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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334 클리셰 하이틴을 가장한 1633 하이틴로맨스 (컨셉: 말할 수 없는 비밀)

Chapter 1

Notes:

(See the end of the chapter for notes.)

Chapter Text

 

란도는 바짝 긴장한 채 학교 건물에 들어섰다.

이 좁아터진 마을에 돌아온 건 거의 5년만이었다. 란도는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지만 5학년이 끝나갈 즈음 가족들과 함께 벨기에로 떠났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 돌아온 이곳은 영판 모르는 동네가 돼 있었다. 낡은 지붕과 녹색 가로수, 쨍한 날씨까지 같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분명 다 알던 애들일 텐데. 2차 성징이란 무서운 것이라서 란도는 당최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가방끈을 꼭 쥐고 오피스에 들렸다가 쭈뼛쭈뼛 교실에 들어섰다. 독일어 교실은 시끄러웠고 얼핏 봐도 익숙한 얼굴이 없었다. 있지만 그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고. 하여튼 란도는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비어있는 맨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옆엔 짙은 금발의 남자애가 앉아있었다.

란도는 그를 힐끔 쳐다봤다.

세상에, 걔는 딱 봐도 란도랑은 전혀 다른 유형의 인간이었다. 어깨는 무슨 운동을 하는지 넓었고 표정은 시큰둥한 게, 열받으면 바로 주먹부터 날릴 것 같았다. 란도는 황급히 교과서를 꺼내서 페이지를 넘겼다.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미리 물어보지 않은 게 후회가 됐다.
갑자기, 옆자리 애가 불쑥 물었다.

“오늘 새로 왔어?”

란도는 화들짝 놀라서 그를 돌아봤다. 걔는, 예상 외로, 좀 쑥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교실을 향해 모호하게 손짓했다.

“....처음 보는 거 같아서.”
“어...어. 며칠 전에 이사 왔어. 원래 5학년까진 여기서 다녔는데, 엄마 일 때문에, 벨기에에 갔다가....”

닥쳐, 노리스. 닥쳐. 란도는 주절거리는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처음 보는 애한테 자기 신상정보를 늘어놓는 것처럼 쿨하지 못한 일은 없었다. 란도는 급속도로 어색해질 분위기를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란도를 비웃거나 하지 않았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벨기에에서 태어났어.”
“어, 정말?”
“응. 그리고 사실 네가 누군지 알아.”

그가 머쓱한 웃음과 함께 뒷목을 문질렀다.

“란도 맞지? 란도 노리스.”
“오, 어, 맞아. 너 나랑 같은 클래스였던가?”
“어. 5학년 때.”

란도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같은 교실에 머물던 고만고만한 얼굴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금발에, 부루퉁한 얼굴에, 벨기에에서 태어난....
어, 너! 란도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나 너 알아!

“막스 맞지! 막스 V!”
“그래. 막스 V.”

그가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란도는 활짝 웃으며 막스의 손을 쥐고 흔들었다.


-

 
막스 V, 이 별명은 같은 학년에 막스가 세 명이나 있는 바람에 생긴 것이었는데, 아무튼 막스 베르스타펜은 꽤 괜찮은 녀석이었다. 둘은 벨기에인 어머니를 뒀다는 이유로 친해졌고 종종 서로의 집에 놀러가곤 했다. 애들을 쓰레기통에 밀어 넣을 것 같은 불퉁한 인상과는 달리 -란도는 그 점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 막스는 숙제 한번 빼먹지 않은 재미없는 애였다. 물론 좀 다혈질이긴 했지만. 아무튼.

란도는 아는 얼굴을 만난 안도감과 기쁨에 수업시간 내내 키득거렸다. 막스는 수업 내용이 빼곡히 적힌 자기 교과서를 보여줬고 란도는 그의 악필을 가까스로 해석해 필기들을 베껴적었다. 막스 또한 오랜만의 만남이 꽤 즐거운 기색이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벨기에가 어땠는지 물었고, 란도는 노트 한켠에 그곳의 학교와 맛없는 음식들에 대해 끄적였다.
비로소 수업이 끝나자 둘은 웃으며 가방을 챙겼다. 란도가 막스의 팔을 친근하게 밀쳤다.

“대체 뭘했길래 이렇게 큰 거야? 너 꽤 작았었잖아.”
“너만큼은 아니었지.”
“시끄러!”

란도가 장난스럽게 그를 째려봤다. 막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수영. 중학교 때부터 했어.”
“오, 멋지네.”

란도는 왜 하필 수영이었는지 궁금했으나, 왠지 그의 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시킬만한 인간이었으니까. 뭐, 어쨌든 수영은 꽤 효과적으로 그의 몸을 키워준 것 같으니 그거면 된 거였다.
막스가 책을 대충 가방에 던져 넣고는 스웻셔츠를 입은 어깨에 둘러맸다. 그가 가볍게 물었다.

“점심 같이 먹을래?”
“좋아!”

란도는 웃으며 그와 함께 교실을 나섰다.

 
복도는 어수선했다. 사물함에 책을 집어넣는 애들과 농구공을 들고 분주히 어디론가 향하는 애들, 막 교실에서 쏟아져 나온 인파가 뒤섞였다. 란도는 또 아는 얼굴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막스가 수선을 떠는 란도의 팔을 끌어당겼다. 너 그러다 넘어진다. 장난스런 경고에 란도가 코웃음을 쳤다.

“난 애가 아냐, 막스.”
“하지만 넌 10살 때랑 똑같이 생겼는걸.”

보자마자 알았어. 그가 씩 웃으며 란도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그렇게 보니 막스의 얼굴도 어릴 때랑 꽤 비슷했다. 너도 비슷해. 란도는 그와 몸을 부딪히곤 깔깔 웃으며 걸었다.

식당 앞 복도 한켠엔 팀 점퍼를 입은 남자애들이 모여 있었다. 보나마나 풋볼 팀이었다.
란도는, 다시 말하지만, 저런 타입과는 전혀 맞지가 않았다. 그들은 시끄럽고 요란한데다 남들 앞에서 근육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을 했다. 란도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의 옛 친구 중 풋볼을 할만한 녀석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닌텐도 친구 막스가 수영선수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변이었으니까. 뭐.

시선을 돌리던 란도는 그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브루넷이었고 검은 진 위에 풋볼팀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지루해 보일 만큼 느긋하게 그 무리에 섞여 있었는데, 그것만 봐도 그가 어떤 "계층" 에 속하는지 명백해 보였다.
그가 고개를 들자 단단한 턱과 섬세한 눈이 드러났다. 가라앉은 시선이 말없이 그들을 바라봤다. 란도는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대체 왜 저 잘생긴 남자애가 저런 표정으로 그들을 보는지 모르겠어서였다.

놀랍게도, 막스가 그에게 짧게 인사했다.

브루넷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좀 더 노골적으로 란도를, 정확히는 란도의 어깨를 감싼 손을 쳐다봤다. 란도가 어어, 얼빠진 소리는 내는 동안 막스는 눈썹을 들어 올리곤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의 반쯤 끌려가며 란도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는 어느새 제 무리를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
 

-


란도와 막스는 음식을 받아들고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초코바와 파이가 가득한 란도의 접시와는 달리 막스의 접시엔 사과와 샐러드, 스크램블 에그 뿐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란도의 접시를 내려다보며 막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먹으면서 애가 아니라고?
뭐 어때. 어깨를 으쓱 하곤 초코바를 깨물던 란도의 등을 누가 팍 내리쳤다.

“란도! 너 란도 맞아?”
“조지?!”

켁켁거리던 란도의 얼굴이 곧장 밝아졌다. 몇 년 전과 똑닮은, 키만 길쭉해진 두 친구가 환하게 웃으며 란도와 포옹했다. 이게 얼마만이야! 란도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조지와 알렉스는 란도의 게임 친구였다. 막스도 물론 그랬지만, 이 둘과는 좀 더 매니악한 것들을 함께 하곤 했다. 보드게임이니, 며칠 동안 공략해야 하는 RPG 게임 같은 것들을. 둘은 자전거를 타고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애들이었지만 기꺼이 란도의 취미에 어울려줬다. 그래서 란도도 가끔 그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해변에 나가 공놀이를 하곤 했다.
그러니까 둘은 란도의 소꿉친구였다.

“메시지 보내지 그랬어. 그럼 우리가 보러 갔을 텐데.”

알렉스가 활발하게 그들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들은 SNS와 메일로 자주는 아니어도 꾸준히 연락하고 있었다. 란도는 수줍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바로 수업이라 정신이 없었어. 막스도 만났고.”
“맞아, 니들 친구였지.”

조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막스 옆자리에 앉았다. 막스는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란도는 좀 안심했다. 그의 많지 않은 친구들이 그가 없는 사이에 싸우기라도 했다면 꽤 곤란했을 테니까.
넷은 가벼운 근황 이야기를 하며 점심을 먹었다. 란도는 눈을 팽팽 굴리며 학교의 밀린 사건들을 따라잡았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누가 누군지도 제법 구분이 됐다. 쟤가 걔라고?! 싶은 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납득되는 수준이었다.

설명을 듣던 란도의 눈에 문득 시끄럽게 떠드는 풋볼 팀 애들이 들어왔다. 란도는 본능적으로 아까 마주쳤던 브루넷을 찾았다. 찾기가 어렵진 않았다. 테이블 한가운데 자리에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까와는 달리 환히 웃으며 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자 기시감이 더해졌다. 왠지 친숙한데.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그의 머릿속에 반짝 전구가 켜졌다.

“샤를 르클레르!”
“뭐?”
“쟤, 르클레르 맞지?”

란도의 시선을 따라간 조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 란도. 제발 쟤도 못 알아봤다고 하진 말아주라. 쟨 우리랑 같은 반이었잖아.”
“난 처음엔 막스도 못 알아봤다고.”

란도가 별로 도움 안 되는 변명을 웅얼댔다. 막상 떠올리고 나자 왜 몰랐나 싶을 만큼 기억이 밀려들었다.

샤를 르클레르를 잊어버리다니. 조지 말마따나 그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샤를은 학년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애였다. 이유야 뭐, 얼굴만 봐도 뻔했다. 모나코에서 온 친절하고 잘생긴 소년과 사귀어 보겠다고 애들은 허구헌날 다투었다. 란도는 왠지 그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쟤한테 목매는 애들을 이해할 순 있었다.
그리고 샤를은 그 때 그대로 자란 모양이었다. 과시하듯 큰소리로 떠드는 남자애들 사이에서도 샤를은 명백하게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란도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했다.

“여전히 인기 많은가 보네.”
“더 심해졌지. 쿼터백에, 파티광에, 새빨간 페라리를 모니까.”

조지가 피자를 씹으며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알렉스가 웃으며 그의 친구의 손등을 때렸다. 란도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전형적일 수가. 등받이에 기댄 그가 키득거리며 물었다.

“그럼 주말마다 취해 있겠네? 매번 새 데이트를 데리고 파티에 오고, 치어리더랑 사귀고?”

순간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아주 짧은 침묵이었지만 란도는 놓치지 않았다. 조지와, 그보다는 더 솔직한 알렉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한 명에게 쏠렸다. 란도는 설핏 눈썹을 찡그리며 시선이 모인 쪽을 바라봤다.
그의 맞은편이었다.
막스는 아무 말 없이 스크램블에그를 퍼먹고 있었다.

“그건-”

알렉스가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한 채 말을 꺼냈다.
조지가 빠르게 문장을 맺었다.

“좀 복잡해.”

란도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졌다.

 

-

 
란도는 천천히 새 환경에 적응해나갔다. 수업은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았고 -물론 그가 성적에 그리 연연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친절했다. 이전에 같은 반이었거나, 얼굴을 알던 애들과도 다시 안면을 텄다. 하지만 그는 주로 막스나, 알렉스와 조지랑 같이 다녔다.
막스는 꽤 좋은 클래스메이트였다. 그는 수영 연습으로 바쁜데도 여전히 숙제를 꾸준히 해와서 란도의 공부에 큰 도움이 됐다. 알렉스와 조지는, 그냥 어릴 적이랑 똑같았다. 셋은 실없이 키득거리며 수업을 듣다 선생님께 꾸중을 듣곤 했다.

평화로운 일상이 흘러가는 동안에도 란도의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그는 어렴풋이, 그가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막스와 샤를의 사이가 나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한번은 아예 교실에서 대놓고 싸워서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 이유까진 기억 안 나지만, 붉어져 씩씩대던 얼굴과 샤를을 욕하던 막스의 목소리만은 기억이 났다.
얼간이나 뭐 그런 소릴 했던 거 같은데. 란도는 골똘히 생각했다.

“눈 뜨고 자?”

톡톡. 손가락이 책상을 쳤다.
란도는 화들짝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막스가 짓궂게 웃었다. 도서관이라 큰 소리를 낼 수 없었으므로 란도는 책상 밑으로 막스의 다리를 걷어찼다. 둘은 입을 막고 킥킥거렸다.
쉬는 시간동안 숙제라도 해야겠다고 도서관에 온 게 한 시간 전이었다. 란도는 고개를 쭉 빼고 막스의 랩탑을 쳐다봤다. 그는 벌써 작문 숙제를 다 끝낸 모양이었다. 란도는 앓는 소리를 내며 풀던 문제를 내밀었다.

“끝났으면 나 좀 도와줘. 전혀 모르겠어.”
“수학은 자신 없는데. 음...”

둘은 노트 위로 머리를 모았다. 막스가 후드 안에 목을 파묻곤 끄적끄적 풀이를 적기 시작했다. 반쯤 적어 내려가는 도중 진동 소리가 울렸다. 막스는 짜증스런 얼굴로 후드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짧은 이름이 스크린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샤를'.

란도는 눈을 깜빡이며 화면을 내려다봤다. 시각정보와 생각이 연결되지 않았다.
샤를? 찰스? 뭐가 됐든 그건 흔한 이름이었다. 란도가 아는 한 이 학년에 그 이름은 딱 한 명밖에 없지만 그래도 하여튼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전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샤를? 샤를 르클레르도 아니고, 샤를?

그 친밀한 호칭에 기겁할 틈도 없이 막스가 빠르게 거절 버튼을 눌렀다. 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그가 다시 연필을 집었다. 연필심이 사각대는 동안 메시지가 도착했다. 막스는, 왠지 화면 잠금도 걸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란도는 피치 못하게 내용을 모조리 읽고 말았다.

-어디야?

잠시 후,

-왜 수영장에 없어?

란도는 필사적으로 수학 문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뭐가 됐든 더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풀이를 다 적은 막스가 종이를 란도 쪽으로 돌렸다.

“봐봐. 뭔가 이상하면 말하고.”
“난 봐도 모를걸.”
“란도, 내 수학 성적은 진짜 그냥 그렇다고.”

막스가 웃으며 연필을 내려놨다. 그러고는 옆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란도는 종이를 들어 얼굴을 가리곤 그를 흘낏댔다. 막스가 메시지를 보고 짧게 웃었다.
그는 잠깐 뭔가를 길게 적었다가, 다 지우곤, 간단히 써서 보냈다.

-란도랑 같이 있어.

어, 별로 언급되고 싶지 않은 맥락에서 언급된 기분인데. 란도는 글씨를 읽는 척 눈을 굴렸다. 수영장에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한건 아닌 걸까? 하지만 샤를은 꽤나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막스 베르스타펜과 샤를 르클레르가 자신의 면전에서 맞닥뜨리는 건 정말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였다. 
란도는 수학 노트를 대충 접어 가방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스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 먼저 가볼께.”
“뭐? 왜?”
“어....그... 할 일이 있어.”

막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막스의 핸드폰에 연이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딘데?
-막스, 어디냐고.

란도는 흐린 눈을 하고 가방을 챙겨맸다. 뭐가 뭔지 몰라도 란도는 자신의 직감을 철저히 따르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이지 샤를 르클레르 같은 타입과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란도가 어색한 웃음으로 그의 친구에게 인사했다.

“먼저 갈게, 맥스. 다음에 봐.”

막스의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 속에서 란도는 빠르게 도서관을 나왔다. 이 정도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그렇지. 그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지.
란도는 초코바를 쥐고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눈을 뜨면, 카페테리아의 수많은 시선들이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약간 걱정스러워 보였고, 조지는 흥미로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막스는? 그는 지금 없었다. 수영부 코치와의 면담 때문에 점심을 먹으러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란도의 앞엔 샤를 르클레르가 서 있었다.

“란도, 맞지? 노리스.”
“어...맞아.”
“난 샤를이야. 샤를 르클레르.”

샤를이 꼭 실크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꾸민 것 같이 위압적인 미소였다.
그가 허공에 대고 손짓했다. 란도는 그 제스쳐가 막스의 것과 꽤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말았다.

“음, 우리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기억 나?”
“응. 기억 나. 너랑 막스랑 맨날 싸웠잖아.”

컥, 알렉스가 목 막힌 소리를 내더니 급하게 콜라를 들이켰다. 란도는 삐딱하게 샤를을 올려다봤다. 어차피 망한 거, 하고 싶은 말이라도 맘대로 쏟아놓고 싶어서였다. 란도는 어차피 예쁘게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남을 도발하는 건 그의 특기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샤를의 버튼은 분명 막스였다.
하지만 샤를은 놀랍도록 견고했다. 잠깐 멈칫 했던 그가 거의 샹들리에에 비견할만한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미소는 눈까지 닿지 않았다. 란도는 내심 기겁했다.

“기억한다니 잘됐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그래, 나도.”
“그래서 말인데, 금요일에 우리 집에 올래? 파티가 있거든.”

샤를이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제안했다. 란도는 갈등했다. 란도는 파티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싫어했다. 게다가 그게 샤를이 여는 파티라면 더더욱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거절하면 너무 싸움 거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가 고민하는 사이 조지가 선수 쳐 대답했다.

“갈게, 샤를. 우리가 얘도 데리고 갈게.”
“뭐-?”
“그래? 고마워.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

샤를이 또 다시 눈을 접으며 웃었다. 감히 싫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미소였다. 란도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는 다소 압도당한 기분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풋볼팀 멤버들에게 걸어가는 샤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나 뭐 한거야?”
“뭘 했긴, 학교의 왕한테 장갑을 던진 거지.”

조지가 삐딱하게 말했다. 빈 콜라캔을 우그러뜨린 알렉스가 한탄했다.

“란도, 진심이야? 꼭 그렇게까지 흥미진진한 학교생활을 해야겠어?”
“-뭐, 그리 나쁘진 않았어, 하지만.”

낯선 목소리가 평가했다.
란도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테이블 옆에 묘하게 낯익은 얼굴들이 와 앉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란도는 그들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조지의 신문부 선배인 에스테반과, 막스와 같은 수영팀인 피에르였다.
세 사람은 그들보다 한 학년 위인 프렌치들을 위해 자리를 치워 줬다. 피에르가 란도를 향해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해해 줘. 샬은 가끔 좀.... 공격적일 때가 있거든.”
?”
“난 샤를의 소꿉친구야.”

란도는 갑자기 몹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저 둘 사이에 이상하게 끼인 건 그뿐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 에스테반은 좀 더 남의 일 보는 듯한 태도였다. 별로 흥미는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찌저찌 신문부에 있다는 그는 키위 샐러드를 찍어먹으며 가볍게 평했다.

“어찌 됐건 파티는 재밌겠네. 이번 주말은 꽤 붐비겠는걸.”
“난 그 파티 가기 싫어.”
“걱정 마, 란도. 샤를의 파티엔 말 그대로 아무나 다 가니까. 우리도 몇 번 갔었어.”

알렉스가 그를 위로했다. 왜 그런 파티를 해? 란도의 물음에 에스테반이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사람이 많아야 걔도 올 수 있으니까.”

그리곤 또 다른 침묵.
란도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눈을 깜빡거렸다. 당최 무슨 소리들인지 이해가 안 갔다. 대체 이게 다 뭔데? 짜증스러운 물음에 피에르가 어떻게든 설명해주려 애를 썼다.

“그러니까...”

그의 시선이 천장을 봤다가, 감자튀김을 내려다봤다가, 새가 지저귀는 창밖을 향했다. 그러고도 잠시 더 고민하던 그가 결국 짧게 내뱉었다.

“좀 복잡해.”

란도는 '복잡하다' 를 그가 싫어하는 단어목록 1위에 올리기로 했다.

 

-

 
고민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막스는 까페테리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고- 란도는 막스가 친구가 없는 건지 의심했다 - 애들은 일단 가서 한번 보라는 말만 했다. 정체모를 괴물을 눈앞에 둔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애초에 상대를 도발한 건 그 자신이었으므로.

결국 금요일 저녁, 란도는 죽상이 되어 알렉스의 차에서 내렸다. 거의 저택이라고 부를만한 커다란 집과 수영장에선 이미 요란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온 두 친구는 꽤나 기분이 괜찮아보였다. 뭐, 어쨌든 그들은 파티에 온 거니까. 조지가 란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즐기자고. 공짜 맥주, 좋잖아?”
“난 술 안 마셔.”
“재미없게 사네, 친구.”

란도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친구들을 따라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집이 정말 넓어서 잘하면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였다. 게다가 듣던 대로 사람도 엄청 많았다. 벌써부터 취해서 수영장에 뛰어드는 애들을 보고 란도는 기겁을 했다. 아무리 봐도 맥주만으로 취한 것 같진 않은 모양새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열린 현관을 넘었다.
그리고 정말, 뜻밖에도, 막스와 맞닥뜨렸다.

“란도!”

막스가 놀람 반, 반가움 반의 탄성을 질렀다. 란도는 마찬가지로 놀라서 그를 올려다봤다. 그가 기억하는 한, 막스는 파티는커녕 통금 때문에 남의 집에서 저녁도 못 먹던 애였다. 란도가 뭐라 묻기도 전에 막스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세상에, 니들 보니까 반갑다. 안에는 벌써 정신 나간 놈들밖에 없거든.”
“맥주 말고 뭐가 또 있어?”
“데낄라. 엄청 많이.”

막스가 불만스럽게 내뱉곤 돌아섰다. 란도는 기대에 차 눈을 빛내는 조지를 알렉스가 말리는 걸 보았다. 그들은 복도와 부엌을 지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 스피커가 먹먹하게 울리고 취한 애들이 사방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막스는 꽤 익숙하게 발코니 한 켠에 있는 카우치로 그들을 이끌었다. 유리문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그런지 그곳은 꽤 조용했다. 그들은 앉기 전에 테이블에서 마실 것을 집었다. 조지와 알렉스는 맥주, 막스와 란도는 콜라였다.

“술 안 마셔?”

물음에 막스가 어깨를 으쓱 했다.

“마실 기분이 아니라서.”
“그런 날이 있지.”

조지가 하나도 동의하지 않는 말투로 말하고는 카우치에 앉았다.
넷은 잠깐 동안 사람들로 가득 찬 수영장을 보며 음료를 홀짝였다.
란도가 막스에게 물었다.

“파티 좋아해?”
“그렇게 보여?”

막스가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그는 집에서 편하게 입을만한 낡은 후드티와 운동용 반바지 차림이었다. 확실히 파티에 오는 사람이 입을만한 옷은 아니었다. 란도는 여기까지가 다른 애들이 묻는 선이라는 걸 알았지만, 궁금했으므로, 더 이어서 물었다.

“근데 여긴 왜 왔어?”

알렉스가 꿀꺽꿀꺽 잔을 비웠다. 막스가 수영장을 바라보다가 모호하게 말했다.

“안 오면 걔가 짜증내니까.”

음. 란도도 이젠 더 묻고 싶지 않아졌다.
란도는 빠르게 주제를 학교 수업으로 돌렸다. 넷은 끊임없는 숙제와 수업, 시험에 대해 불평했다. 알콜 냄새가 진동하는 파티장의 10대들이 떠들기엔 꽤 건전한 소재였다.
마침내, 알렉스 몰래 데낄라를 홀짝이던 조지가 고백했다.

“사실 오늘이 이런 전개일 줄은 몰랐어.”
“전개라니?”
“왜. 풋볼팀 애들이 단체로 날 맥주통에 빠뜨릴 줄 알았어?”

란도가 냉소적으로 되물었다. 막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뭐, 너만큼이나 파티를 싫어하는 란도가 집주인한테 초대를 받았다는 뜻이지.”

조지가 취한 사람치곤 놀랄 만큼 또박또박한 말투로 대답했다. 알렉스가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기울이며 덧붙였다.

“오자마자 여기로 들어온 덕에 별일 없었고... 뭐, 그런 거야.”
“여전히 걔는 네가 우리랑 같이 있는 게 못마땅하겠지만.”

란도는 점점 모호해지는 대화에 질색을 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분리된 공간 치고도 꽤나 조용했다. 유리로 막혀 있어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텐데도 열어보거나 소리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막스가 사정없이 인상을 구겼다. 그가 짜증스러운 목울림을 내며 컵을 내려놓더니 란도를 휙 돌아봤다.

“미안.”
“뭐, 사실 난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겠는걸.”
“그냥.... 미안해, 란도. 그 자식은 얼간이야.”

란도는 떠오르는 데자부를 애써 외면했다. 막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란도는 이번엔 그가 보내는 메시지를 읽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몇 번 메시지가 오간 뒤 막스가 일어섰다.

“잠시만.”

그가 고갯짓을 하곤 잔디밭 쪽으로 나갔다.
셋은 그냥 빈 빨간색 컵을 쥐고 카우치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샤를이 나타났다.
그는 눈에 보이게 취해 있었다. 발코니 문을 벌컥 연 샤를은 그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막스가 나간 길을 이어서 걸어갔다. 시끄러운 음악과 어슴푸레한 불빛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둘은 명백히 싸우는 것 같았다. 막스가 팔을 잡은 샤를의 손을 뿌리치고, 다음엔 샤를이 뭐라고 말하는 막스를 밀쳐냈다. 들리지 않는 언쟁은 잠시 후에 멎었다. 둘은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짧은 순간, 란도는 그들이 주먹질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샤를을 노려보던 막스가 뭐라고 거칠게 내뱉고는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샤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멀어지는 막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핏, 야간조명이 켜지면서 샤를의 얼굴을 비췄다.

그 얼굴에는 꼭, 절박한 초조함 같은 것이.
'그' 샤를 르클레르가?

란도는 기분이 너무 이상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봐선 안 되는, 지나치게 사적인 장면을 본 기분이었다. 조지와 알렉스를 돌아보면 그들은 진작부터 술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조지가 태연하게 말했다.

“와서 보면 안다니까?”

란도는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

 
예상과는 달리 이후의 학교생활은 상당히 조용히 흘러갔다. 모두가 기대하던, 쿼터백에게-시비를 건-너드의 클리셰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단 뜻이었다. 어쩌면 시험기간이 다가왔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 학교는 정말 단기간에 사람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지만, 란도는 다른 생각은 애써 치워두고 공부에 집중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일단 그는 수업을 그리 열심히 듣지 않았고, 그와 매일 함께 공부하는 친구가 그 심란함의 주 원인이기 때문이었다.

“-미안, 란도. 연습이 늦게 끝나서.”

막스가 책을 잔뜩 든 채 란도의 맞은편에 쏟아지듯 앉았다. 란도는 안경을 쓴 채 막스를 올려다봤다. 후드티 위의 짧은 머리카락이 여전히 젖어 있었다. 란도는 그가 어떻게 저 모든 과목을 다 들으면서 훈련까지 소화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듣자하니 지역 대회는 시험이 끝난 직후라는 것 같았다.
막스가 피곤하게 눈가를 문질렀다.

“대회 끝나면 쓰러져서 하루 종일 잠만 잘거야.”
“나랑 Cod 같이 하자며?”
“그것도 하고.”

그가 씩 웃었다. 부루퉁한 인상과는 달리 그는 의외로 잘 웃었다. 란도는 자면서 어떻게 게임을 하냐는 류의 바보 같은 농담을 던지곤 다시 책을 내려다봤다.
란도와 막스는 같이 듣는 과목이 꽤 많아서 함께 공부하며 모르는 것을 묻곤 했다. 그래서 요즘 둘은 도서관이 아닌 학교 밖 까페에서 만났다. 바람이 드는 야외테이블에 앉아 공부를 하다 보면 시험기간의 우울함도 좀 떨쳐졌으니까.
란도는 바닥이 보이는 머그를 보고 지갑을 꺼냈다. 막스의 커피도 사다줄 겸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그 때, 친숙하지만 반갑지는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막스.”

란도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언제나와 같이 요란한 - 팀 점퍼를 입은 덩치들과, 비싼 운동화와 청바지와, 디자이너 가방을 든 치어리더들을 포함한 - 한 무리의 스포츠맨 군단이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뒤에 오는 사람들은 신경 쓰지도 않고 멈춰섰다. 샤를이었다.
막스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가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웬일이야?”
“그냥, 공부하러 가는데 니가 보이길래.”

공부를 한다고? 란도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샤를은 어떤지 몰라도 그의 친구들은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았다. 한껏 차려입은 이들이 애매한 표정으로 샤를을 기다리고 있었다. 샤를이 특유의 친절한 - 즉 가짜 같은 -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손짓했다. 먼저 가란 의미였다.
왜? 그냥 쟤네랑 같이 가지? 란도는 실망한 얼굴의 치어걸들이 그를 붙잡아주길 기대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샤를은 친구들에겐 시선도 안 주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가 란도를 향해 활짝 웃었다.

“안녕, 란도. 잘 지냈어?”
“뭐, 덕분에.”

란도는 생각보다 비아냥대듯 튀어나간 말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지만 샤를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너희 자주 같이 있네. 공부 같이 해?”
“응. 같이 듣는 수업이 많거든.”
“샤를.”

막스가 짧게 이름을 불렀다. 놀랍게도, 그는 마치 경고하듯 샤를을 보고 있었다. 샤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림 같은 미소가 걷히고 입꼬리가 비틀렸다.
란도는 처음으로 샤를이 평범한 또래 남자애 같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샤를이 짜증스러움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뭐? 커피만 사주고 갈 거야. 뭐 좋아해, 란도?”
“어...안 사줘도 되는데.”
“그냥 사주게 해줘. 뭐 마실래?”

란도는 딸기 주스를 이야기했고, 샤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운터로 향했다. 막스는 묵묵히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진짜 이상하다. 란도는 샤프 끄트머리를 깨물었다.
곧 샤를이 음료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카페라떼와 딸기 주스였다. 독 탄 거 아냐?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란도는 문명인으로서 당연한 인사를 건냈다.

“고마워, 잘 마실게.”
“아냐, 사과 받는 셈 쳐줘.”

란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샤를이 부드럽게 웃어보이곤 막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의 손이 막스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평소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막스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들은 막스가 코웃음을 치더니 마찬가지로 조용히 뭐라뭐라 대답했다.
둘은 꼭 비눗방울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 후, 샤를은 막스의 등을 한번 툭 치곤 떠났다. 란도는 완전히 집중력을 잃고 막스를 쳐다봤다. 막스가 제 몫의 커피를 휘저으며 대충 설명했다.

“쟤랑 누가 성적 더 잘 받나 내기했거든. 맨날 하는 건데... 뭐, 잘 해보라 그랬어.”

란도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궁금한 건 그게 아닌데 물을 수가 없었다. 심란하게 눈을 굴리던 란도는 막스의 음료가 그의 복잡한 취향에 따른, 그러니까 샷을 두 번 추가한 라떼에 거품은 많이, 그 위엔 시나몬 가루를 산처럼 뿌린 바로 그 커피라는 걸 알아챘다.

묻지도 않고.

란도는 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교과서에 눈을 박았다. 어쨌든 그는 벨기에에서 돌아와 치르는 첫 시험을 잘 치러내고 싶었다. 르클레르와의 내기 같은 건 안했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

 
시험 기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란도는 카페인으로 혈관을 채우며 어떻게든 페이퍼를 써냈다. 그 동안 샤를은 몇 번 더 둘을 보러 와서 커피를 사주고 갔다. 감시하나? 감시당하는 건가? 란도는 정말 진지하게 의심하기 시작했으나 저항할 기력도 없었다. 샤를은 심지어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에게 인사를 하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란도는 어색하게 마주 인사하곤 호기심어린 시선들을 피해 자리를 떠야했다.
시험 마지막 날, 란도는 조지와 알렉스에게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그가 책을 사물함에 넣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쟤 늘 저랬어?”
“뭐가?”
“막스 친구들한테, 늘 저랬냐고.”

조지가 라커에 기대 삐뚜름하게 웃었다.

“막스 V가 항상 혼자였던 이유지.”

셋은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시험이 끝난 후의 복도는 어수선했다. 알렉스와 조지가 열심히 토론했다.

“그래도 작년엔 어떤 여자애랑 같이 다니지 않았어?”
“그랬지. 샤를이 산채로 씹어 먹어 버렸지만.”
“굉장히 위로가 된다, 얘들아.”

란도의 비꼼에 알렉스가 얼른 덧붙였다.

“아니, 걘 진짜 막스를 좀 좋아했잖아. 란도랑은 경우가 다르지.”
“그래, 니들은 친구니까. 결국 샤를도 아무것도 못할걸.”

란도가 의아함에 눈을 크게 떴다. 조지가 모호하게 허공에 손짓하더니 - 세상에, 란도는 저 제스쳐조차 싫어지고 있었다.- 짧게 설명했다.

“어쨌든 막스가 널 좋아하잖아. 걔가 뭘 할 수 있겠어?”

걘 무서워해. 조지가 상당히 함축적으로 말하곤 또 한 번 웃었다. 란도는 문득 파티날 잔디밭에서 봤던 샤를의 얼굴을 떠올렸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어울리지 않는 초조함과 절실함 같은 것들을.
무슨 말인지 명확히 모르면서도, 란도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납득했다.


주위가 다소 산만했음에도 시험 결과는 나쁘지 않게 나왔다. 란도는 무난한 점수를 받았고 막스는 그보다는 훨씬 나은 성적을 받았다. 란도는 가볍게 샤를과의 내기에서 이겼냐고 물었다. 막스는 잠깐 놀란 기색이다가 씩 웃었다. 당연하지, 풋볼팀 애들 맨날 노는 거 못 봤어?

하지만 막스는 해방되지 못했다. 대회가 코앞이라 쉬지도 못하고 연습에 매달려야 했던 것이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사라지는 일을 반복하는 와중에 막스는 란도에게 자기 대회를 보러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란도는 승락했다. 대회는 주말이었고 딱히 할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란도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미리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했다, 정말로.

“안녕.”

지역 수영센터의 객석에 앉아있던 란도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올려다보니 샤를이 대단히 비싸 보이는 자켓을 입고 미소 짓고 있었다. 란도는 혀를 깨물린 기분이 되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막스를 보러 오면 당연히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란도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대신 기꺼이 옆자리에 놓인 가방을 치워줬다. 샤를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서늘한 건물은 학교의 인기인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란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샤를이 말했다.

“즐기기 좋은 장소는 아니지, 안 그래?”
“근데 왜 왔어?”
“내기에서 졌거든.”

샤를이 짧게 웃었다. 란도는 곰곰이 생각하다 되물었다.

“그, 성적 내기?”
“막스가 너한테 말했어?”

아차. 란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가 또 버튼을 눌렀나 살폈지만 샤를은 그리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즐거움과 짜증이 섞인 시선으로 수영장을 내려다봤다.

“쟤는 가끔 승패가 뻔한 내기를 하고 싶어 해.”

란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심판과 코치들의 목소리가 웅웅 울리며 침묵을 메꿨다.
샤를이 문득 물었다.

“너희 둘은 만나면 뭘 해?”

란도는 그를 돌아봤다. 다시 본 샤를은 어딘지 어색한 웃음과 함께 그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라 정말 진짜 같았다.
그래서 란도도 솔직하게 답해주기로 했다.

“비디오 게임.”
“게임? 무슨 게임?”
“글쎄? 그냥 그때그때 할만한 거. 피파도 하고, 레이싱 게임도 하고... 이거 끝나면 콜 오브 듀티 하기로 했어.”

샤를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가 물었다.

“Cod? 나도 자주 하는데.”
“어, 진짜? 나 거의 맨날 해!”
“진작 알았으면 같이.....”

그 때, 객석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둘은 곧장 대화를 멈추고 수영장을 바라봤다. 어느새 선수들이 나와 몸을 풀고 있었다. 막스는 끝 레인에 서 있었다. 란도는 열심히 박수를 쳤다. 그는 이게 몇 m짜리 경주인지도 몰랐지만, 하여튼 그의 친구가 우승하기를 바랐다.

짧은 소개가 끝나고, 곧 휘슬이 울렸다.
첨벙, 물 튀기는 소리가 났다. 물거품이 빠르게 레인을 가로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스가 다른 애들을 앞서기 시작했다. 몇 십 센티, 곧 몇 미터.
그리고 또 한 번 휘슬이 울었다.

1위였다. 물 밖으로 나온 막스가 웃으며 한쪽 팔을 치켜들었다. 환호성과 박수소리와, 울리는 마이크 소리 사이에서 란도는 그의 친구를 향해 환호를 보냈다. 막스는 코치에게 뭐라고 외치고는 물을 나왔다. 그가 타월을 쥐곤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두 사람이 있는 쪽을 향해 멈췄다.
란도는 그가 그들을 찾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막스가 웃으며 이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멍청이.”

란도는 놀라서 샤를을 돌아봤다.
깎은 듯한 옆얼굴이 형언할 수 없이 부드러운 눈으로 막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시상식은 빠르게 끝났다. 란도는 성실한 친구답게 메달을 목에 거는 막스의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이 짐을 챙기는 동안 란도는 샤를과 전화번호와 게임 아이디를 교환했다. 사진 어플을 켠 김에 셀피도 같이 한 장 찍었다. 내가 뭐하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란도는 그냥 생각하기를 멈췄다. 내내 어색한 것보단 나으니까.

란도는 조지와 알렉스가 있는 대화방에 막스의 사진을 보냈다. 맥시가 우승했어! 코멘트와 함께 보낸 사진에 애들이 축하한다고 전해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란도는 샤를과 함께 찍은 셀피를 이어서 보냈다.

-샤를이랑 사진도 찍었어!
-와우.
-어...
-란도, 넌 정말...
-너 대체 거기서 뭐하는 거야?!

란도는 어깨를 으쓱 하곤 화면을 껐다. 옆에선 샤를이 막스의 연락처를 찾고 있었다. 저장된 이름은 당연하게도 그냥 '막스' 였다. 란도는 좀 환멸이 났다. 막스 V는 괜히 막스 V인 게 아니었다. 다른 대륙에 살다 온 란도도 아는 막스가 최소한 5명은 있는데, 좀 아닌 척이라도 좀....

란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샤를이 짧은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짐가방을 맨 막스가 나타났다.

“안녕.”

물기가 축축한 그의 얼굴은 아직도 시합의 흥분으로 붉게 상기돼 있었다. 란도는 활짝 웃으며 그와 포옹했다.

“축하해, 맥스!”
“고마워, 란도.”

막스가 씩 웃으며 란도의 등을 두드렸다. 그가 란도의 어깨에 팔을 감은 채 샤를을 돌아보았다. 샤를이 입꼬리를 올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쉽네, 금메달 못 땄다고 잔뜩 심술나있는 꼴이 보고 싶었는데.”
“웃기지 마, 샤를.”

막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란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한 번도 샤를이 저런 식으로 비꼬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둘은 그대로도 아주 편안해보였다. 샤를이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물었다.

“그래서 내 경기는 안 보러올 거야? 내 시합은 심지어 시험 후 첫 주말도 아니라고.”
“질 거 같으면 불러. 니 잘난 콧대가 부러지는 게 보고 싶으니까.”
“졸업할 때까지 못 부르겠군.”

그들의 풋볼팀은 지역리그에서 꽤 잘나가고 있었으므로 그건 꽤나 타당한 거만함이었다.
란도는 평소보다 훨씬 공격적으로 말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묘한 평온함을 느꼈다. 왠지 이게 진짜인 것 같다는 기분이었다.

셋은 센터 밖으로 향하며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 란도와 샤를이 Cod 아이디를 교환했다는 말에 막스는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어쨌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다 같이 게임이나 하자면서.
바깥 하늘엔 이미 석양이 지고 있었다. 느긋한 남부의 하늘에 주황빛이 어렸다. 막스가 란도에게 물었다.

“집까지 태워다줄까?”

그가 샤를의 멋들어진 페라리를 향해 손짓했다. 란도는 왜 그걸 네가 묻느냐는 질문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 차는 분명히 유혹적이었으나, 란도는 굳이....거기에 끼고 싶진 않았다. 아까 본 샤를의 옆얼굴만으로도 충분했다.
란도는 고개를 젓고는 손을 흔들었다.

“아냐, 택시 타고 갈게. 학교에서 봐!”
“그래 그럼. 잘 가!”

샤를과 막스가 나란히 손을 흔들었다. 란도는 훌쩍 택시에 올라탔다.
창문 밖에서 둘은 조금 거리를 두고 웃고 있었다.


-


놀랍게도 그 후 란도는 샤를과 종종 메시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막스가 어디있는지 아냐는 질문이었는데, 대화는 점점 길어지더니 cod 이야기와 사소한 인터넷 밈을 주고받을 정도가 되었다. 친구들은 막스의 친구타이틀을 달고 샤를과 연락하는 란도를 조금 미친 사람 취급했다.

“너 완전히 그 '복잡한' 관계 속에 끼어버렸구나.”
“그런 거 아냐. 그냥...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안 그래?”

란도는 그냥 머핀을 낼름 입에 넣었다. 에스테반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피에르가 있었다면 당장 뜯어 말렸을 텐데.”
“뭔 소리야?”
“적어도 넌 선택할 수 있잖아. 피에르는 5살 때부터 샤를의 친구였고 중학교 내내 수영부였다고. 그러니 꼼짝없이 고통 받을 수밖에.”

란도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뭐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진 않던데? 그는 친구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기로 결정 하곤 말을 이었다.

“어쨌든, 오늘 저녁에 막스랑 샤를이랑 같이 게임하기로 했어. 끼고 싶은 사람?”
“난 바빠.”

조지가 말끔하게 거절했다. 알렉스마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에스테반, 너는?”
“난 비디오게임 안 좋아해.”

란도는 눈을 깜빡였다. 진짜일까? 란도는 그의 친구들이 Cod를 거절하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변명이래도 또 할 말은 없었다. 어쨌든 걔들 둘은 확실히 좀.... 이상했으니까.
뭐, 게임이야 셋이서 하면 되지. 그는 별 생각 없이 남은 요거트를 퍼먹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란도는 막스 V가 엄청난 배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란도는 양해를 구하는 막스의 문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어딜 가야 해서 컴퓨터를 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란도는 별 수 없이 디스코드에 대고 말했다.

“막스는 일 있어서 못 온대. 그냥 둘이 할래?”

란도는 잠깐 샤를이 거절해주기를 바랐다. 아무리 주기적으로 연락한다지만, 샤를은 아직 둘이서 뭘 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샤를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란도는 별 수 없이 방을 팠다.

게임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샤를에 대한 편견(풋볼팀-파티광-쿼터백은 어쨌든 비디오 게임과 가까워 보이는 호칭은 아니었다) 과는 달리 그의 실력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둘은 몇 시간을 같이 웃고 떠들며 게임을 했다. 란도는 어느새 그와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잠깐의 쉬는 시간에 샤를이 물었다.

“막스는 이 게임 잘해?”

란도는 의미를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희 같이 게임해본 적 없어?”
“응. 우린 이런 건 같이 안 하거든.”

샤를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란도는 또 다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뭘 하는데?”
“글쎄.”

짧은 한숨이 들렸다. 란도는 순간 뭔가 성적인 이야기가 나올까봐 긴장했다. 그건 그가 진짜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어 나온 말은 다소 의외였다.

“싸움, 경쟁. 가끔 버거를 먹으러 가기도 하고, 드라이브도 해. 걔가 내 파티에 오면, 술도 같이 마시지.”
“......”
“하지만 친구는 아니야.”

란도는 갑자기 복잡하다는 말의 뜻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그는 그가 아는 무슨 단어로도 그런 관계를 정의할 수 없었다.
샤를이 냉소적으로 웃었다.

“뭐, 우린 애초에 좋은 사이로 시작한 건 아니니까.”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웃음소리가 났다. 란도는 화면을 의미 없이 클릭하며 샤를의 말을 기다렸다. 샤를의 목소리는 학교에서와 달리 낮았고 그건 그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고 느껴지게 했다.
짙은 목소리가 느른하게 말했다.

“그래서 걔 친구들을 보면 과민반응하게 되나 봐. 내가 못 가진 거라.”

란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음질 낮은 마이크 너머로, 학교의 모두에게 사랑받는 왕자님이 세상에서 제일 기묘한 고백을 뱉었다.

“난 걔의 모든 게 되고 싶어.”
“......”
“좀 이상하지, 안 그래?”

란도는 침묵했다.
 

-
 

사랑이 뭘까?

란도는 구글에 검색하고, 어반 딕셔너리에 검색하고, 심지어 레딧과 트위터에도 검색했다. 수만 건의 메시지는 내용이 천차만별이었다. 란도는 불만스런 신음을 내며 화면을 껐다. 드라마는 하여간 그의 전공 분야는 아니었다.

등교시간이었고 란도와 친구들은 운동장 펜스에 기대 노닥거리고 있었다. 란도는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턱을 괬다. 어제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지만 밤새도록 란도를 심란하게 했다.
그러니까 걔들은 '무언가' 였다. 뭔가 벌어지고 있는데 당사자들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데이트 비슷한 걸 하지만 가끔은 적이고, 친구는 아니지만 어깨에 기대 웃을 수 있는 사이라는 게 -.

“말도 안 돼.”

조지가 갑자기 말했다. 란도는 퍼뜩 고개를 들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매끈한 차에서 막스가 내리고 있었다. 평소에 그가 몰던 애스턴 마틴이 아닌 낯선 차였다. 그가 웃으며 안에다 대고 뭐라고 말하자 운전석에 있던 남자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란도는 남자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사람, 다니엘 리카도잖아?”
“기억하네?”
“어떻게 기억을 못 해.”

란도는 놀란 눈으로 곱슬머리와 선글라스를 낀 남자를 쳐다봤다.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다니엘 리카도는, 뭐랄까, 정말 존재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포츠라면 뭐든 잘했고, 춤도 잘 췄고, 엄청나게 유쾌했다. 심지어 썩 그럴듯한 외양까지 갖고 있어서 애들은 누구나 그를 좋아했다. 란도가 아직도 다니엘을 기억하는 이유도 그거였다. 란도 본인도 그를 꽤 좋아했으니까.

그가 막스와 친했던가? 란도는 어렴풋이 다니엘이 막스와 같은 동네에 살았었다는 걸 떠올려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란도가 아는 한은, 그 둘은 달리 교류가 없었다.
하지만 또 놓친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다니엘은 환하게 웃으며 막스에게 농담을 했고 막스는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를 쳤다. 더없이 친밀한 태도였다.
그리고 란도는, 본능적으로, 풋볼 팀 애들이 모인 계단을 돌아봤다.

그리고 처음 보는 샤를과 마주했다.

샤를은 완벽하게 표정이 없었다. 차가운 시선이 영상을 보듯 주차장의 풍경을 담았다. 막스가 다니엘에게 손을 흔들고, 다니엘이 다시 차를 몰고 떠나는 내내 똑같았다. 피에르가 샤를의 팔을 잡고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샤를은 무서운 눈으로 란도 쪽을 한번 노려보더니, 피에르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멀어졌다.
어, 왜? 란도는 휙 고개를 돌렸고, 그제야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막스를 발견했다.

“좋아.”

조지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진짜 복잡해졌네.”

란도는 좌절하며 다가올 재앙을 기다렸다.

 

-


막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늘 앉던 교실 뒤편에 앉았다. 그의 옆에 앉은 란도는 참다못해 질문했다.

“다니엘 리카도랑 어떻게 알아?”

막스가 눈을 크게 떴다. 잠깐 망설이던 그가 뺨을 긁적이며 느리게 대답했다.

“댄은 친구야.”
“......”
“댄도 풋볼을 했는데, 중학교 때 러닝 시간이 겹쳐서 친해졌어. 가끔 집까지 태워다 주기도 했고.”
“근데 아까는 어쩌다 둘이서 같이 온 거야?”
“어....사실 어제 댄네 집에서 잤거든. 댄이 방학이라고 내려왔고 마침 우리 집도 비어서. 같이 저녁 먹고, 피파 하고... 알지?”

란도는 인상을 찌푸렸다. 막스의 말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명백히 그 이상의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었다. 란도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비슷했다.
란도는 새파란 눈을 굴리다 결국 내뱉었다.

“하지만 샤를이 널 봤어.”

막스의 얼굴에 곧장 불편한 기색이 어렸다. 그가 초조하게 옷소매 끝을 매만지더니 란도를 향해 말했다.

“뭐, 친구 집에서 잘 수도 있는 거니까.”

그건 꼭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란도는 막스와 다니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냥 어깨를 으쓱 하고는 교과서를 폈다. 막스도 다시 고개를 돌렸다. 수업시간 내내 옆자리에선 불안하게 샤프 딸깍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란도는 조지와 알렉스를 만나 까페테리아로 향했다. 막스는 질문할 게 있다고 교실에 남았기 때문에 셋은 이야기할 짬을 낼 수 있었다. 란도가 막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주자 조지가 코웃음을 쳤다.

“그 둘은 분명 뭐가 더 있었어.”

그가 빠르게 말했다.

“막스 V는 한동안 매일같이 풋볼 훈련장에 드나들었거든. 같은 차타고 집에 가고, 같이 타고 오고. 학교에 소문이 쫙 돌았지.”
“친구일 수도 있잖아?”
“글쎄, 친구끼리 허리에 손을 얹고 다니진 않는다고 봐. 아무리 '그' 다니엘 리카도라도.”

란도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세상에, 다니엘 리카도에 샤를 르클레르라니. 그가 없는 사이 그의 친구는 정말 영화 같은 학창시절을 보낸 모양이었다.
알렉스가 조용히 덧붙였다.

“물론 막스가 인정한 적은 없어.”
“왜?”
“알잖아, 그 집 분위기. 아들이 누구랑 데이트하는지 알면....”

란도의 머릿속에 험악한 다른 베르스타펜의 얼굴이 스쳤다. 물론 그렇겠지. 란도는 한숨을 쉬었다. 문득 샤를과 막스에 대한 그, 모든 모호한 표현들과 알고도 침묵하는 분위기가 그들의 복잡함 때문만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까페테리아에 들어서서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풋볼 팀 테이블엔 샤를이 없었다. 세 친구는 같은 생각을 하며 눈빛을 교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스가 들어왔다.
수군거림 속에서도 막스는 묵묵히 음식을 사서는 그들에게 다가왔다. 샤를의 부재를 눈치 챈 막스의 표정이 더욱 불편해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란도의 맞은편에 앉았다.
막스를 뺀 셋은 정말 아무소리나 하며 떠들었다. 어색함을 날리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한창 포트나이트가 왜 재미없는지에 대해 토론하는데 에스테반과 피에르가 다가왔다. 피에르는 오늘따라 대단히 피곤해보였다.

“안녕, 얘들아.”

피에르가 조지 옆에 접시를 내팽개쳤다. 평소의 친절한 피에르가 아닌, '냉소적이고 통렬한' 버전의 피에르였다. 그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혹시 샤를이 화장실 칸에서 섹스하는 거 보면 알려줘.”

알렉스가 먹던 사과를 떨어뜨렸다. 란도는 입을 쩍 벌렸다. 반면 조지는 태연했다.

“샤를 못 찾았어?”
“응. 교실에서 못 봤어?”
“우리도 수업 안 겹쳐서.”

피에르가 벙찐 표정의 란도에게 친절하게 설명했다.

“샬은 열 받으면 미친 짓을 벌이는 경향이 있거든. 눈에 뵈는 게 없어서.”
“......”
“그리고 걔는 여기서 말 그대로 뭐든 다 할 수 있고.”

무슨 뜻인지 너무나 와 닿았다. 그러니까, 대체 이 학교의 누가 잠깐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자는 샤를 르클레르를 거절하겠는가?
란도는 슬쩍 막스를 바라봤다. 침묵하는 막스의 미간에는 엄청나게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음식이 반은 남은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먼저 간다.”

그리고는 거친 발걸음으로 식당을 나갔다.

란도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애매하게 물었다.

“나 따라가야 해?”
“그게 저기 끼인 사람의 의무란다, 란도.”

에스테반이 냉정하게 말했다. 피에르는 삐딱하게 앉아 토마토를 입에 넣었다. 난 할 만큼 했어.
알렉스가 란도에게 물었다.

“어디 있을지 알 것 같아?”

란도는 잠깐 기억을 뒤지다 고개를 끄덕였다. 피에르가 조소했다.

“팀에 합류한 걸 환영해.”

란도는 질색을 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


목적지는 학교 실내 수영장이었다. 란도가 그렇게 확신하는 건 전에 봤던 문자 때문이었다. 둘은 그곳을 그들만의 밀회장소 같은 걸로 쓰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막스가 늘 훈련을 하는 수영장에 한발 늦게 도달했다. 진심으로 그의 친구가 걱정 됐지만 들키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 뿐인 듯 했다.

“-그래서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복도까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란도는 기겁을 해서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샤를과 막스는 수영장 앞에 서 있었다. 불이 꺼지고 푸른 불빛만 들어온 수영장은 신비롭게까지 보였지만 감상하기엔 울리는 고함소리가 너무 컸다.

“너 이러는 거 진짜 지긋지긋하다고! 란도 때도 그러더니 지금 또-”

그래. 또 별로 즐겁지 않은 맥락에서 언급되는군. 란도는 그 와중에도 생각했다.
샤를이 마주 소리쳤다.

“란도랑은 얘기가 다르잖아! 걘 그냥 친구지만 댄은, 너 진짜 똑같다고 생각해?!”
“뭐가 다른데? 댄도 그냥 친구야!”

샤를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넌 댄이랑 잤잖아.”
“아, 그런 식으로 해보잔 거야? 네가 잤던 사람들 전부 읊어줘?”
“걔들은 아무도 아니야!”
“댄도 마찬가지야!”

둘이 잠시 씩씩대며 서로를 노려봤다. 샤를은 꼭 당장이라도 막스의 목을 조를 것처럼 보였다. 그가 씹어뱉듯 말했다.

“아니. 다니엘은 네 첫사랑이야. 아닌 척 하지 마.”
“......”
“그가 반년도 안 되서 널 차버렸다고 그 사실이 바뀌진 않아.”

막스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란도는 순간 막스가 샤를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는 매일 케틀벨을 하는 친구의 주먹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막스는 샤를을 아프게 하는 법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막스가 그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니가 뭔데? 넌 내 뭣도 아니잖아.”

세상에, 맥스! 란도는 좀 울고 싶어졌다. 아무리 다혈질이라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됐다. 그의 사랑하는-혐오하는-친구는 아닌- 뭐 그런 사람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순 없었다. 샤를의 눈 안을 스친 명백한 상처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란도는 진지하게 싸움을 말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샤를이 막스의 멱살을 잡아당겨 키스했다.

입술이 부딪히는 정도의 키스가 아니었다. 혀가 열정적으로 뒤섞이고 손이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막스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질끈 감고는 샤를의 목에 팔을 감았다. 수백 번이나 해왔던 것처럼 익숙하게.
키스하며, 샤를이 막스를 급하게 벤치에 밀어 눕혔다. 짧게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가쁜 숨소리 속에서 샤를이 속삭였다.

“그럼 이건?”

그가 막스의 어깨를 폭력적으로 짓누르고 목에 입술을 묻었다.

“이건 뭐야, 맥시?”

란도는, 정말 가까스로 몸을 돌렸다. 너무 놀라서 입도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조금 열려있던 문을 닫았다. 작게 달칵이는 소리가 났지만 안에 있는 이들은 너무 바빠서 듣지 못할 것이었다.
세상에. 그는 드디어 피에르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했다.
 

-

 
최소한 화장실은 아니었어. 란도의 메시지에 피에르가 엄지손가락을 올린 이모지를 보냈다. 이게 무슨 뜻이지? 다행이다? 힘내라? 고민하는 동안 조지가 다정하게 물었다. 문은 잠궈 줬니?
란도는 진심을 담아 답장했다.

-아니. 남들도 다 봤으면 좋겠어. 그럼 내 충격도 좀 나아질 것 같아.

그의 말에 에스테반과 알렉스가 웃음소리를 가득 찍어 보냈다.
란도는 울고 싶어졌다.


-

 
학교는 다시 거짓말처럼 평화에 잠겼다. 시험도 특별한 행사도 없는 기간이라 애들은 느긋하게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 타코집에 가잔 이야기를 했다. 잠깐 동안의 드라마는 작은 소문으로 남아 애들 사이의 또 다른 비밀이 됐다.
이른 오후, 란도는 혼자 듣는 수업을 마치고 나와서 운동장으로 향했다. 스탠드에 앉아있던 막스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란도, 여기야!”

그가 가방을 치워 란도에게 자리를 내줬다. 란도는 막스의 옆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라운드에선 풋볼팀이 열정적으로 연습을 하고 있었고, 막스의 옆엔 독일어 숙제가 널브러져 있었다. 의아한 시선에 막스가 불만스런 신음을 냈다.

“숙제가 산더미인데 할 시간이 없거든.”
“왜 없어?”
“저녁에 쟤네 집 가야 돼서.”

아. 란도는 그제야 오늘 저녁이 샤를의 집에서 파티가 열리는 날이라는 걸 깨달았다. 막스가 짜증스럽게 풋볼 연습을 보고 있는 것도 그래서인 모양이었다.
란도는 꽤 오랫동안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어떻게 매주 거길 가는 거야? 너 통금 있지 않아?”
“학교 애들이 전부 간다고 하니까 나도 보내주던데?”

아. 란도는 비로소 그 요란한 파티의 목적을 깨달았다. 어쨌든 또래들 누구나 다 참여하는 행사라는 건 어른들을 납득시키기 좋은 이유였다. 란도는 샤를의 그 어마어마한....어떤 것의 무게에 고개를 내저으며 막스를 바라봤다.
막스는 평소랑 똑같았다. 청바지에 평범한 스웻 셔츠를 입고 숙제에 몰두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제일 유명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엔 전혀 극적인 요소가 없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아마 반대편에 있는 애가 너무 드라마틱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막스가 문득 말했다.

“난 사실 풋볼이 뭐가 재밌는지 모르겠어.”
“와, 맥스. 그거 진짜 반사회적인 말이다.”
“맞잖아. 정신없고, 험악하고, 뇌진탕이나 걸리는데.”

그가 부루퉁하게 내뱉었다. 란도가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그런 소릴 하기엔 니 연애인생에 풋볼 선수가 너무 많은걸.”

막스가 휙 고개를 돌렸다.

“뭐-”
“란도!”

저쪽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다가왔다. 헬멧을 벗은 샤를이 란도를 향해 시원스럽게 웃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미소였다. 잘생기긴 했어. 제정신이 아닌 점이 문제지. 란도는 별수 없이 인정하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샤를.”
“이따가 우리 집 올래? 조지랑 알렉스도 온다는데.”
“음, 아니.”

단호한 거절에 막스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제발, 란도. 그냥 와서 나랑 앉아있다 가면 안 돼? 술 취한 놈들이랑 얘기하기 싫다고.”

네 섹스하는 사이인 원수랑 노는 건 어떨까? 란도는 진지하게 생각했으나 신실한 친구답게 입을 닫았다. 샤를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꼬았다.

“술 한 잔 하면서 새 친구라도 좀 사귀어 봐. 네가 친구 만드는 데 소질이 없는 건 잘 알지만.”
“엿 먹어, 샤를.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꼭 나 때문인 것처럼 말한다?”

샤를이 천사처럼 웃었다. 반박할 의지마저 꺾어놓는 표정이었다. 막스가 노골적으로 얼굴을 구기더니 란도에게 다시 질문했다.

“그럼 주말에 놀러올래? 댄이랑 같이 놀건데.”

란도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댄? 다니엘?”
“어. 나랑 샤를이랑 댄네 집에 가기로 했거든. 같이 피자도 먹고, 피파도 하고.”

란도가 커다란 눈으로 샤를을 올려다봤다. 샤를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 했다.

“내가 말 안했나? 나도 댄 꽤 좋아해. 같은 팀일 때 자주 놀았거든. 지난 여름엔 여행도 같이 갔어.”
“뭐, 너희 둘 다 피파는 끔찍하게 못하니까. 동질감이 들었겠지.”

막스가 킥킥 웃었다. 그러곤 덧붙였다.

“댄한테 란도 네 얘기도 했는데 완전 좋아하더라. 너랑도 친해지고 싶다고 했어. 갈 거지?”

란도는 문득 자신의 학교생활을 되돌아봤다.
벨기에에서 돌아오던 날, 그는 그저 평화롭게 수업을 듣고 조용히 학업을 마치기만을 바랐다. 다소 너드같은 자신의 친구들과 부리또나 먹으면서, 그가 질색하는 무도회나 파티와는 관계없는 삶을 살겠노라고.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는 복잡한 일에 끼지 말라는 친구들의 조언을 무시한 것을 진지하게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한 명은 그의 옛 친구였고 그의 상대는 학교 애들이 다 아는 빌어먹을 쿼터백이었다. 게다가 이젠 둘 다 란도의 게임친구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점이 이 미친 제안을 정당화해주는 건 아니었다. 막스와 샤를은 기대감을 품고 란도를 보고 있었다. 표정이 똑같아서 더 짜증이 났다.
란도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싫어.”

 

-

 

어느 비 오는 날에 란도와 막스는 막스의 셔츠로 머리 위를 감싸고선 도서관 앞 차양에 서 있었다. 때 이른 비는 추위를 불러왔고 둘은 좀 더 가까이 붙어 온기를 나눴다. 비가 세차게 내려 자동차 보닛을 마구 두드렸다.
막스가 문득 말했다.

난 걜 좋아해. 

란도가 그의 친구를 올려다봤다. 빗물이 막스의 어깨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걔를 몰랐던 때가 어땠는지 기억도 안나. 내 인생에 걔가 없었던 적이 없는 것 같아.

란도는 대답 없이 물웅덩이를 내려다봤다.
저 둘은 복잡하고 이상했다. 일생동안 좋아하고 미워하고, 죽일 듯이 다투다가 같이 웃었다.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상대에게만 집중되다가 이내 모든 것이 되었다.
그게 사랑 아닌가?
란도는 혼자서 질문했다.

그가 제 친구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걔도 그럴 거야, 막스.

멀리서 우산을 쓴 샤를이 다가오고 있었다. 급히 다가오던 그가 비에 젖은 생쥐꼴인 그들에게 노골적인 비웃음을 보냈다. 막스는 인상을 찌푸렸고 란도는 깔깔 웃었다.
축축한 발자국이 아스팔트 위에서 뒤엉켰다.

 


+++

 

란도는 마이크를 입가에 댔다. 보이스 채팅에는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러 온 친구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막스와 샤를은 바다를 보러 간다나, 아무튼 그래서 없었다. 그닥 자세히 알고 싶진 않았다.
그들은 함께 로켓리그를 하다가 피에르가 전화를 받으러 가는 동안 휴식시간을 가졌다. 슬프게도, 란도는 그 전화의 상대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다.

“샤를이지?”

란도의 물음에 돌아온 피에르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응. 어떻게 알았어?”
“막스한테서 문자가 왔으니까.”

란도는 깜빡이는 메시지탭을 들여다봤다. 대충 그 새끼가 너무 싫고 언젠간 코를 부러뜨려놓겠단 내용이었다. 이 꼴을 본지도 어느덧 꽤 시간이 지났으므로 란도는 답장도 하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이럴 생각일까?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조지가 물었다.

“걔들 결국 어떻게 될 거 같아?”
“저러다 질리지 않을까? 중학교 땐 진짜 하루도 안 빼고 싸웠잖아.”
“그 때도 그러다가 잔 거 아냐?”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란도는 더 상상하기 싫어져서 입을 열었다.

“글쎄, 난 걔들이 서로 꽤 좋아한다고 생각해.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래.”
“근데 왜 안 사귀어?”
“그 정도면 사귀는 거 아냐?”

알렉스의 혼란스런 물음에 에스테반이 몹시 대범한 의견을 내놨다.

“난 걔들 결혼할 것 같아.”
“뭐?”
“아무튼 결혼할 수는 있잖아, 법이. 그렇지 않나? 대학 가자마자 결혼할걸.”

피에르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말 싫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네.”
“미리 정장 준비해야겠다, 피에르. 넌 분명 어느 쪽이든 신랑 들러리일 테니까.”

조지의 말에 피에르가 뭐라고 불어로 욕을 했다. 란도는 친구들과 함께 깔깔 웃었다.
어쨌든, 그 둘은 평생 서로에게 지루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생각하던 란도가 무의식중에 말했다.

“맞다, 나 어제 복도에서 엄청 잘생긴 애랑 부딪혔다? 억양은 좀 스페인계 같았는데, 머리는 갈색이고 축구팀 저지를 입었고....”
“카를로스 사인츠?!”
 
알렉스가 비명처럼 말했다. 란도가 조금 놀란 채 대답했다.

“응. 그런 이름이었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 란도?”
“계속 미안하다고 그러길래, 복도에 서서 얘기 하다가, 다음 주에 같이 점심 먹기로 했는데....”
“오, 래니.”

조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테반은 이미 숨이 넘어갈듯 웃고 있었다. 란도는 조금 짜증이 나서 되물었다.

“왜?!”
“걔는 카를로스 사인츠 주니어야. 우리보다 한 학년 위고, 축구팀 주장이고, 문자 그대로 학교의 절반이 걜 노리고 있지.”
“맞아. 샤를은 좀 '그러'니까.”

조지가 알만하지 않느냐는 코웃음을 쳤다.

“엄청 잘생겼잖아. 시장에 나와 있고 말이지.”
“다음 주에 또 난리가 나겠네. 이제는 하다하다 사인츠 주니어랑 점심을 먹는 랜도 노리스-.”

알렉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란도, 넌 진짜 학교생활 흥미진진하게 하는 데엔 뭐 있다.”

란도는 몹시 억울해졌다.

 

 

Notes:

*그래도 하이틴 여주인공 재질은 4라고 생각합니다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