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이 부드럽게 얽혔다.

“그리고 내겐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있어. 두고 가고 싶지 않아.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약속해.”

“하지만 삶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견딜 만하지만은 않을 때도 있는걸.”

“…….”

“내가 병원에 갇혀 지내는 동안 죽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했었는데.”

더는 못 견디겠다고 느끼던 순간들은 분명 존재했다. 몸도 마음도 괴로워 환각에 가까운 수준의 악몽을 꾸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제발 모르핀을 더 놓아 달라고, 그럴 게 아니면 차라리 당장 죽여 달라고 악을 쓰던 나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넌…… 넌 살아 있잖아.”

“그래.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가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더라. 웃기지 않아? 다들 내게 운이 아주 나빴다고, 종전까지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 그런 일을 당했으니 안 됐다고 말하는데 말이야.”

“…….”

“하지만 죽은 사람들이 있잖아. 죽어서 전쟁의 끝을 못 본 사람들,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어찌저찌 재건 중인 독일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된 사람들……. 적어도 난 전쟁 이후의 삶을 살아갈 기회를 얻었으니 운이 좋은 편이 아닐까, 싶더라.”

사실 네 이야기야, 라는 말이 치밀 뻔했지만 간신히 내뱉지 않을 수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얇은 창과 벽 너머에서 쏟아지는 빗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한동안은 멈추지 않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밤새 내릴지도 몰랐다.

슈타인호프는 전쟁 말의 이런 정적들을 떠올려 보였다. 이런 종류의 조용함이 너무도 버겁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그치고 침묵이 흐르기 시작하면 생각을 하게 되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의 종착지는 절망이었다. 더는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패전이라는 결말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조종사들과도 마찬가지로 필사적으로 정적을 채우기 위해 애를 썼었다. 답지도 않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헛소리와 농담으로 소리와 소리 사이 공백을 채우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술을 진탕 퍼먹고, 또는 아무나 붙잡고 몸을 붙이며 성적인 쾌감으로 모든 것을 잊어 보려고 하거나.

하지만 지금 방을 가득 채운 정적은 포근하기만 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몸을 꼭 붙인 뤼초의 심장이 뛰는 소리, 두 사람분의 차분한 숨소리 — 문득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돌아갈 집도, 고향도, 모두 사라졌음에도 말이다.

“사랑해, 프란츨.”

그는 불쑥 내뱉어 보았다. 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응, 나도 사랑해, 매키.”

물기가 어려 있지만 그럼에도 주인의 굳은 심지가 느껴지는 듯한 목소리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슈타인호프는 그를 끌어안은 채 손으로 뤼초의 등판을 느긋하게 문질렀다.

“살아서 네 곁에 계속 있고 싶다고 해도…… 너무 큰 욕심은 아니겠지?”

“그게 무슨 욕심이야? 늘 그런 비슷한 욕심 많이도 부렸으면서.”

“아니, 이젠 더. 그냥 앞으로도 계속, 오래도록 네 곁에 있고 싶어. 언제나처럼 서로를 도우면서…… 네가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같이 걸어 나가고…… 더 이상 업무, 보직, 이런 것으로 엮이지 않은 사이로도.”

“그건 좀 큰 꿈일지도 모르겠는걸.”

“역시 그렇지?”

뤼초가 입술을 살짝 삐죽거렸다.

“그래도 꿈은 크게 꿔야지.”

그는 뤼초의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며 답했다. 한참 입을 맞추다 떨어지니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 옷 좀 입자, 프란츨.”

“싫어, 이대로 잘래.”

“이러다 같이 감기 걸리면 어떡해.”

“너랑 떨어지기 싫다니까…….”

“잠옷만 빨리 걸치면 되잖아. 애처럼 굴지 말고, 얼른.”

“매키……”

“가서 옷 찾아 와. 입고 나서 다시 안아 줄게.”

뤼초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키고 잠옷을 가져왔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는 그 잠깐 동안 떨어진 틈이 아깝다는 듯, 그가 슈타인호프의 손이 소매를 통과해 나오자마자 그를 다시 와락 끌어안았다. 슈타인호프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몸을 기댔다.

한동안은 오가는 말 한 마디 없이 조용했다. 빗소리가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뤼초가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 아침에 먼저 자리 떠서 미안해.”

“그럼 내일은 아침에 계속 붙어 있어.”

“그럼 아침은 누가 차려?”

“밥은 나중에 먹어도 돼. 그냥 여기 같이 있어 줘.”

“너 너무 말랐다니까, 잘 챙겨 먹어야지…….”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인 손가락이 그의 날개뼈 윤곽을 손으로 덧그리듯 쓸었다.

“네가 사라질까 봐 자꾸 겁이 나는데 어떡해. 네가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질까 봐. 네 존재가 그저 신기루일까 봐 계속 가슴을 졸이게 되는데.”

“나 어디 안 간다니까.”

“그래도. 내 눈앞에 있어야 해.”

“……그럼 알았어.”

창 밖에서는 빗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에 섞인 두 사람의 심장 뛰는 소리와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밀려드는 피로와는 사뭇 다른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내일도 나갈까?”

“그러자. 아니, 더 좋은 생각이 있어. 석방된 애들한테 연락하자. 너 돌아왔다고. 다들 기뻐할걸?”

“정말?”

“그럼, 다들 얼마나 널 찾았는데. 그리고 백작도 다시 부르자. 토라졌으면 좀 풀어주고 술도 먹이고, 그러지 뭐. 데이트도 또 하지 뭐. 부활절이 곧이니까, 날씨가 금세 풀릴 거야. 완전히 봄 날씨가 되면 나가서 제대로 산책도 하고, 소풍도 하고…… 그리고 나중엔 꼭 같이 스페인에 가자.”

“못 간다며?”

“나중엔 갈 수 있겠지. 프란츠가 전쟁이 끝나면 스페인에서 일하고 싶댔는데.”

“어느 프란츠?”

“프란츠 슈티글러. 만난 적 있지 않아?”

“어, 전에 갈란트랑 같이 있을 때 봤었던 것 같아. 우리랑 같이 스페인 다녀왔었다던데. 전투기는 아니고 수송기라고 했지만.”

“응, 걔. 걔도 우리 부대에 들어와 있었어. 참 괜찮은 녀석이었는데. 먼저 스페인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릴 맞아 주지 않을까?”

잠시 그 말의 현실성을 곰곰이 생각하는 듯이 입을 다물었던 뤼초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가 보자. 스페인 진짜 좋아. 날씨도 좋고, 음식도 되게 맛있고…… 내가 다녀왔을 땐 물가도 쌌는데, 이젠 어떨지 모르겠네. 나중엔 더 오르겠지?”

“돈이야 열심히 모으면 되지, 뭐.”

“무슨 수로?”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전투기 조종법 배우기보다 어렵지는 않을 거 아냐?”

그리 말하며 키득거리자, 뤼초가 따라 웃었다. 졸음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불 속에 갇힌 두 사람분의 체온이 따뜻했다. 아, 행복하다,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뤼초도 말수가 적어진 것을 보아하니 비슷한 상황인 듯했다. 슈타인호프는 중얼거리듯 그에게 말했다.

“프란츨, 나 안대 좀.”

“응, 잠시만.”

뤼초가 손만 뻗어 협탁에 올려놓은 안대를 건넸다. 그는 그것을 받아 들며 말했다.

“내일은 먼저 일어나지 마, 알았지? 잠에서 깨자마자 보이는 게 너였으면 좋겠어.”

“알았다니까, 걱정하지 마, 네 곁에 꼭 붙어 있을게.”

“정말이지?”

“그럼, 약속이야.”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답하는 그에게, 슈타인호프는 부드럽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고마워, 프란츨.”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살며시 들어 보니 어느새 잠든 뤼초의 얼굴이 보였다. 숨을 규칙적으로 색색 쉬는 그의 얼굴이 무척 평온해 보였다. 매상 진지하고, 짙은 눈썹과 미간에 깊게 파인 주름 때문에 가끔은 화난 듯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의 긴장이 부드럽게 풀려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편안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모든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은 듯한 얼굴…….

슈타인호프는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안대를 눈가에 둘렀다. 시야가 어두워져 뤼초의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제 몸을 단단히 감싸안은 그의 체온만큼은 여전히 선명했다.

 

 

9

 

옷 속으로 스며드는 한기에 잠에서 깬 슈타인호프는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다 안대를 밀어 치웠다. 옆자리는 또 비어 있었다.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식사 준비 같은 건 됐고,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네가 보이는 게 더 좋으니 내가 깰 때까지 옆에 있어 달라고? 물론 뤼초가 전에도 얼마나 그에게 뭔가를 먹이는 데에 집착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항상 슈타인호프가 너무 말랐다고 주장하며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이려 들고, 귀찮다고 식사를 거르면 잘 하지도 않던 잔소리를 시작하던 그였으니 말이다.

알고 지내는 햇수가 늘어날수록 참 한결같기만 인간이라고 생각한 그는 침대 옆 협탁에 올려 둔 선글라스를 집어 들어 대충 끼고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전날 밤의 대화가 떠오르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또 뭘 할까? 오늘도 날씨가 궂으면 외출하기보다는 거실에서 같이 책이나 읽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재미있는 소설 한두 권쯤은 분명히 찾을 수 있을 테니, 나란히 앉아 각자 독서를 하거나 그에게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해도 될 것이었다. 슈타인호프는 침실을 나서며 외치듯 말했다.

“프란츨! 너 또 어디 갔어? 내가 같이 있으라고 했잖아.”

대답이 없었다.

“프란츨?”

반응은 여전히 없었다. 대신 불길한 고요뿐이었다. 아니, 아닐 거야. 약속했잖아. 그렇게 약속했잖아. 프란츨은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라고. 덜컥 겁이 난 슈타인호프는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발이 꼬여 거의 다 내려와서는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겠지만, 계단 모서리에 세게 찧은 무릎이 찌릿하게 아팠다.

아무도 와 주지 않았다. 방금 무슨 소리였냐고, 괜찮냐고, 혹시 다쳤냐고 물으며 일으켜주기 위해 손을 내미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밤엔 그토록 꿋꿋하게 쉼없이 내리며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마저 간 곳 없는 완전한 정적만이 다가와 머무를 뿐이었다.

“프란츨…….”

그 나직한 읊조림은 부름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집안은 으스스할 만큼 고요했다. 욱신거리는 부위에 피멍이 들었을 것이 분명한 무릎을 문지르며 계단 난간을 잡고 일어선 슈타인호프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현관 앞 옷걸이에 걸어 둔 두꺼운 가죽 코트도, 뜯어서 한곳에 모아 놓은 휘장과 훈장들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곳에 다른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지난 며칠이 그저 상상의 산물일 뿐이었다는 듯이.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는 다시 계단에 주저앉아야 했다. 감기지 않는 눈에서 한동안 흘려 보지 못한 눈물이 쏟아져 나와 옷 앞섶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