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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핀골핀은 남자 고등학생이고 페아나로는 그의 이복누나로 세 아이가 있으며 최근 이혼했다. 핀웨는 그녀가 올 여름,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지낼 거라고 말했다.
Nolofinwë is a high school student and Fëanaro is his half-sister, with three children, and recently divorced.
Finwë said Feanaro and her children will stay in her father's house for a month this summer.
A series of short fics that are loosely connected.

Fingolfin x Fëanor

Chapter Text

 

 

놀로핀웨 아라카노는 이층 자기 방 창을 덮은 하늘색 블라인드 틈을 벌려 밖을 내다보았다. 새벽의 우윳빛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저택 대문으로 검은 세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세단이 현관 앞에 멈추어 서자 검은색, 금색, 붉은색 머리를 한 어린애 셋과 보모로 보이는 나이든 여성이 차례로 내렸다. 이어 조수석에서는 빨간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키가 컸고 윤 나는 흑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렸는데 멀리서 봐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그녀를 바라보는 소년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인다. 

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실내복 차림의 아버지가 달려나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마치 아주 오랜만에 상봉한 가족이기라도 한 양 서로를 뜨겁게 부둥켜안은 그들을 블라인드 틈으로 내다보던 소년은 천천히 창에서 몸을 돌린다. 

 

그의 이복누이가 돌아왔다. 

 

#

 

소식은 그저께 저녁 식탁에서 갑작스레 찾아왔다. 놀로핀웨 아라카노는 그의 정치인 아버지와 팔인용 식탁에 단둘이 앉아 차가운 소고기를 씹고 있었다. 그들은 나쁜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중재해 줄 여자 가족 없이 마주앉자 놀로핀웨의 수험이며 핀웨의 직장 따위의 판에 박은 이야기나 좀 나누니 화제가 떨어져 버렸다. 고용인들이 거의 퇴근한 저택은 적막했고, LP판에 녹음된 실내 교향악 소리만이 드넓은 식당 공간을 채웠다.  

놀로핀웨가 접시를 거진 비워 갈 즈음, 아버지가 불쑥 말을 꺼냈다. 

모레부터 한 달간, 이복누이 페아나로와 그녀의 세 아이들이 이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페아나로는 놀로핀웨의 아버지와 사별한 전 부인 사이의 외동딸로 놀로핀웨에게는 손윗이복누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재혼하자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의붓가족들에게는 남보다 더 먼 사이가 된 사람이었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를 알리는 아버지의 어조는 간청하듯 온화했고 눈빛은 비굴해 보일 정도로 조심스러웠지만, 그것은 설득이 아닌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한 통보였다. 만일 이 식탁에 어머니나 여동생들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름 방학을 맞아 누나는 도리아스의 친구 집으로 떠났고, 어머니와 동생들은 막내이모의 출산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외가가 소유한 호화 리조트로 휴양을 나가 있었다. 집에 남은 건 일이 바쁜 아버지와 수험생인 아들 뿐이니, 번거롭게 지낼 필요 없다며 아버지는 대다수 고용인들도 장기 휴가를 주어 내보내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집이 빈 한 달간, 이복누나가 돌아온다. 아버지를 제외한 이 집 가족들을 지독히 싫어하는 누나가. 공교로운 우연이다. 

어쩐지 어머니가 이 소식을 아직 모르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로핀웨는 입안에 든 마지막 고깃조각을 천천히 씹어 넘기고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특유의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버지의 얼굴이 부챗살 펴지듯 환해졌다. 

“고맙다 놀로핀웨. 페아나로가 돌아오면 네가 불편한 일이 많겠지… 나도 안다. 조금만 참아 주렴. 알다시피, 페아나로가 얼마 전 큰 일을 당했지 않니.” 

당했다기엔. 이혼의 책임은 누이 쪽에 있었다고 들었다. 거실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흘긋흘긋 흘러나오던 어머니와 이모의 통화 내용으로는 그랬다. 

“페아나로도 어릴 땐 여기서 컸단다. 하지만 내가 너희 어머니와 결혼한 후 학교로 떠나 돌아오지 않았어. 지금의 이리메보다도 어린, 굉장히 어린 나이였는데…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그 애가 다시 이 집에 돌아오겠니. 부족한 아버지의 소망 때문에 불편을 끼쳐 미안하구나. 

그는 품에서 두툼한 흰 봉투를 꺼내 아들 쪽으로 밀어 주었다. 

“너도 한참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기인데 미안하구나… 혹시 밖에서 시간을 보낼 일이 있으면 이걸로 쓰고, 부족하면 언제든 말하렴.”

 

아버지에게 목레하고 방으로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과연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액수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유복하게 성장한 그였지만 이만한 금액을 용돈으로 받아본 적은 없었다. 

죄책감의 값이겠지. 당연히, 아버지도 알고 있는 것이다. 손윗이복누이가 집에 돌아오면 수험을 준비하는 맏아들에게 불편한 일이 ‘정말’ 많아질 거라는 걸. 그건 복도에서 뛰노는 어린 조카들이 공부를 방해하고 낯선 고용인들과 지내느라 신경이 거슬리는 정도의 불편이 아니다. 당신에 대한 분명한 적의를 숨기지 않는 사람과 한집에서 부대껴야 하는 문제다. 

이복누이, 쿠루핀웨 페아나로는 이복동생 놀로핀웨 아라카노를 미워했다. 아버지 지인들이 모이는 연회장 따위에서 드물게 그녀를 마주칠 때면 놀로핀웨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날카로운 눈초리에서 뚝 뚝 떨어지는 미움을 볼 수 있었다. 좋은 집에서 반듯하게 자란 용모 단정한 소년을, 그처럼 혐오스럽다는듯한 눈으로 보는 사람은 생전 없었다. 

사실, 놀로핀웨에 대한 적의가 가장 거셀 뿐이지 그녀는 자기 아버지의 새 가족들을 모두 그처럼 독이 밴 눈으로 보고는 했다. 그들을 찾아오지 않고, 상대하지 않고, 혹여 말 섞을 일이 생기면 냉막한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이제는 깨진 결합이지만 자기 결혼식에 초대한 가족도 아버지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적의가 그처럼 불같이 선명한데도 아버지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양 허허 웃고만 있다. 아버지는 제 아픈 손가락만 손 안의 꽃처럼 아꼈고, 그녀가 아버지 자신의 두 번째 가정에 오물처럼 뿌리는 경멸은 모른 척 외면했다.  

 

그의 방 책상에 앉아 반듯이 앉아 놀로핀웨 아라카노는 휴대전화 액정을 톡 톡 두드린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이 ‘결정’을 알리는 시점은 누이가 들어오기로 한 날짜인 모레 이후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휴대전화 액정을 켜고 당장 어머니나 남매들의 번호를 누를 수 있었다. 잘 지내고 계시냐고 안부를 묻는 척 하면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통보, 그리고 그가 비겁하게도 달래듯이 찔러준 돈 봉투에 대해 누설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누이의 도착을 기다렸다. 

 

 

#

 

놀로핀웨가 책가방을 메고 계단을 내려오니 일층 복도는 이삿짐 캐리어를 운반하는 새로 도착한 고용인들로 북적거렸다. 벽에 기대어 그 광경을 구경하던 은발머리 꼬마 조카가 '숙부’를 흘긋 보고도 고개 한 번 까딱이지 않고 하품만 하니 초등학생 나이로 보이는 빨간머리 큰형이 동생의 등짝을 툭 때려 엉거주춤 인사를 시킨다.

식당에 들어서니 아침 식사로 간단한 샐러드와 오믈렛, 오렌지 주스 따위가 차려져 있고, 넓은 팔인용 식탁에 아버지와 누이, 그리고 검은 머리 조카가 앉아 있다. 무어라 웅얼이는 조카애의 조그만 머리통을 쓰다듬는 아버지의 눈가 주름에 싱글벙글한 웃음꽃이 피었다. 음향 기기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교향악이 흘러나오는데 누이의 선곡인 모양이었다. 놀로핀웨가 그들에게 목례한 후 오늘은 집이 북적이니 아침은 학교 근처에서 먹겠다고 알리니 아버지는 그러려무나 하신다.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를 불러세웠다. 

“너.”

돌아서니 만개한 붉은 꽃처럼 화려한 얼굴의 여자가 있다. 이복누이다.

“너, 학생이지. 일정이 어떻게 되지?” 

“귀가 시간을 물어보시는 겁니까?”

“말 해."

“평일엔 저녁 여덟 시쯤 귀가합니다.”

“저녁은 밖에서 먹고 오는 것이군... 좋아. 주말엔?”

“매주 다릅니다.” 

“가능한 밖에서 지내도록. 돈이 필요하면 내가 주지.” 

“…일정이 어떻게 될지는 가 봐야 압니다. 돈은 주실 필요 없습니다.” 

무뚝뚝한 불복에 그녀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무언가 쏘아붙이려는 듯 얇은 입술이 움찔이는데, 그때 복도 저편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부친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제 쪽이 아량을 베풀어 할 말을 참는다는 듯 한 걸음 물러섰다. 

“…가 봐.”

 

놀로핀웨는 그녀의 뒷모습에 목례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만일 그를 오랫동안 돌봐 온 고용인들이 휴가를 떠나지 않고 저택에 남아 이 광경을 보았다면, 그들은 대번에 속이 상해 어머니에게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손윗누이 페아나로는 이 집 문턱에 발을 들인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자기가 여주인이라도 되는 듯이 행동한다. 여기서 십팔년을 나고 자란 도련님을 더부살이하는 천덕꾸러기 취급한다. 

그런 여자가 짜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짜증스럽기만 한 건 아니라 문제다. 

대문 앞에 대기하던 검은색 세단 뒷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메자 기사가 차를 출발시켰다. 말없는 도련님은 음악을 틀지 않고 차창에 턱을 괸 채 풍경을 보는 척 상념에 빠진다. 허공을 헤메는 그의 시선이 망막에 새겨둔 좀전의 기억을 더듬는다. 

그녀는 윤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렀고, 허리선을 꽉 조이는 새빨간 실크 원피스를 입었다. 색깔 있는 스타킹에 감싸인 다리선은 미끈하고 발목은 가늘며 발볼은 좁은 편이다. 팔목에는 얇은 다이아몬드 팔찌를 찼는데 손가락은 이제 결혼반지 없는 맨손이다. 반듯한 콧날, 조각칼로 반듯하게 깎아낸 듯한 턱선. 입술 색은 유난히 붉은데 원래 그런가, 립 제품을 써서 그런가 궁금하다. 긴 속눈썹 덕택에 진해 보이는 눈매는 끝이 날카롭게 빠졌는데 어머니 쪽 유전일까...... 

'네가 미워' 라고 말하는 찌푸린 얼굴이 아름답다. '네가 싫어' 라고 말하는 잿빛 눈동자가 아름답다. 

허리에 손을 짚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고 선 여자의 모습을 그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한다. 그를 미워하는 이복누이가 소년의 현재진행형 첫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