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안방 손님과 아버지
내 집으로 이사 온 태형의 짐들은 다행히 많지 않았다. 나는 한 때 마리아와 함께 쓰던 옷장과 신발장에 들어서는 태형의 옷과 신발들을 구경했는데, 어쩐지 대부분이 명품이라고는 잘 모르는 나도 들어본 적이 있는 유명 브랜드의 것들이다. 그래 뭐, 달리 취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가진 옷도 크게 많지는 않으니 이왕 입는 데에 투자를 하는 타입인가보지. 직업도 사람을 만나는 일이니 좋은 옷을 입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고. 그러나 관리실에다 차가 한 대 더 들어올 거라고 신고를 하고 난 뒤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오던 그의 차를 보고서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 …독일제 프리미엄 세단, 그 중에서도 억대를 호가하는 하이엔드 라인. 뭐야, 돈 많잖아?
‘이렇게 좋은 차가 있었으면 나도 좀 태워주지 그랬냐.’
‘최 대표님은 타신 적 있었는데… 지금 잠깐 드라이브 갈래요?’
‘됐다. 어디 긁힐까봐 겁난다.’
태형이 무슨 죄라도 지은 마냥 내 뒤를 따라오며 변명했다. 제 차, 2년 동안 돈 모아서 산 거예요. 노래방 도우미 할 때. 그의 말에 내가 으악스럽다는 듯 돌아보자 그가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꽤 잘 벌었었거든요. 그 땐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으니 달리 돈 나갈 일도 없었구요. 그의 말에도 내 미간이 쉽게 펴지지 않는 까닭은 지금 그의 연봉으로 저 차를 사기에 2년은 택도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냥 잘 번 것도 아니고 엄청 잘 벌었네. 사실 잠깐 그가 카푸어같은 놈팽이가 아닌가 쎄한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대출도 아니고 모아서 저걸 샀다…라. 유흥 업계 종사자라도 이 정도 벌었으면 쉽게 포기할만한 벌이와 커리어가 아니었을 텐데, 그는 왜 우리 회사에 들어온 것이며 돈도 많으면서 왜 내 집에 얹혀 살려는 것일까. 역시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놈이 아니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태형이 애교스럽게 히히 웃으며 손깍지를 껴오는데 그래 뭐, 돈이 많건 없건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하미는 이제 태형의 방문이 익숙한 모양이다. 나로써 태형과의 동거가 내 방을 무상으로 내어주는 나의 손해만이 결코 아닌 것은 그가 하미를 돌보는 데 타고난 엔터테이너이며, 하미 또한 그를 잘 따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둘 다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으니 대부분의 스케줄이 겹치겠지만 육아라는 업무의 일부, 실은 절반 가량을 하미와 좋은 유대 관계에 놓인 그에게 자연스럽게 토스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하미를 좋아하긴 하지만 재미있고 다정한 보호자가 되기보다는 그 애가 바르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엄격하게 양육하는 입장이니 하미가 나보다 태형을 더 잘 따르더라도 어쩔 수 없겠지.
하미를 재우고 그 애 방을 나오면 밤 열 시 반, 나는 방문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닫고는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눈을 반짝이는 태형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누히 말했지만 방음 잘 안 돼. 여기선 꿈도 꾸지 말라고… 내가 하미를 재우는 사이에 샤워를 한 것인지 그의 젖은 머리칼 끝을 매만지자 그가 눈꼬리를 휘며 뺨을 내 손바닥 안쪽으로 부벼온다. 진짜 부모가 된 기분이에요. 손바닥 안쪽으로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이어 쪽, 쪽 맞춰오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렇게들 동생을 만들어 주곤 하잖아요? 커다란 눈으로 올려다보며 하는 말에 나는 허, 하고 헛웃음을 치며 그의 뺨을 장난스럽게 꼬집었다.
평소에는 다 벗고 잔다는 태형은 일곱 살 숙녀분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비하여 얇은 재질의 티셔츠와 면 반바지 하나를 걸치고서 내 등을 품 안에 가득 안고는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이젠 완연한 가을 날씨이지만 그의 체온이 높은 탓에 에어컨까지 다시 틀었건만 슬슬 땀이 베어나온다. 그와 같이 잘 때면 늘 몸이 통째로 삶아지는 것만 같다. 기절하듯 설핏 잠들었다가도 그의 작은 움직임에조차 깨버리는 나를 이 녀석이 알기는 할까. 더워서 좀 밀어내면 덩쿨처럼 내 몸을 감아오는 팔과 다리에 덥다고 우는 소리를 내도 도통 일어나질 않는다. 지친 한숨을 푹 내쉬면 그의 무의식이 미안하다고 말하는 듯 내 티셔츠 안쪽으로 들어온 손이 배를 슬슬 쓰다듬었다.
잠을 얼마나 설쳤는지, 팔을 뻗지 못하여 핸드폰으로 시간도 확인할 수 없으니 다시금 눈을 떴을 땐 아직 어두운 창 밖으로 미루어 새벽 몇 시로밖에 막연히 생각되었다. 월요일이라 출근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잠을 설쳐서야… 차라리 그와 모텔에서 잘 때가 나았다. 섹스 몇 번 거하게 하고 나면 탈진할 정도로 지쳐서 몸이 엉켜도 세상 모르고 잤었는데. 야속한 놈… 물론 내 말에 복종하는 모양새가 기특하긴 하지만 네가 무슨 하미 동생을 만들겠다는 건데. 12세 이용가 수준으로 맞춘 굿나잇 뽀뽀는 나만 아쉬웠나. 하미를 생각해서 안된다고 먼저 못 박아둔 건 나였지만 지금은 바야흐로 감성의 시간, 애인의 품 안에서 잠을 설쳐 예민해진 자에게 남아있을 이성 따위는 없었다. 괜히 그리 된 것이 아니라 건강한 남자라면 당연하게도 기립한 그의 분신이 내 엉덩이 아래로 단단히 존재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잠든 사람을 상대로 의심이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깨버린 사람은 영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그를 자극하지 않도록 몸을 슬쩍 떼어내보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능청스레 다시금 아래를 붙여오는 것이 꼭…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만 돌려 그를 살펴보니 딱히 의식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저 두기에 엉덩이를 찌르듯 끝을 문지르는 것이 이 또한 본능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손을 아래로 더듬어 찌르는 것을 내리려는데, 손바닥 안쪽에 닿은 부분이 아니나 다를까 날 것의 귀두였다. 내가 모를 때 벗어버렸나? 찬찬히 더듬어 올라가는데 그게 아니라 말려 올라간 반바짓단 아래로 튀어 나온 것이었다. 괜히 내 걸 빌려줬나, 긴 바지로 줄 걸 그랬네, 후회를 하던 찰나에 내 손이 닿았던 걸 느끼기라도 했는지 그가 편안한 숨을 내쉬며 내 손을 가볍게 그러쥐고는 부드럽게 슥슥 움직이기 시작했다.
변태. 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가볍게 피스톤질을 해주자 그의 낮은 신음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자기야… 잠꼬대처럼 웅얼웅얼 뱉으면서도 그의 귀두 끝을 문질러주던 손가락이 쿠퍼액으로 젖어들기에 이렇게 금방 반응하는가, 그 또한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 모르겠다. 손가락 끝에 묻은 찐득한 액을 그 위로 문지르면 그 육중한 것이 기분 좋다는 양 꺼떡이는데, 이것이 지금 그가 의식이 있는 상태인데도 자는 체를 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난 내 의사를 나름 다 밝혔다고 생각하는데도 자는 체를 할 거면 그래, 계속 해라. 힘이 풀린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뻗었던 손을 빼려하자마자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배를 쓰다듬던 뜨거운 손이 내 바지춤 안쪽으로 능청스레 비집고 들어왔다. 그럼 그렇지.
그는 마치 내가 얼마나 달아오른 상태인지 확인하듯 내 페니스부터 손 끝으로 길게 쓸고는 끝 부분을 제 것처럼 조물조물 매만지기 시작했다. 이걸 자던 중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말하진 않겠지, 내 거니까. 반쯤 서 있던 상태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집요하게 매만지니 으, 하고 작게 신음이 터지며 허리가 자연히 꺾였다. 그가 힘을 주어 고간 위를 지긋이 짓누르는 탓에 뒤가 밀착되어 엉덩이 사이로 그가 선명히 느껴지고, 이 노골적인 개수작에 참다 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는 척은.”
“왜 안 자요?”
“네가 찔러서 깼잖아.”
내 투덜거림에도 그는 개의치 않으며 본격적으로 내 페니스를 쥐고서 부드럽게 흔들기 시작했다. 반바지 안쪽에서 불룩 불룩 움직이는 모양이 적나라하다. 빠르게 올라오는 오르가즘에 작게 헐떡이다 앓는 소리를 내자 그도 흥분되는지 고간으로 쿡쿡 찌르며 내 귓가에 나른하게 속삭였다.
“자기 혼자 만질 때도 예뻤는데…”
여기, 흥분하면 끝부분부터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나 보면서 엄청 쏟아냈잖아요. 허벅지 파르르 떨리던 거랑, 야하게 일그러지던 표정이랑, 조금 훌쩍이던 것까지 다 기억나요. 나도 여기서, 이 침대에서… 자기 가는 거 보고…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태형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로 웅얼웅얼 쏟아졌다. 혼자 하는 걸 보여준 적이라면 일본 출장 갔을 때를 말하는 거겠지… 내 마음을 알렸던 그 날, 하필 영상 통화로만 볼 수 밖에 없었던 그 때의 감정이 다시 떠올랐는지 그가 상체를 살짝 일으키더니 내 턱을 잡고 살며시 돌려 입술 사이로 파고 들어왔다. 나도 그를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이면 주체할 수 없는 그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매번 이런 식이지만 싫지 않다. 혀가 깊숙히 얽히면 분위기는 금방 녹진해지고, 몇 번이나 입술을 쪽, 쪽 소리를 내며 맞대고 나면 잔뜩 달아오른 잘생긴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그가 땀으로 젖어 얼굴에 붙은 내 머리칼을 쓸어주었고 나는 발을 들어올려 그의 반바지춤을 잡고서 살며시 끌어내렸다. 여전히 어쩔 줄 몰라하며 난처해 하는 것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나는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입술 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동생 만들어 주자며. 작게 속삭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 허벅지 한 쪽을 잡고서 들어 올렸다.
이제는 섹스까지 물 흐르듯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늘 손 닿는 곳에 젤과 콘돔이 있고, 그를 안으로 들일 때도 처음만 잘 참으면 그 뒤로는 별 탈 없이 그를 받아들이기가 가능한 수준이다. 사방이 고요한 새벽의 집 안, 나는 소리를 잘 못 참는 편이니 오늘은 후배위로 침대 위로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을 수밖에 없었다. 넣을게요, 라는 속삭임이 등 뒤에서 들렸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널을 뭉근히 문지르던 끝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때의 감각만은 쉽사리 익숙해지지 않지만 태형의 기분은 분명 좋은 듯 달뜬 숨소리를 들려준다. 어떻게 보이는지와는 별개로 후배위를 할 때면 추삽질을 하는 그가 좀 더 선명히 느껴진다. 좋아하는 그의 얼굴은 못 보지만 기분 좋다고, 사탕처럼 빨아 먹는 것 같다고, 금방 갈 것 같다고 태형의 떨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고, 그 또한 내가 느끼는 부분까지 턱, 턱 살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집요하게 박아오기에 짜르르한 느낌이 올라올 때 마다 허벅지가 위태롭게 벌벌 떨렸다. 그리고 실제로도 우리 둘 다 다른 체위로 할 때 보다 좀 더 빠르게 절정에 다다랐다. 참는다고 참았는데도 베개 위로 묻은 잇새로 거친 숨소리와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 상태로 정신 없이 숨을 몰아쉬었더니 산소 부족으로 머리가 핑 돌았다. 살이 턱턱 빠르게 마찰하는 소리가 이어지다가 곧 아아, 아, 하고 태형이 괴로운 듯 신음하며 그와 동시에 안쪽의 콘돔이 뭉근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때였다.
- 아빠?
불현듯 문 밖에서 들리는 하미의 목소리에 오르가즘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등골이 서늘해졌다. 태형 또한 놀랐는지 몸이 굳은 듯 삽입한 그대로 미동도 없더니, 하미가 잠긴 문고리를 잡고 열기 위해 덜컹 덜컹 돌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부리나케 페니스를 빼고는 바닥에 떨어진 반바지를 찾아 헤맸다. 나 또한 침착하게 사용한 콘돔을 벗어 끝을 묶어 버리고는 옷을 찾아 다시 챙겨 입었다. 문 밖에서 아빠, 괜찮아? 왜 그래? 라는 하미의 걱정하는 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 새벽이라도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도… 정말 쉽지 않다. 침대 아래로 걸어 내려오는데 다리에 힘이 빠져 몸이 한 번 휘청이던 것을 가까스레 다시 중심을 잡고서 혹시 몰라 잠궈두었던 문고리를 풀며 문을 빼꼼 열었다. 아래로 내려다보면 공주풍의 분홍색 티니핑 파자마를 입은 하미가 아직도 눈에 잠이 잔뜩 묻은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기다리며 서있다. 나는 좀 민망해져서 상기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왜 왔어? 그냥 계속 자지.”
입을 여니 다 쇠어버린 목소리가 나왔기에 목을 큼큼 가다듬어야만 했다. 안쪽에 남아있던 젤이 주륵 흘러나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져 문 뒤의 어둠 속으로 몸을 슬쩍 숨겼다. 나를 올려다보는 하미의 눈초리가 나를 걱정 하는 것인지, 수상하게 여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악몽이라도 꿨어?”
“어. 이제 괜찮으니까 다시 자러 가.”
“태형이 오빠도 악몽 꿨어?”
하미가 방 안을 빼꼼 들여다보는 탓에 나도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태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침대 위에 등을 돌린 채 이불을 덮고 누워 열심히 자는 체를 한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허, 하고 헛웃음을 치며 잘만 자는데? 라고 대충 대답하곤 하미에게 이제 가보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얼른 가서 자, 어린이집 가야지. 허리도 얼얼하고 허벅지도 벌벌 떨리는 것을 숨기기가 어려웠지만 그걸 귀찮음으로 위장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하미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다가도 아빠 문 잠그지 말라고, 무섭다고 경고를 하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금 방문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며시 닫고선 뒤로 돌아 태형을 지긋이 쳐다봤다. 그 또한 다시금 깔린 정적에 슬며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이것 봐, 방음 안 된다고 그랬지? 라고 속삭이듯 잔소리를 하자, 그 또한 세상 억울한 듯 팔자 눈썹을 하고서 할 말을 잃고는 나를 망연히 보다가 대꾸했다. 이럴 줄 알고서 먼저 문 잠궈둔 게 누군데요.
디펜스 1
“아빠, 나 결심했어.”
뒷좌석에서 하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뭘 결심했다는 건지, 그렇게 비장하게 말할 일이 무엇인지 나는 잠자코 운전대를 잡고서 룸미러를 통해 그녀를 힐끔 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미는 조수석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태형에게 시선을 주더니, 룸미러 속의 나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태형이 오빠랑 결혼할 거야.”
얼씨구. 그녀의 말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태형이 하미의 말에 사레라도 들렸는지 푸웁,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켈록거리기 시작했다.
태형이 나와 하미의 집으로 들어와 같이 살게된 지 약 일 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태형을 뭘 얼마나 오래 봤다고 결혼 타령인지, 처음엔 태형과 허물 없이 잘만 놀았으면서 요 며칠간 그와 지낼 때 이상하게 쑥스러워 하는 낌새가 보이더니 당사자도 있는 자리에서 대뜸 결혼 선언을 해? 결혼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내가 한참이나 말문을 잃고서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랑 태형이 오빠랑 나이 차이가 몇이나 나는지 알기는 하냐? 두 자리 수 덧셈 뺄셈도 못 하면서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태형이 오빠가 무슨 죄가 있어서 자기 밥도 못 해먹는 여자애랑 결혼을 해.”
나의 현실적인 잡도리에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하는 일곱 살 짜리는 태형이 내 말을 듣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지 아니라고, 할 수 있다고 생떼를 박박 부리다가 종내에는 기분이 상한 듯 울음을 터뜨릴 것 처럼 입술을 삐죽이니, 그녀의 상태를 눈치 챈 태형이 당황하여 다급하게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하미랑 결혼이야 언제든 할 수 있지, 그런데 프로포즈는 원래 남자가 하는 거잖아. 내가 먼저 프로포즈 할 때 까지 기다려 줄 수 있어? 응? 태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 조곤 달래는 걸 듣고 있자니 저런 식으로 여자를 몇이나 울렸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애인을 옆에 두고서 애인의 조카와 결혼을 논하냐? 능구렁이 같은 자식. 노래방 도우미가 아니라 호스트 일을 했었다면 외제차가 아니라 번화가에 빌딩을 올렸을 지도 모르는 녀석. 신호를 기다리며 룸미러로 그를 째려보자 그는 애한테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떡하냐고 입모양만으로 말하며 도리어 나를 나무라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봤다.
김태형. 태생부터 인기가 없을 수 없는 녀석이다. 생긴 꼴이 웬만한 연예인 뺨 치는 수준인 영향이 가장 클 것이고, 저음의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모난 곳 없이 유한 성격도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겠다. 나 또한 그의 그런 면모들을 사랑하니 연애를 허락하였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도 그런 그에게 쉽게 빠져든다는 점일 것이다. 어디 민하미 뿐이겠는가. 물론 나이 서른에 일곱 살 소녀에게 청혼 받기가 흔한 이벤트는 아니겠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태형이 하미에게 오죽 잘해줬으면 결혼하겠다는 소리까지 하겠는가. 결혼이 녹록치 않은 이벤트라는 걸 일곱 살 짜리에게 설명할 길이 없다는 점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디펜스 2
“태형 오빠, 이거 마실래요? 콜라 샀는데 원쁠원이더라구요.”
목소리를 죽인다고 죽여도 모두에게 대화 내용이 들릴 정도로 조용한 사무실, 아직 대부분의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았고 정규 근무 시간 이전이기에 직원들끼리 잡담을 나눈다한들 내가 신경쓸 바는 아니다. 일터라지만 동료를 부를 때의 호칭을 격식 없는 형태로 달리 해도 꼰대같이 지적할 생각도 없다. 나는 내 모니터 뒤에서 태형의 자리로 다가온 이 주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제법 까진 구석이 있는 이 주임의 타겟이 태형의 입사 전까지만 해도 나였다가 이후에는 태형으로 바뀐 것이 나로써는 좋아해야 할 일일지, 싫어해야 할 일일지 분별이 쉽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 호감을 보일 때만 해도 부담스럽기만 했으니, 태형이 내 연인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관심을 가져가줘서 고맙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태형도 그녀가 제게 가지는 관심을 모르는 눈치는 아닌 것 같던데.
“오늘 점심 뭐 먹어요?”
“오늘? 글쎄, 너는?”
“점심 같이 먹을래요? 피자 먹으러 가요.”
“피자…”
그가 말 끝을 흐리며 이쪽을 흘끔 보는 것을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오늘이 수요일이던가, 그럼 암묵적으로 태형과 같이 점심을 먹는 날이긴 한데. 난처한 듯 이쪽을 보는 태형의 시선을 이 주임도 느꼈는지 그녀가 한껏 소리를 낮추어 ‘우리 둘이서만요, 저 할인 쿠폰 있어서!’ 라고 깜찍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유감스럽게도 내게까지 들렸다. 나 좋다고 졸졸 따라다닐 땐 언제고 이젠 남의 애인을 꼬시려 드는군. 나는 태형이 무어라 대답할지 기대하며 모니터 뒤에서 숨을 죽였다. 잊지 않았겠지. 회사에서만큼은 우린 남남이자 상하 관계일 뿐이라고.
“...난 피자가 그닥 끌리진 않네.”
“그럼 다른 거 먹을까요?”
태형 딴에는 완곡히 거절했다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이 주임도 순순히 물러서는 여자는 아니었기에 흠… 소리를 내며 무어라 답할지 고민하는 태형을 구조하기 위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압 슬리퍼를 끌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 주임이 갑자기 그들에게 다가온 나를 의아하다는 듯 보기에 나는 으레 그러듯 왜, 라고 그녀에게 불퉁하게 물었다.
“오늘 피자 먹냐? 나도 껴줘라.”
“에엑, 다 들으셨어요? 태형 오빠는 피자 안 끌린대요.”
“그래? 그럼 길 건너 기사 식당 어때? 불백에 계란말이, 참치김치찌개도 주는데 팔천원이라더라. 엄청 혜자 아니냐?”
“아, 이사님 진짜 아저씨 취향!”
이 주임이 질색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저씨들은 뭐 미각이 없나, 맛있으면 된 거 아냐? 한국인은 쌀밥을 먹어야지. 게다가 거긴 리필도 가능하고 고물가 시대에 얼마나 경제적이야. 내가 일장연설을 하듯 백반 칭찬을 늘어놓자 나를 보는 이 주임의 눈빛에서 제발 눈치좀 챙기세요 아저씨, 라는 메세지가 고스란히 읽혔다. 나는 개의치 않으며 태형에게 시선을 주었고, 태형은 기회를 놓칠세라 잽싸게 대답했다.
“기사 식당 가겠습니다.”
이 주임의 시선으로는 상급자의 파워 플레잉처럼 보였길 바랐기에 태형이 조금만 더 마지 못해 간다는 뉘앙스를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나는 속으로만 아쉬워했다. 방금 태형의 연기는 한 60점 정도.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이 주임에게 너도 갈래? 라고 질문했으나 이 주임은 태형을 보는 얼굴에 실망했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대답했다.
“됐어요, 백 주임님이랑 갈 거예요.”
“그러고보니 오늘 원피스 예쁘네, 이 주임. 어디 가?”
“아, 됐다구요.”
삐진 티는 왜 내는지, 여자애들 속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나는 태형의 책상 위에 올려져있던 캔 콜라를 집어 들어 이 주임이 보는 앞에서 따고는 몇 모금을 꿀꺽 꿀꺽 마셨다. 이 주임이 기가 차다는 듯 태형 오빠 드린 건데 이사님이 마음대로 드시면 어떡해요, 라고 볼멘 소리로 말하기에 나 펩시는 안 마셔서, 라고 내 대신 태형이 대답했다.
디펜스 3
관심을 한 몸에 받고 다니는 인생에 익숙한 것인지 태형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반면 어째 피로는 내가 다 뒤집어 쓴 모양이다. 기껏 점심 메뉴를 정했더니 점심까지 한 시간을 남겨놓고서 태형이 내게 개인 메세지를 보내왔다. 신규 거래 업체와 갑자기 컨퍼런스 콜이 잡혔는데 하필 시차 때문에 점심 시간에 회의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같이 못 먹을 것 같다고, 우는 얼굴의 이모티콘과 함께. 신규 거래 업체라는 곳은 중국에 본사를 둔 프랜차이즈인데 나도 들어본 적 있는 회사였다. 태형은 거래처 뚫을 때 저쪽 담당자와 몇 번 미팅을 진행한 적 있다지만 오늘 계약 관련 디테일을 논의할 예정이라기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태형에게 답장을 보냈다. ‘나도 같이 들어가지 뭐. 내가 회의에 참가하진 않더라도 밖에서 지켜보면서 코칭해줄게. 끝나고 밥 같이 먹어.’ 내 메세지에 태형이 못생긴 캐릭터가 애교스럽게 키스를 날리는 이모티콘으로 답장했다.
탕비실 한 켠에 세워둔 TV에 태형의 노트북과 연결된 화상 회의 화면이 뜨고 노트북에 탑재된 카메라로 비친 태형의 얼굴이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상 회의방에 상대 업체측 계정 두 개가 입장했고, 담당자로 보이는 남자의 화상 화면과 캠은 꺼져있지만 목소리를 가다듬는 듯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태형이 캠을 향해 안녕하세요 정 비서님, 이라고 단정하게 인사를 건네자 아 네, 안녕하세요 태형님- 이라고 여자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회의는 정 비서라는 여자가 중간에서 거래 업체 실무자인 팀장의 말을 한국어로, 태형의 말을 중국어로 통역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계약은 기존에 제시한 조건으로 내부 검토가 끝났으며 이견이 없다면 계약을 진행하고 싶다, 다만 계속 수입으로 거래하기보다는 중국에 생산 라인을 따로 두는 게 어떻겠냐는 저쪽 담당자의 발언에 나는 자세를 고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적극적인 태도는 좋지만 이건 좀 일이 커지는데. 태형 또한 놀란 눈으로 화면 밖으로 나와 헬프를 치듯 나를 보기에 나는 내 핸드폰으로 메모를 작성해 그에게 보여주었다. ‘지금 결정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으니 일단 성과부터 확인한 후 다시 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본 태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가 작성한 메모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소리내어 읽었다.
그 외에는 크게 오갈 것이 없던 회의여서 약 이십 분 가량으로 짧게 끝낼 수 있었다. 회의를 마무리하는 분위기였기에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담당자의 계정이 먼저 방을 빠져나간 것이 보였고 태형 또한 방을 나가려던 찰나에 정 비서의 목소리가 태형님, 잠시만요, 라고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태형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네? 하고 묻자 여태껏 줄곧 꺼져 있었던 그녀의 캠 화면이 TV를 통해 내게도 보였다.
- 우선 계약 성사시킨 거 축하 드려요.
화면에 나타난 정 비서의 영상을 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배경으로 봐서는 그녀의 집인 것 같은데, 대낮부터 가슴골이 거하게 파인 옷을 입고서 진한 화장을 한 이유는 무엇인지, 볼 일도 다 본 마당에 캠을 켜서 자신을 드러낸 이유는 또 무엇인지. 설마 너도냐. 오늘 오전만 해도 벌써 세 번 째다. 내가 피곤하다는 듯 이마를 짚으니 화면에서 다시금 정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 지금 다른 분도 거기 계신 거예요? 계속 다른 곳을 보시는 것 같아서요.
“아뇨, 무슨 일이신가요?”
-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번 주 금요일에 한국에 가거든요.
아. 태형이 깨달았다는 듯 작게 소리를 내고는 아무 말이 없자 정 비서가 다시 말을 이었다.
- 태형님이랑 한 번 부담 없이 뵈었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으실까요?
일 얘기도 하고, 기기도 직접 보구요. 그녀가 붉은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생긋 웃기에 태형도 옅게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일 얘기면 저희 회사로 오시겠어요?”
- 아, 제가 회사 일로 한국에 가는 건 아닌지라. 그냥 관광차 가는 거여서요, 다른 데서 뵐까요? 제가 머무를 호텔에서 뵙죠.
결국 단 둘이 사석에서 만나자는 말이다.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전동 딜도라는 기기를 보여달라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 이 여자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태형이 난처한 듯 아… 하고 말을 잇지 못하자 그녀는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라고 다정한 엄마처럼 태형을 달랬다.
대답을 선뜻 내놓지 않는 태형은 고민에 빠진 걸까. 사실상 이 계약의 교두보 역할을 그녀가 한 것이나 다름 없으니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면 사업에 트러블이 있을까봐 걱정하는 것일까.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녀의 제안에 수긍했을까. ‘을’의 영업 사원이라면 선택권이란 없겠지, 또 이토록 스케일이 큰 건이라면 더더욱. 나라도 고민이 많이 됐을 거다, 어떻게든 좋게 빠져나가긴 하겠지만 태형에게도 그런 수완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내가 쓰게 웃으며 자리를 뜨려 일어나는 순간, 태형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제가 아이를 돌봐야 해서요.”
그가 제 핸드폰을 열어 슥슥 만지더니 하미의 사진을 띄워 노트북 웹캠을 통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어린이집 단체복을 입은 하미가 태형의 한 쪽 손을 잡고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사진이었는데, 워낙 태형과 닮은 하미의 커다란 눈과 까무잡잡한 피부에 진짜 부녀지간으로 오해할 법 하여 그것을 본 정 비서도 감쪽같이 속았는지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결혼 하셨었어요?”
“네, 혹시 제가 오해하게 만들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뇨, 죄송하긴요. 전혀 몰랐네요.”
“이럴 줄 알았다면 평소에 티를 좀 낼 걸 그랬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그녀가 장난스레 대꾸해보지만 얼굴에 아쉬움이 남은 것이 훤히 읽혔다. 그녀가 커다란 눈을 굴려 쩝,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믿기지 않는다는 듯 보이기도 했다.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것을 느꼈기에 태형이 저희, 괜찮은 거죠? 라고 묻는 말에 그녀가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이 재차 확인하듯 저희 계약도 문제 없죠? 라고 조심스레 묻기에 그녀가 푸스스 웃으며 그럼요, 라고 짧게 답했다.
구속구
언제 꼬리가 밟힐지 모르는 거짓말로 일단락되어 찝찝함만이 남은 컨퍼런스 콜이 끝나자마자 노트북을 덮은 태형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푹 숙이며 내게 사과를 했다. 뭐, 반나절만에 여자가 이렇게 꼬일 줄 본인이야 알았겠는가. 평소에도 여자들의 시선을 받거나 번호를 따이는 것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내겐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지만 오늘은 본인도 좀 심했다고 느꼈나 보다. 그렇다고 그런 관심들을 일일이 거절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을 터인데, 어째 타인의 마음이 제 마음대로 되겠는가. 나 또한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화 났어요?”
그가 테이블 위로 길게 엎드려 팔을 뻗어 책상 위에 올려진 내 손을 어루만졌다. 다행히 점심시간이어서 직원들 모두가 자리를 비운 덕에 나는 그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가 내 안색에서 어떤 위기를 감지하기라도 한 듯 알잖아요, 저 진짜 이사님밖에 없는 거… 라고 애처롭게 말하는 탓에 나는 잠시 그의 짙은 색 손마디만 말 없이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반지라도 해줄까?”
“같이 맞출까요?”
“회사에서 어떻게 같이 껴, 너만 껴야지.”
내 말에 태형이 엎드렸던 고개를 훽 들더니 팔자 눈썹을 하고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왜 저 혼자 껴요, 저도 남들이 이사님한테 껄떡대는 거 싫어요.”
“안 껄떡대.”
“무슨 소리예요? 진짜 몰라서 그래요?”
“뭘 몰라. 진짜로 안 껄떡대.”
“그거야 철벽을 기가막히게 치시니까 그렇죠.”
그가 동의하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보다가도 칭찬하듯 내 손등을 쓱쓱 쓰다듬는 것이 또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계속 그렇게 철벽 쳐야 돼요, 그래도 반지는 같이 해요.”
“너도 그럼 철벽을 치던가.”
“반지 해요. 이사님거랑 내 거랑, 같은 디자인으로.”
태형은 막무가내였다. 네 번 째 손가락, 반지가 자리할 위치를 매만지는 손끝을 내려다보며 나 또한 아쉬워하며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아주 회사에다 소문을 내라.”
내 말에 태형이 할 말이 많다는 눈으로 째려보지만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난 손가락에 끼고다니는 것보다는 목걸이로 만들어서 숨기고 다니는 건 어때?”
주목을 많이 받는 처지들이라 같이 끼고 다녔다간 바로 들킬테니, 태형이라도 혼자 착용하고 다니면서 출저를 물어오면 적당히 얼버무리던가 하는 게 좋겠지. 나 또한 셔츠 안쪽으로 넣어서 보이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착용하고 다니는 방법이기도 하고. 태형도 내 눈을 보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입술만 삐죽 내밀다가도 종내에는 눈을 내리 깔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회사 밖에선 껴야 해요. 빼지 말기.”
그가 고집스레 말하면서도 눈꼬리를 휘며 배시시 웃었다. 어디서 맞출까요? 난 좀 비싸도 괜찮은데, 브랜드 주얼리도 괜찮구 커스텀 디자인으로 만드는 것도 좋아요. 역시 24K 골드로 해야겠죠? 이번 주말에 금은방 가볼래요? 태형이 신이 난 목소리로 말하며 벌써부터 핸드폰을 열어 검색을 하는 탓에 나는 밥부터 먹자고 그의 손가락을 잡고서 가볍게 흔들었다. 기사 식당 가요? 태형이 나를 올려다보며 묻기에 나는 피식 웃으며 시간 없어서 햄버거로 떼워야겠다고 대답하니, 나를 보던 그의 등 뒤에서 꼬리를 훽훽 치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야유회 1
토요일 오후 세 시 반. 팔월의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태양만이 작렬했다. 나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어느 시골의 국도 대로변에 차를 잠시 대어두고는 핸들 위로 고개를 박았다. 에어컨 바람 소리와 시원한 공기만이 차 내부를 가득 채우는데, 켜둔 내비게이터에는 목적지까지 10분이 남았다는 메세지가 띄워져 있었지만 나는 그 시간을 조금도 줄이고 싶지 않았다. 곧장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럴 수도 없었다. 목적지는 경기도에 소재한 어느 펜션, 최영이가 야유회랍시고 주말에 사무실 직원들과 공장 직원들까지 거기로 불러다 모았다. 물론 어젯밤에 나와 대판 싸운 김태형도 거기에 가 있다.
지금껏 회사 창립 이래로 단 한 번도 야유회같은 것을 한 적이 없었다. 물론 업력도 짧을뿐 더러 그런 것을 갈 만한 시간이나 자금의 여유도 없었으니까 그랬지만, 갑자기 귀한 주말을 직원들의 단합을 위해 함께 보내자는 최영이의 뜻과 나이들이 어리면 좀 뺄 법도 한데 어째 직원들 전원이 참석 의사를 내비쳤다. 지금도 단합은 잘만 되니 굳이 이런 행사를 열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사무실이야 인원이 몇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공장 사람들까지 빠지는 사람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좀 놀랍기도, 동시에 절망스럽기도 했다. 공장 사람들과 안면이 있는 직원이 나와 태형밖에 없었기에 그들과의 사다리가 되어주어야하니 나의 참석 여부 또한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흔치 않게 주말에 잡힌 거래처와의 미팅때문에 오전부터 교외로 출장을 다녀왔다. 거래처 직원들과 식사하는 도중에 연신 날아드는 최영이의 메세지에 핸드폰 진동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고기랑 술 모자랄 것 같으니까 더 사와라, 조개탄이랑 폭죽도, 몇 시에 오냐, 막걸리랑 소세지도 있으면 좀 사와라, 싸구려 말고 괜찮은 걸로, 아직 마트 안갔지? 생리대 대형 하나만 사와라… 뭐 이런 것들. 뒤이어 동영상 하나가 도착했기에 열어보니 김태형이 대낮부터 술을 마셨는지 노래방 반주에 맞춰 구슬픈 발라드를 열창하는 소리가 흘러나와서 황급히 볼륨을 낮춰야 했고, 덕분에 거래처에서 내게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묻기에 나는 잘 넘어가지도 않는 밥을 씹어삼키며 대답했다. 오늘 회사 야유회를 한다네요. 작게 한숨을 내쉬는 나를 거래처 직원이 딱하다는 듯이 보더니 빨리 가셔야겠군요, 일어나시죠, 라고 말하는데 오늘은 차라리 거래처 직원과 시간을 보내는 편이 더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보통 때였으면 그저 짜증 한 번 내고 갔을텐데 오늘 유독 가기 싫은 이유는 역시 태형과 싸운 것이 가장 큰 원인이 되겠다. 으레 그러하듯 싸움의 원인도 별 거 아니었다. 갑자기 생긴 야유회 일정때문에 시터님께 연락을 드렸는데 일이 있으셔서 안될 것 같다는 답변을 받았다. 육아 품앗이를 하는 하미의 친구네 부모들에게도 연락을 돌려봤지만 안되겠다는 답변을 받았기에, 나는 최후의 보루로 남은 한 곳의 연락처를 핸드폰에 띄우고서도 한참을 망설였다. 위치도 아파트 바로 옆 동인데다가 하미와의 관계도 좋은, 신경쓰지 말고 자주 들러도 괜찮다고 말씀하셨지만 내심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바로 전 처갓집이다.
혼자 아이를 양육하는 입장에서는 지극히 뻔뻔스러워질 이유들이 많았다. 전처인 마리아와는 완전히 파국이라지만 마리아의 부모인 전 장인장모는 아이를 좋아하는 데다가 우리의 이혼은 전적으로 마리아의 귀책임을, 그리고 내가 혼자 하미를 키우는 것도 알고 계시기에 자주 데려오라고, 손녀같이 여기며 봐주겠다고 날 동정하듯 말씀하셨다. 물론 전 처가에 하미를 맡길 때엔 마리아에게도 연락을 넣어두는 편이다. 그녀가 이제 어디서 뭘 하고 사는 지는 내가 알 바 아니나, 그녀가 지금 내 아파트 옆 동에 살지는 않으니 나도 그녀에게 연락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전 처가에 애를 맡기는 나를 그녀는 한심하게 생각하겠지만, 내게 지은 죄를 생각해서인지 그저 ‘ㅇㅇ’라고 답장을 받을 뿐인데… 그 사실을 태형이 알게 되었다. 하미를 태우고 하원하던 금요일 오후의 차 안, 하미의 ‘내일 외갓집에 갈 거야, 외할머니가 하미 치킨 사줄거래’라는 한 마디 때문에…
왜 아직도 전처랑 연락을 하냐, 무슨 이혼하고도 전 처가를 들락거리냐, 하미 맡길 곳이 그렇게 없었냐, 아주 할리우드가 따로 없다, 그럴 거면 차라리 우리 부모님께 맡기는 게 낫지 않겠나… 등등, 태형이 이토록 짜증을 내는 것을 처음 본 나도 좀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젠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냐, 어디 요즘 시터 구하기가 쉬운 줄 아냐, 너도 잘 알면서 왜 말을 그렇게 하냐, 애인이라고 데려온 사람이 애 딸린 남잔데 초면부터 대뜸 애좀 봐달라고 부탁드리면 잘도 좋아하시겠다… 누구든 입을 열면 상황이 더 악화되기만 했기에 결국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은 침실, 태형이 고개를 떨구더니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래요, 알았어요. 피곤할 텐데 씻고 자요. 그 말이 그 날 대화의 끝이었다.
나도 알아, 내가 한심한 거.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팔자에도 없는 애를 키워서, 여자랑 이혼하더니 남자 애인한테 욕을 먹냐. 내 신세가 처량해서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다시금 핸드폰이 진동했다. ‘니 애인 저러고 놀다가 지쳐서 잠들었다’. 최영이의 메세지에 나는 환장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다시 핸들을 고쳐잡았다.
야유회 2
최영이가 주문한 것들을 바리바리 들고 펜션으로 들어가니 한바탕 거한 식사들을 했는지 공장 직원들은 펜션 앞 공터에서 풋살을 하고, 몇몇 직원들은 바짓단을 동동 걷고서 풀장에 발을 담그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으며, 사무실 여직원 일동은 팔자 좋게 거실에 드러누워 에어컨 바람을 쐬며 수박을 한 조각씩 물고는 유행하는 연애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다. 거실 입구에 사온 것들을 내려놓으며 이사가 왔는데도 미동도 없이 오셨어요? 라고 말 한마디 건넬 뿐인 직원들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태형이는?”
“술 먹고 뻗어서 자고 있어요.”
이 주임이 태형이 자고 있는 방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어떻게 이 시간에 술을 먹고 뻗을 수가 있나, 나는 태형이 자고 있다는 방 문을 째려보며 다시 물었다.
“최 대표랑 성 이사는?”
“성 이사님은 종일 노트북 붙잡고 뭐 하고 계시구, 최 대표님은 담배 피우러 나가셨을 걸요?”
그렇게 대답한 이 주임이 내게 손짓하며 앉아서 수박좀 드시라고 권했지만, 나는 방금 벗어둔 구두를 다시 신고 밖으로 나왔다. 손부채질을 하며 펜션 주위를 빙 돌다가 뒷문 부근에서 플라스틱 의자에 양반다리로 앉아 담배를 피우는 최영이를 발견했다. 어쩐지 수심이 가득해보이는 얼굴이 나를 발견하더니 대충 손을 흔들었다.
“야, 니네 싸웠냐?”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싸웠냐니, 김태형이 또 무슨 사단을 벌인 것을 듣기 위해 먼저 최영이를 찾아갔더니 아니나 다를까다. 나도 최영이의 옆자리 의자를 빼서는 그녀와 조금 떨어져 앉았다.
“김태형이 또 뭔 짓을 했길래?”
“같은 차 타고 왔는데 기분이 엄청 다운돼 보이는 거야. 뭔 일 있었냐고 물으니 잠을 잘 못 잤다더라고.”
“그거야 그럴 수 있지.”
“그러면서도 점심 먹을 때 소주 자작을 막 하더라고. 술도 잘 못 먹는 애가.”
“그것도 그럴 수 있지.”
“밥 다 먹고 설거지 시키려고 돌아보니까 눈물을 뚝뚝 쏟고 있더라.”
최영이의 말에 나는 깊게 탄식하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의 주사가 잠드는 것인 줄 알았는데 딱히 정해져있는 게 아닌가 보다. 나는 할 말을 잃고서 얼굴을 쓸어내리며 최영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주위 사람들이 다 놀라서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어봤지. 애인이랑 싸웠대. 그 때 이 주임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네가 봤어야 했는데. 무슨 애도 아니고 다들 달래주느라 정신 없는데 그 와중에 설거지를 어떻게 시키겠어. 왜 싸웠냐니까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선 내 눈치를 보더라고. 나도 마음 약해져서 얘 달랜다고 노래방 기계 있으니까 마이크 쥐어줬지. 술 들어가서 그런지 곧장 옛날 솜씨 나오더라.”
최영이가 한숨같은 숨을 내쉬자 머금던 담배 연기가 길게 쏟아져나왔다. 나도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 생각이 절실해졌지만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는 손부채질만 연신 할 수밖에 없었다. 내리 깔린 정적 속에 매미 울음 소리만 먼 곳에서 아득히 들려오는데, 그래서 왜 싸웠냐는 최영이의 질문에 나는 입을 열었다.
“여기 온다고 마리아네 부모님 집에 하미 맡기고 왔거든.”
“...마리아? 네 전처? 너 미쳤냐?”
최영이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미간을 한껏 일그리며 나를 보더니 이 새끼 진짜 미친 새끼 아냐, 라고 나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너 걔랑 왜 이혼했는지 기억 안 나?”
“기억 하지, 걔네 부모도 걔가 나한테 못할 짓 한 거 다 알고.”
“그런데도 네가 아직 그 집안이랑 엮여있다고? 네 딸같은 조카 봐 줄 사람이 없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좀 아니지 않냐? 최영이의 눈빛에 나도 욱 하고 올라오는 변명들을 토해내려다 지난 밤 태형과 벌였던 논쟁들을 최영이와 다시 반복할 이유도 없었기에 꾹 참았다. 이게 다 네가 갑자기 야유회 가자고 얘기만 안 꺼냈더라면 나도 전 처가에 발걸음할 일은 없었을 거다. 가뜩이나 주말에 출장까지 가는 마당에 차라리 그 핑계로 안 간다고 할 걸. 평소 사무실 돌아가는 꼴만 봐도 육체 노동은 죄다 나와 태형의 소관이 될 게 뻔한데 뭐 하러 여기까지 와서 고생을 하려고. 나는 어쩌다 선택권도 없이 내 발로 이곳까지 온 것을 후회했다.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또 나들이를 가자고 한다면 이사직을 걸고서라도 극구 반대할 생각이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허심탄회하게 뱉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마리아랑은 진작에 깔끔하게 끝났고. 나도 걔 얼굴 다시는 보고 싶지 않고. 걔네 부모가 아파트 옆 동 사는 데다가 하미를 좋아하고, 하미도 잘 따르니까 맡긴 거야. 나도 이제 거기 더 안 가, 김태형 생각해서라도. 갑자기 네가 이런 데엘 오자고 해서 찾고 찾다가 못 찾아서 어쩔 수 없었던 거지.”
“내 탓이냐? 야, 너 진짜 웃긴다.”
최영이가 비웃으며 다 피운 꽁초를 테이블 위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녀가 말 없이 손을 탁탁 털며 나를 보더니 내게 물었다.
“너, 내가 이 펜션 어떻게 빌린 건 줄 아냐?”
“내가 알 바야?”
“여기 태형이네 이모님 거야.”
갑자기 최영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태형의 이름에 내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녀를 봤다. 진짜야, 그래서 온 거라니까. 최영이가 변명하듯 꺼낸 말 뜻을 나 또한 이해했다.
“너랑 태형이는 대체 평소에 무슨 얘기를 하길래 그런 말이 나와?”
“네 뒷담 깐다, 새꺄.”
“이제 너랑 놀지 말라고 해야겠다.”
“짜증나네, 진짜.”
최영이가 어이없다는 듯 너털 웃음을 지었다. 에휴, 하고 소리 내어 한숨을 쉬더니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야유회는 나랑 태형이 공동 아이디어니까 쓸 데 없이 애 잡지 마라. 어쩌다 휴가 얘기가 나왔는데, 여름 끝물까지 바빠서 아직 못간 거 근교에서 일박 정도 회사 사람들이랑 놀러 가는 것도 좋겠다, 마침 태형이 이모님이 펜션 장사를 한다고 하시니 빠르게 진행이 된 거고. 직원들이 싫댔으면 나도 안 왔지.”
그런데 너네가 여기 온다고 싸웠을 줄 내가 알았겠냐고. 최영이가 혀를 쯧 차며 말했다. 누구는 싸우고, 누구는 티켓팅인지 나발인지 망했다고 하루종일 노트북만 들여다보고 있고… 최영이의 염불하듯 한탄하는 얼굴에 근심이 짙게 깔리는 것이 보였다. 성지현은 또 뭔 일이냐고 물으니 몰라 씨발, 하고 짜증을 팍 낸다. 뭣같은 성질머리하고는. 성지현이 저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냥 내버려두면 될 것을, 왜 최영이까지 덩달아 짜증인지 모르겠다. 나는 네 시를 막 넘기려는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며 그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덥다, 나 들어간다. 몸에 배였을 담배 연기 냄새를 툭툭 털어내는 시늉을 하자 최영이는 빨리 꺼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야유회 3
나는 다시 펜션 안으로 들어와 한창 연프 출연진들에 대해 품평을 늘어놓는 직원들 뒤를 조용히 지나 태형이 있다는 방 문을 두드렸다. 야, 나 들어간다. 그렇게 말하고 문을 살짝 열었더니 시원하다못해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얼굴 위로 훅 끼쳤다.
아마도 이 펜션에서 가장 작을 방인 이 방에는 퀸 사이즈 침대 하나만이 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그 외에 별다른 가구도 없었기에 태형이 가져온 더플백만이 침대 발치 아래에 놓여있을 뿐이다. 그리고 하얀 호텔식 침구 아래에 뭉쳐져있는 저 형상, 저것이 태형일 터. 왜 이렇게 에어컨을 강하게 틀어놓았나 싶었더니 이불을 머리 끝까지 쓰고 있는게 더워서일 것이다. 너 몇 살이냐, 애도 아니고. 자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내게 삐져서인지 미동조차 없다. 아, 좀 씻고 싶은데 욕실은 거실에 붙은 공용 욕실을 써야 할 판국이다. 공장 직원들은 어떤 방을 쓸 지 모르겠으나 나와 태형이 성별로는 열세이니 이런 방을 준 것이겠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로 걸터앉아 차가운 에어컨 바람으로 땀을 식혔다. 내가 갈아 입을 옷을 그와 싸우기 전에 부탁했었는데 가져왔으려나. 손목 시계를 풀어 침대 머리 맡에 두고는 옷을 갈아 입기 위해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는데, 등 뒤에서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손이 쑥 나와서 대뜸 내 허리를 감아왔다. 참 나, 삐진 거 아니었어? 허리에 닿은 그의 팔이 뜨겁다. 나는 어이 없다는 듯 웃으며 뭐 하냐고 그에게 인사차 말을 건넸다. 그러자 팔 하나가 더 쑥 튀어나오더니 내 허리를 가득 감아안았고, 허리 뒤로 닿은 그의 뺨이 느껴졌다. 이불 안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우리, 얘기좀 해요.
‘얘기좀 하자’는 말은 누구에게 들어도 긴장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지난 밤 싸웠던 연인에게서라면 더욱 더, 좋지 않은 전개로 흘러갈 것이 자명했다. 가장 최악의 상황이라면 역시나 헤어지자는 말이겠지만, 내가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정도로 잘못한 것인가? 태형의 머릿속에서는 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 내 생각과 달리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아니면, 그 짧은 새에 이미 내게서 마음이 떠버린 것이라면? 그렇게 죽고 못살 것 같이 굴더니 하룻밤만에 떠버릴 마음이라면 나 또한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았다. 이불을 살짝 들추자 그의 헝크러진 머리칼과 발간 얼굴이 드러나고, 그의 커다란 두 눈이 나른히 나를 올려다봤다. 들어와요. 그가 한 쪽 팔로 덮고 있던 이불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방 바깥에 포진한 다른 직원들을 신경쓴 것이겠지, 이걸로 허접하게나마 방음을 하고자.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하는 수 없이 이불 아래, 그의 팔 안쪽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뜨겁고 답답하지만 작게 오르내리는 그의 체온과 침을 삼킬 때 울렁거리는 울대, 숨소리마저 익숙하다. 오직 태형만이 줄 수 있는, 굉장한 안정감이다. 얘기좀 하자면서 가득 안은 채 미동도 없는 것이 어째서인지 조금 슬퍼졌다. 정말 헤어지자고 말할 거라면 이러지 말지. 이런 상황에서 그와 키스를 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그의 입을 막아보고 싶어서일까, 뜬 마음을 몸으로라도 잡아보려는 발버둥일까. 그러나 나를 안은 팔에서 나는 그가 이별을 말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에, 두려워하면서도 괜찮은 척 입을 열었다.
“얘기좀 하자며.”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감은 내 허리 뒤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쓰다듬을 뿐이었다. 왜 이렇게 망설이는지. 짧은 사이에 불안감이 미친듯이 불어난다. 결국 참을 수 없어져서 나는 몸을 살짝 떨어뜨리고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왜 그러는데, 왜. 뭐가 문젠데. 별 거 아닌 다툼이었잖아, 왜 그렇게 혼자 심각한 건데. 그러나 단 한 마디도 뱉지 못한 채, 나는 태형이 입을 열기까지만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한참이나 뒤에 나왔다.
“그 여자, 얼굴 봤어요.”
그가 목이 메인 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라면 마리아를 말하는 거겠지만, 대체 어디서? 그것보다 왜? 그러나 나는 캐묻기보다 그를 달래기를 선택했다.
“뭐하러 봤어, 신경 쓰지 말지.”
“예쁘더라구요. 이런 여자는 대체 어디서 만난 거예요?”
그가 말하면서도 자조적으로 웃었다. 진짜 어이 없네. 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나는 정말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왜 질투를 해, 질투가 맞긴 한 건가 의심이 들 정도로. 나는 그의 뺨을 손가락 마디로 쓸어주며 가볍게 입술을 찍었다. 예쁜 건 네가 더 예쁘다. 적어도 그 여자는 나와 같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서 속삭여본 적도, 다툼같은 것도 제대로 해본 적 없다. 결혼은 다른 여자와 해본 적 있다지만 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상대는 네가 처음인데. 키스가 하고 싶어서 그의 입술 위로도 쪽 하고 입을 가볍게 맞추는데, 입술 사이에서 그가 파르르 떨리는 숨이 느껴졌다.
“윤기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결혼까지 했었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어요. 질투나서 미칠 것 같아…”
그의 말에 나는 그러면 안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는 바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니, 왜… 내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끅끅대며 웃자 태형이 내 말이 장난같냐고 역정을 냈다. 나는 억울해하며 말문을 열었다.
“네가 왜 질투를 해, 내가 언제 네 구 여친들에 대해 물어본 적 있었냐?”
“그게 짜증난다는 거예요. 왜 윤기는 질투 안 해요?”
“네 구 여친들은 모르겠지만 네가 고백 받는 건 뒤지게 많이 봤지.”
그건 좀 짜증나긴 하더라. 질투는 잘 모르겠고. 내 말에 태형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날 째려보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결혼까지 한 건 얘기가 좀 다르죠. 아이까지…”
그가 거기까지 말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 태형은 마리아가 내 아이를 낙태했었다는 사실을 줄곧 신경쓰고 있었나 보다. 물론 당시에는 어지간히 충격받긴 했지만 이젠 다 지나간 일인데 뭘 어쩌겠나. 덕분에 이혼도 잘 했으니 지금 너와 이러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내 눈을 피하며 또 침울해하기에 나는 그의 뺨 위로 다시금 입술을 맞췄다. 본격적으로 상체를 세워 팔 아래쪽에 그를 가두고는 입술로 이마, 콧등, 뺨, 턱까지 도장을 찍듯 타고 내려와 그의 귓볼을 입술 사이로 물고 빨자 하, 하고 그가 밭은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
“나 안 사랑해?”
그의 귓가로 나지막히 속삭이자마자 마치 그의 인내심이 폭발하기라도 한듯 고개를 돌려 입술 사이를 난폭하게 파고 들어온다. 어떻게 이 녀석은 매 순간이 꺼지지 않는 불덩이 같을까. 영원토록 식지 않을 것 처럼 굴까. 나는 그런 그가 좋아서 집어삼키듯 내 입술 안쪽을 탐하며 내 와이셔츠 단추를 마저 풀어내리는 그의 손을 가볍게 쓸었다. 네 번 째 손가락, 나와 같이 맞춘 반지. 내가 그것을 매만지는 것을 그 또한 느꼈는지 삼키던 입술을 잠시 떼고서 숨을 나눠마셨다. 작게 헐떡이는 입술들 사이로 실기둥이 맺히는데, 그가 벌어진 내 와이셔츠 안쪽에서 목걸이로 차고 있던 내 반지를 찾아들었다. 그가 목걸이 체인의 연결고리를 풀며 손, 이라고 말하는 탓에 나는 왼손을 내밀었고, 이불 안쪽에서도 투과된 빛에 반짝이는 반지가 네 번 째 손가락을 타고 매끄럽고 유려하게 자리잡았다. 그가 반지를 끼워준 적이 처음도 아닌데, 그는 왜 매번 이 행위에 이다지도 진지할까. 그가 내 손을 잡고서 눈을 들어 나를 마주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랑 헤어지면 다시는 얼굴 못 봐요.”
“.......”
“연락도 못 할 거예요.”
“.......”
“사랑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태형의 눈빛이 몹시 애처로웠다. 이해할 수 없어. 대체 내 어디가 좋아서 너는 고작 다툼 한 번에 안달내며 그런 부끄러운 말을 쉽게 쏟아내는 걸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싫지 않다. 버겁고 부담스러울 정도의 열렬한 애정에 벌써 익숙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나 또한 그와 비등한 질량의 연심을 품고있어서일까, 내가 이 녀석만큼 표현하지는 못해도 그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할 말을 잃고서 그의 얼굴만 내려다보자 그의 얼굴에 또 불안해하는 기색이 서렸기에, 나는 잡힌 손을 끌어 그의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심호흡을 하듯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내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가락에 푸스스 웃었다. 정말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푹 빠져버려서.
나는 그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다시 입술을 찍었고, 그 또한 기다렸다는 듯 혀가 안쪽으로 들어와 느긋히 섞였다. 몰입하는 탓에 몸을 낮추니 배가 닿았고, 나는 그의 손을 이끌어 맨살인 내 허리 뒤에 올려두었다. 좀 더 깊이, 키스가 농밀해지고 입술들 사이에서 물기있는 소리가 진득히 나면 괜히 맞닿은 고간을 슥슥 험핑해본다. 아직 아닌가? 난 예열 끝났는데. 짧게 숨을 몰아쉬며 그의 면반바지 앞섶으로 손을 밀어넣자 그의 무릎이 제지하듯 움츠러든다. 으응… 하고 고통스러운 듯 내는 신음 소리에 반쯤 둥둥 선 그의 귀두와 연결된 부분을 손가락으로 쓸어주자 숨이 넘어갈 듯 달뜬 숨을 내쉬는 모습이 귀엽다. 그러나 녹진해진 분위기에 삼루 진출을 준비하는 나와 달리 그는 바지 안으로 들어온 내 손을 차분하게 빼고서 뒤로 살짝 몸을 떨어뜨렸다. 뭐야, 웬일이야? 내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자 눈이 마주친 태형이 난처한 기색으로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리 참을 자신 있어요?”
방 바깥에 다른 사람들 있는데 여긴 방음도 잘 안되고, 문도 안 잠겨요. 욕실도 밖에 있고… 내가 서운해 할 필요 없다는 듯 이유를 줄줄 읊는데 나는 그가 목소리를 너무 죽인 탓에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그걸 모를까봐?
“나도 알아.”
“.......”
“지금 하고 싶어.”
그의 고간 위에 앉은 몸을 다시금 납작하게 낮춰서 그의 목덜미 깊은 안쪽까지 파고들어 입술을 묻으면 간지러운지 키득거리는 소리와 녹을 듯한 저음으로 좋아, 라고 흘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 급해, 응? 흔적이 날 정도로 빨아올리며 그의 두 손을 끌어 내 배 아래로 올려두니, 내 바지 안쪽에서 잔뜩 흥분한 것의 실루엣을 옷 위로 매만지는 손길에 애가 탄다. 급하다니까… 내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벨트와 버클을 풀어내리자 그의 손이 기다렸다는 듯 바지 허리와 입고 있던 브리프를 함께 끌어내리고, 나 또한 그의 바지춤 안으로 다시 손을 넣어 무 뽑듯이 그의 페니스를 쑥 꺼내쥐었다. 변태. 그가 푸스스 웃으며 말하곤 양 손 가득 내 엉덩이를 쥐고서 주물거리는데, 누가 누구더러 변태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만 만지고 넣기나 해… 안 풀어도 될 정도니까.”
“누가 갑자기 들어오기라도 하면… 으응…”
내가 그의 귀두 끝을 애널에 맞추고 뭉근히 문지르자 그가 애닯은 신음을 흘렸다. 쿠퍼액으로 끝이 젖어 미끌거리기에 서로가 움찔거리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앗, 흐으…! 이 정도 자극에 그가 본능적으로 귀두 끝을 안쪽으로 밀어넣었다가 금방 다시 빼는 통에 밀려오는 아쉬움이 굉장했다. 왜, 왜애… 내가 헐떡이며 원망하듯 앓는 소리를 내니, 태형도 이불 속 모자란 산소에 헐떡이다가 금방 쌀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힘을 주어 안쪽으로 절반쯤 들어왔다.
“왜 이렇게 급해요…”
“너도 그냥 넣었잖아.”
내가 허리를 움직여 피스톤질을 도와주자 금방 또 아, 좋아, 하고 반응이 온다. 그러나 시원하게 움직이지는 못하는지라 태형도 결국 감질나는지 몸을 일으켜 정상위로 체위를 바꾸더니 아직 벌어진 애널 위로 귀두 끝을 다시 대고 맞췄다. 그러나 바로 다시 삽입하지는 않아서 나는 고개를 돌리고서 곁눈질로 태형을 올려다보며 또 왜 그러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한 번 축이더니 대답했다.
“반지 계속 끼고 있으면.”
“...뭐?”
“오늘 계속 끼고 있으면 넣어줄게요.”
이 자식이…? 그러나 내가 역정을 내기도 전에 태형이 갑자기 깊숙히 치고 들어오는 탓에 헉, 소리가 터질뻔한 것을 그가 다급히 내 입술 위로 손바닥을 덮었다. 그가 내 뺨을 잡고서 자신을 올려다 보도록 부드럽게 돌렸다. 응? 그가 한 번 더 물으며 참기 힘들다는 듯 턱, 턱 소리가 날 정도로 추삽질을 시작하니 짜릿하게 올라오는 오르가즘에 허리가 들썩였다. 이 자식, 오늘 또 흥분치 맥시멈을 갱신한 모양인지 끝까지 박고는 뚫어버릴 듯 끝을 내 안쪽에 뭉근히 비비기까지 하는데 눈물이 찔끔 흐를 정도다. 이것이 고통인지, 쾌락인지 분간조차 가질 않는데, 응? 하고 채근하며 묻는 소리에 나는 그에게 입을 틀어 막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배 위로 비벼지던 내 페니스가 맥없이 사정해버리는 것이 지금 이 정도로 꼴려버렸다는 것을 반증하기에, 태형도 축축히 젖은 배 위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기쁜 듯 제대로 쑥, 쑥 움직이는 그의 고간에 막혀버린 잇새로 짧은 신음이 먹먹한 소리로 터져나왔다. 나도 벌써 갈 것 같아요… 그의 말에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멋대로 속도를 올리더니, 곧 안쪽에 뜨뜻하게 왈칵 쏟아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런 상황이면 늘 둘 다 너무 빨리 싸버린다니까. 내가 열이 오른 눈으로 아쉬운 듯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내 허리를 안고 들어 올려 이불을 덮어 쓴 채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침대 옆 쪽 좁은 바닥으로 내 등을 조심스레 뉘였다. 삐걱거리는 소리 나면 안되니까. 그가 속삭이더니 빼지 않은 고간을 아까보다 한결 터프하게 박아대는 탓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서 허공에 뜬 허벅지만 하릴없이 경련했다. 아, 좋아… 좋아… 엉덩이 사이로 미적지근한 액체가 그가 들어오고 빠질 때 마다 새어나와 에어컨 바람에 차게 식은 바닥 위로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혹여나 바닥에 닿는 내 몸이 아플세라 다른쪽 팔을 내 등 아래로 깔아주면서도 내 입을 틀어 막은 손이나 본능에 충실하게 움직이는 허리, 집중하여 살짝 벌어진 입술과 진지한 눈, 그의 관자놀이에서 떨어지는 그의 땀방울 같은 것들이 모순적이라 야하다. 나도 모르게 실금하듯 그의 배 위로 지릭, 하고 뿜어버린 탓에 내가 으응, 하고 소리를 내자 그의 입꼬리가 살풋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아, 개새끼.
‘와, 진짜 개새끼!’
‘저거 완전 미친놈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바깥에서 여직원들의 언성이 일제히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나는 잠깐 멈춰보라는 듯 그의 팔뚝을 잡았다. 생각보다 더 잘 들리는 것이 벽 너머 소파에 누가 자리잡은 모양이었다. 뒤이어 여직원들의 대화 소리에 집중하니 좀 더 선명하게 들리는데, 돌싱으로 연프 나왔으면서 어떻게 전처랑 바람을 피우냐, 저럴 거면 연프는 왜 나왔냐 재혼이나 하지, 저딴 놈 뭐가 좋다고 여출들도 눈 개별로다, 뭐 그런 욕들이 또 이어졌다. 바깥 상황에 집중하고 있던 내 눈치를 보듯 태형이 아주 천천히 피스톤질을 하는데, 그가 내 입에서 손을 떼더니 몸을 낮춰 내 허리를 가득 안으며 속삭였다.
“나 또 갈 것 같아요.”
오줌 싸는 거, 한 번 더 보여줘요. 그가 짓궂게 속삭이며 또 세게 쳐올리는 탓에 흐으…! 하고 소리가 터졌지만 새어나가는 소리를 막을 길이 없었는데, 그가 내 두 손목을 내 등 뒤에서 단단히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나, 못 참, 으, 안 돼, 다, 들린, 다고, 으응…! 그가 속도를 올리며 쳐올리는 탓에 터져나오는 소리를 목이 다 쇤 소리로 흘리자 태형이 작게 키득거리며 내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넣었다. 응, 으응… 그도 곧 피날레를 볼 듯 힘있게 쳐올리는 허리짓에 정신이 나가버릴 듯한 오르가즘에 몸이 전율하고, 안쪽에 뭘 몇 번이나 한 건지 쏟아낸 양만큼 그대로 흘러나오는 정액이 느껴졌다. 후우, 후으… 거친 숨소리만이 이불 안쪽으로 가득한데, 쪽 소리나게 입술을 떼고서 우리는 서로의 다 젖어 흐물흐물해진 얼굴을 잠시간 바라봤다.
미친놈아… 내가 앓는 소리로 말하며 그를 안은, 힘이 다 빠져버린 다리로 그의 등짝을 한 번 때리니, 그가 푸스스 웃으며 내 뺨에 뽀뽀를 퍼부었다. 윤기, 너무 야해요… 뺨과 목덜미로 또 물기있는 소리로 입술을 찍으며 내 한 쪽 다리를 잡고 들어 올리는데, 한 번 더 하려는가 싶어서 나 또한 응해주려는 찰나에 똑똑, 하고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사님, 자요? 이제 저녁 준비 하려는데-
야유회 4
태형이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는 내 옷이었다. 오늘 여기서 그를 보자 마자 알고는 있었는데, 왜 내 걸 입었냐고 물어보니 그는 심플하게 내 냄새를 맡고 싶어서 입었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이제 같은 섬유유연제 쓰니까 같은 냄새가 나는 거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보아도 그는 태연하게 더플백에서 제 티셔츠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나도 들어본 적 있는 C사의 명품 티셔츠였다.
그리하여 나는 태형의 비싼 티셔츠를 입고서 바베큐 그릴 앞에 섰다. 섹스를 그렇게 해댔는데 샤워도 하지 못하고 물티슈로만 대충 뒷정리를 하고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옷만 갈아입고 나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대로 서 있기 조차 힘들었다. 두 번으로 끝나서 다행이었을 망정이지, 세 번이었으면 기절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릴 위에서 익어가는 삼겹살만 멍하니 보고 있는데, 태형은 눈에 띄게 밝아진 모습으로 제가 구운 목살 한 점을 후후 불어 식히곤 정성스레 쌈을 싸서 이사님, 아- 하고 내게 내민다. 다른 직원들도 바로 뒤 테이블에서 상을 차리고 있으니 보는 눈이 많을 것이기에, 나는 내게 내밀어진 쌈과 태형을 번갈아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건 최 대표 먼저 줘야지.”
“최 대표님 아직 안 나오셨어요.”
내 말에 대답한 건 등 뒤의 테이블에 앉아 우리를 지켜보던 이 주임이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나는 테이블 위로 턱을 괸 그녀를 할 말을 잃고서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질문했다.
“성 이사는?”
“성 이사님도요. 두 분 다 불러도 안 나오시더라구요.”
그러고보니 오늘 성지현을 본 적이 없었다. 그 티켓팅인지 나발인지를 아직도 해결하고 있는 중인 걸까. 식사 준비도 얼추 끝나가니 둘 다 곧 나오겠지 뭐. 나는 쌈을 든 태형의 손을 받치곤 입을 벌려 받아서 씹어먹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 주임의 눈빛이 범상치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괜히 미간을 찌푸리며 이러다 밥 먹기 전에 배 부르겠다고, 너도 대충 먹으면서 하라고 태형에게 우물거리며 말하곤 약지에 반지를 낀 왼손을 반바지 주머니 안으로 숨겼다.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해가 저무는 야외에서 내 손을 뚫어지게 쳐다 볼 직원이 있을까. 누군가 발견한다 한들 그것이 태형의 것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라고 생각하겠어, 디자인이 독특한 것도 아니니 하루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바베큐를 주축으로 직원들이 끓인 된장국과 갓 지은 밥, 쌈채소와 김치 몇 종류를 테이블마다 늘어놓고서 저녁 식사를 했다. 당연하게도 태형이 내 옆자리에 앉았는데, 그가 낮까지 얼마나 죽상이었길래 오빠 지금은 기분 좋아보이네요, 라는 직원들의 말에 태형은 생글생글 웃으며 이제 괜찮아졌거든, 이라고 대답했다. 그렇구나. 괜찮아졌다니 다행이네. 나는 말 없이 밥알을 깨작이다가도 아까 그가 내 안쪽에 뿌려놓았던 것을 차마 다 빼지 못하여 속옷이 젖어들어가는 감각에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도 이사님 왜이렇게 잘 못 드시냐면서 고기를 내 밥그릇 안으로 날라주는 태형의 젓가락에 나는 원망하듯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최영이나 성지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걔내들이나 챙겨주라고 타이르기라도 했을 텐데, 둘은 저녁까지 거르며 방에 틀어박혀서 대체 뭘 하는 건지.
생각보다 술을 많이 먹는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왜인가 싶었는데 공장 직원들은 이만 내려가보겠다며, 설거지까지 깔끔하게 마치고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대부분 가정이 있는 분들이고 젊은 직원들도 그들의 차를 얻어 타고 왔기에 사전에 그렇게들 얘기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사무실 직원들의 대표로 그들을 배웅했는데, 다른 공장 직원들이 차량에 탑승한 걸 확인한 박 과장과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여기까지 다른 직원들 이끌고 오시느라 수고하셨고, 잘 놀다가 가시는 거였으면 좋겠네요. 내가 말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박 과장도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아, 그리고 축하 드립니다.”
대뜸 축하한다는 건 뭔지.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예? 라고 물으니, 그가 왼쪽 손가락 위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결국 두 분이 그렇게 되셨군요.”
“아, 아니…”
“괜찮습니다, 이상하게 생각 안 합니다.”
아…… 이 짓궂은 양반이. 난처하여 마른 세수를 하며 무어라 변명을 해야 할지 떠올리던 중, 태형이 등 뒤로 다가와서는 보란듯 내 어깨 위로 팔을 감으며 이사님, 하고 불렀다. 변명을 할 수도 없게 돼버렸다.
“박 과장님 가신대. 인사 드려.”
“과장님, 오늘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금방 가신다니 아쉬워요.”
“예 태형씨, 우리 민 이사님 잘 부탁 드립니다.”
태형도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를 챘는지 아, 하고 깨달은 듯한 소리를 내더니 박 과장이 내민 손을 잡고는 가볍게 악수했다. 그럼요, 저희 예쁘게 잘 살겠습니다, 라는 태형의 대답에 박 과장이 껄껄 웃었다. 내가 고개를 떨구고 깊은 한숨을 내뱉는 동안, 박 과장은 이만 가보겠다며 인사하곤 주차장을 향해 사라졌다.
공장 직원들의 차가 주차장에서 모두 빠져나가자 태형이 등 뒤에서 어깨를 안아왔다. 컴컴한 시골길, 주황빛 가로등만이 드문드문 길가를 비추고 매미와 개구리 우는 소리만이 아득히 들리는데, 나도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몸에 머리를 기댔다. 피곤해. 몸도 찝찝하고 샤워 생각이 간절한데 다른 직원들은 술을 마셨는지 노래방 기계를 꺼내와 거실에서 노는 통에 제대로 씻을 수도, 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집에 가고 싶다.”
너도 같은 생각일까. 내가 혼잣말처럼 뱉고는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자 쪽, 하고 입술을 맞춰온다. 귀엽긴. 그가 흐흐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집에 가면 하미도 없는데 말이예요.”
“보고 싶어?”
“그 집에 가있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그가 말을 줄이며 내 어깨위로 콧날을 묻고서 가볍게 부비는데, 어쩐지 그가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것은 왜인지. 나는 기가 차서 허, 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지금 우리 집은 빈 집이지. 소리를 죽이지 않아도 괜찮은 밤이고, 아마 처음일 거다.
“씻고 싶어.”
“.......”
“가방 챙겨 올래?”
내 말에 태형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 뺨 위로 뽀뽀를 하더니 펜션쪽으로 뛰어갔다. 하여튼 밝힌다니까. 나는 푸스스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최영이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나랑 태형이는 먼저 올라간다, 수고해라’
후일담
“아빠!”
고작 이틀을 맡겼다지만 잘 먹어서인지 뺨에서 윤광이 반지르르 도는 하미가 나와 태형을 향해 달려왔다. 우리 둘 사이에 쏙 들어와 해맑게 웃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 상황이 불편하기만 할 뿐이다.
간밤이 몹시 길고 문란했다. 무슨 맺혔던 원이라도 있었는지 몸의 보이지 않는 곳곳에 입술 자국이 찍혔고, 해볼 수 있는 곳에서 다 해본 것 같았다. 거한 한풀이를 한 격이라 나는 기력을 잃고서 기절하여 언제 잠들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데, 태형은 새벽같이 일어나서 단장을 시작했다. 그래, 단장. 웬 단장인가, 내가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눈을 떴을 때 태형은 멀끔한 얼굴로 헤어 세팅을 끝낸 데다가 옷도 비싼 정장으로 걸친 상태였다.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침대 안에서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살풋이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요, 하미 데리러 가야죠.
하미 데리러 가는데 풀 세팅이 왜 필요하지? 더군다나 바로 옆 동이니 여차하면 하미 혼자 와도 되는 거리이고, 데리러 간다고 해도 나 혼자 가야지, 네가 거길 왜 가…? 나는 불안한 예감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 혼자 갈게, 내가 말 했잖아. 앞으로는 그 집에 다시는 안 갈 거라고. 그러나 그는 완전무결한 얼굴을 하고서 부드럽게 웃으며 내 눈에 붙은 눈곱을 떼주었다.
그리하여 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전 처가의 거실에 나와 태형이 나란히 앉게 되었다. 그가 한껏 꾸민 데 반해 나는 그나마 구색이라도 맞추고자 출근할 때나 입는 캐주얼 정장을 입고 오긴 왔는데 기분이 묘했다. 마치 포교를 하러 기독교 집안에 들어온 두 몰몬교 신자같이 보일 것도 같았다. 맞은 편 소파에 나란히 앉아 우리를 보는 전 처의 부모님 또한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마침 배가 있으니 깎아오겠다고, 하미도 좋아하니 먹고 가라는 어머니쪽 말에 태형이 괜찮습니다, 라고 정중히 사양했다. 분위기가 더 이상해졌다.
“윤기야, 이 분은…?”
“윤기 애인 되는 사람입니다.”
태형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며 바지런히 떨어져있던 내 손을 잡아왔다. 얘가 진짜 왜 이래. 내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두 분의 표정이 안 봐도 눈에 선했다.
“그래…?”
“하미 잘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제 더 뵈러 올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연습이라도 한 것인지 말을 청산유수처럼 쏟아내는데 나는 이제야 그가 굳이 이 자리까지 오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본인이 직접 끝내러 온 것이다. 나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이들이 그의 트라우마여서. 태형의 말에 그들이 멋쩍게 웃더니 아버지쪽에서 입을 열었다.
“혹시 왜…?”
“윤기가 전 처가에 올 일은 이제 더 없을 겁니다. 제가 책임 지고요.”
그렇게 말하는 태형의 태도가 결연했기에 눈 앞의 두 사람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겠지, 그들에게 동성애는 죄악일 뿐더러 동성 결혼이라는 건 한국 사회에서 꿈도 꿔본 적 없을 테니까. 하물며 제 딸의 전 남편이었던 사람이. 태형은 이 자리에 나와의 결혼 의사를 통보하러 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 놈은 왜 이렇게 진지해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지금껏 하미 돌봐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너 원래 게이였니?”
이제 와서 내게서 이혼의 귀책 사유라도 찾는 것일까? 나는 전 장모의 순진한 질문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이번에 좋아하게 된 상대가 남자인 것 뿐입니다.”
“너 그럼 하미는…”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 지 모르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형과 잡았던 손으로 하미의 손을 붙잡고 그 집을 나왔다. 어후, 어색해. 하미 또한 오늘이 전 외조부모와의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는지 그들에게 손을 오래도록 흔들었다만, 크게 슬퍼하거나 섭섭해하는 기색은 안 보여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몸을 싣고 나서야 후, 하고 편하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태형을 흘끗 보자 그 또한 꽤 긴장했었는지 한결 후련한 표정이었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이런 말 해보는 거 처음이었어요.”
“나도.”
“지금 얼굴 되게 빨간 거 알아요?”
등 뒤의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까부터 얼굴이 뜨거웠다. 미치겠네. 나는 엘리베이터 바닥만 보며 입술만 꾹 깨물었다.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