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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며

Summary:

진짜 짧은 파낙썰…

주의: 캐릭터의 죽음, 심리적 신체적 부상 묘사, 이인증, 배드 엔딩

다친 파이논이 나무정원에 갔다가 생기는 일

Work Text:

"파이논, 집중해야지"

눈을 뜨면 온 몸에 붕대가 감겨진 모습으로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 싶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반대이다. 창문을 통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몸뚱아리는 저를 거부하고 있었다.

"파이논"

아낙사 선생님이 날 부르시는데, 답을 해야하는데 그 무엇도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선생님은 얕은 한숨을 쉬더니 계속해서 굳어있는 몸을 풀어주었다. 그러니 손으로 밀어내는 것이 보인다. 흐릿하게나마 괜찮다고,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성대의 떨림도 맞잡은 손의 온기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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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아이를 지키려다가 뒤에서 급습을 당했었다. 대검을 한 손으로 들 수 있다고는 해도 몇 시간 내내 휘두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작고 어린 소녀를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병사들 중에서도 부상을 당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파이논은 이미 대부분에게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철수하는 길이었다. 옆구리가 날카로운 발톱에 찢어진 상태로 진흙탕에 구르며 눈물을 참았다. 그 작은 손이 더 큰 공포에 떨지 않도록 꼭 잡고 있었는데, 더 꽉 잡았어야 했는데. 그가 검으로 간신히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을 때 도망친 아이는 순식간에 마물들의 습격을 받았다.어째서 그때 키레네가 생각난 걸까. 연약하게 스러져버린 아주 어린 시절 악몽이 눈 앞에서 재현된 것만 같았다. 집중해야 함에도 그의 몸은 남의 것인마냥 멋대로 굴었고 팔이 물리자 고통에 몸부림치다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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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은 나무 정원 밖으로 나가는 것도 금지야"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무너지는데 싸우지 않으면 어떡하라는 거지? 한 사람의 상처가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기나 할까. 적어도 그는 구세주로서 전장에 나서고 사람을 구하고 몸을 던져야했다. 한가롭게 병상에 누워있을 상태가 아니란 말이다.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어. 네 몸 상태를 봐서도 그건 바로 알 수 있다만. 스스로를 얼마나 과대평가하는 거지? 근육까지 찢어지고 기절까지 했던 상태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는 걸 모르는 거야?"

파이논은 삐걱거리는 머리를 써서 그의 논리를 반박하려 했다. 황금의 후예는 빨리 회복하는 편이고, 오크마를 위해서라도 아글라이아님이 필요로 할 수도 있었다. 어떤 병사도 다쳤다고 모든걸 던져두고 누워있지는 않는다. 움직일 수 있는건 다 움직여서 도움이 되어야 하니까. 일조할 수 있다면 그것이 늘 옳은 일이니까.

"파이논!"

그는 몸을 움찔했다. 분하고 억울하고 한심스러웠다.

"너는 오로지 너이기 때문에, 그리고 마이데이가 운 좋게 널 발견해준 덕분에 살아남아서 여기 누워있는 거야. 더 그따위 고집을 부렸다간 진짜로 죽어버릴 거라고!"

무서웠다. 아낙사 선생님이 화를 내는 것도 두려웠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뻔 했다는 것이 더 두려웠다. 파이논은 얌전히 누워 눈을 감았다. 선생님이 보내주지 않는다면 빨리 회복하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파이논은 둘 다 준비하기로 했다.

 

———

 

한편의 멍청한 연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많이 자고 주는 걸 잘 챙겨먹고 틈틈히 몸을 움직여 주는 행위 자체가 준비된 극의 일부인 것 마냥 어색하고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파이논은 주인공일까 관객일까. 그는 언젠가 이 문제로 아낙사 선생님과 논의를 하고 싶어 그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조금 더 평화로운 시대였으면 좋았으련만 아낙사는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나무 정원 자체가 과포화 상태였다. 그럼에도 도와주지 말라는 아낙사의 강력한 말에 그는 멀찍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이 난장판 속에서 그의 고민은 얼마나 사소한 것일까. 시야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그들의 아우성이 느려졌다. 희뿌연 연기는 분명히 가짜였다. 일주일은 잠을 자지 못한 얼굴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히아킨이 있었고 몇 안되는 의사들이 가운에 묻은 피조차 닦지 못한채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파이논은 발걸음을 돌렸다.

신발이 바닥과 닿는 소리가 몸을 타고 울렸다. 빙빙 도는 하늘과 사람들의 소리에 그는 심한 울렁을 느꼈다. 당자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뒤로 돌아 마주친 아낙사의 눈은 자신을 뚫어버릴 듯 바라보고 있었다. 파이논은 그제서야 익숙한 병동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구석에 웅크려 앉으면 옆구리도 팔도 욱씬거렸다. 그게 스스로에게 주는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감각이 슬그머니 사라져가는게 더 무서웠다. 복도 거울에 대고 저를 빤히 바라본 적도 있다. 눈을 크게 떴다가 감고 손을 쫙 펼쳐서 흔들어도 보고 머리카락을 헝클이기도 했다. 감각이 분리된 사람마냥 제각각 따로 놀았다.

그가 이름을 부르면 복도를 지나가던 선생님은 늘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유가 없으면 나중에 찾아오겠다고 했고, 있다면 상처가 얼마나 나았는지 확인해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파이논은 아낙사의 손을 잡고 안겨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양쪽으로 5센치씩 분리된 감각이 아낙사가 저를 확인해 줄때만, 그와 닿아있을 때만 잠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파이논, 내가 일찍 자라고 하지 않았어?”

밤 늦게서야 졸고 있는 아낙사 선생님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담요를 덮어주어도 선생님은 바로 깨서 그를 걱정해주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선생님이야 말로 주무셔야 한다고 해도 아낙사는 고개를 저었다.

“밤을 새우는 거는 익숙하니까 괜찮아. 히아킨티아도 다른 의사들도 돕고 있으니까“

파이논이 볼멘소리를 할 것 같으면 그는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뒤 돌아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저를 보고 고집이 세다며 회복에만 전념하라는 말과 다르게 아낙사는 더 고집을 부렸다.

“나한테 잔소리하는 거야 파이논? 하하하! 음… 고마워 기분이 좀 나아졌어“

아낙사가 웃는 건 좋았지만 곧바로 다시 피곤한 모습으로 돌아가는건 싫었다. 아프지 않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몰래 일을 도운 것도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물수건을 빨아오고 재료 손질을 돕는 것처럼 사소한 일에도 고맙다고 웃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약간 안정이 되었다. 아낙사도 이정도는 가볍게 넘기기로 했는지 그의 상태만 한번 체크한 뒤 돌아갔다.

나무정원에는 꺼져가는 생명들이 많았지만 그래서인지 그 어느곳보다 눈부셨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크렘노스의 병사가 회복해 감사를 표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며 아이도니아에서 가족을 잃은 어머니는 환자들이 추위에 떨지 않도록 담요를 만들기도 했다. 태풍의 눈에 들어온 아주 조금의 평온이었지만 그는 이 사소한 것들이 너무 소중해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물론 이건 살아있는 자들의 이야기였다.

 

———

 

물결은 주위를 휩쓸고 다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이마저 삼켜야겠다고 결심한 듯 달려들었다. 파이논은 아직 전부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다시 검을 들었다. 이곳은 바람만 불어도 꺼질듯한 생명이 모여있는 곳인데 태양마저 삼키는 검은 물결이 도래한다면… 차라리 몸이 갈갈이 찢겨 죽는 편이 덜 고통스러울지도 몰랐다.

사람들을 후방으로 대피시키는 것 마저 꼬박 하루가 걸렸다. 기세등등한 마물들은 포효하고 뛰어올랐다. 그나마 전투 경험이 있는 자들이 모두 나섰지만 몸이 성한 자는 거의 없었다. 피로와 고통과 절망.

“파이논님! 전투 지휘를…!”

그는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한다. 당연하게도 그가 나서야 한다. 그가 아니면 나설 사람이-

“우리의 목표는 후퇴다”

파이논은 고개를 휙 돌렸다. 아낙사가 졸음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흰… 오크마로 후퇴해야해”

그도 이해했지만 마땅한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 많은 인원을 버리고 갈 수는 없었으니까. 힘들게 모아둔 모든 것을 버리고 간다고 해도 사람은 그럴 수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싸우다가 전멸할 수도 없었다. 사방으로 포위를 당해 앞으로 뚫고 나아가야했다. 오히려 더 조여오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오크마로 당도 할 수 있다는 데에 희망을 걸 수 있을 것이다. 병사들도 전부 아낙사와 파이논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내게 방법이 있어 …물론 네가 싫어하겠지만“

그래. 파이논은 정말 싫었다. 제가 전방에 나서는 것도 선생님이 후방에서 지원을 해주는 것도 익숙하다. 그렇지만 이미 전방과 후방의 차이는 사라졌고 후방이라 불리는 곳은 단지 오크마로 가는 길의 반대 방향일뿐, 마물들이 쏟아져오고 있었다. 세르세스의 신성으로 견디고 그와 함께 본인의 힘을 방출해서 방패가 된다라…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고 방법도 하나이다. 나무 정원에 몸을 위탁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생존 확률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줄 이 기술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아낙사고라스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파이논에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본인도 이미 다친 상태에서 무리를 하다간 상황이 더 악화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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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화를 하고 싶었다. 아낙사를 설득하고 싶었다. 어쨌든 머리로 이해한 바와 마음이 원하는 바가 다른건 너무나 익숙했으니까. 사람들을 이끌고 돌파하는 길에 손에 썰리는 마물들의 감각과 바닥에 착지하며 다리가 찌르르한 기분도 무뎌지고 사라져갔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것은 고마웠다는 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채 도망가는 자가 겪어야할 시련이었을까.

불을 쫓는 여정을 한다는 것은 늘 무언가를 잃어간다는 것.

고향을 잃고 친구를 잃고 가족을 잃고 스승마저 잃는다면 그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묻고싶었다. 운명이란 어째서 이렇게 가혹한 것일까. 차라리 꿈이라고, 이 모든게 한 편의 드라마라고 믿고 싶었다. 그럼에도 꺼져가는 감각은 현실이라고 계속 그에게 알려주었다.

나무 정원의 한가운데서 하늘 높이 뻗어나오는 빛은 거대한 마법진처럼 펼쳐졌고 마물들을 밀어냈다. 밤이라는걸 잊을 만큼 환하게 빛나는 빛이 그들을 인도했다. 나무정원을 빠져나올 때까지. 마지막 병사가 한계선을 넘는 순간 빛이 삼켜지고 번쩍이다 꺼져버렸다.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앞으로, 앞으로..놀랍도록 많은 인원이 오크마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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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논은 아글라이아에게 상황을 설명하곤 자리를 비웠다. 두 걸음을 내딛으면 정신은 한발짝 움직인다. 그렇게 자꾸 자꾸 분리가 되어 어느새 몸이 저 멀리 도망친 꼴이 되어버렸다. 파이논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앉아버렸다. 마음은 몸으로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이대로 달려가면 아낙사의 시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자신마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더 높다는 걸 알기에 고통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앉아있는 것도 힘들어 털썩 누워버렸더니 눈물이 흘렀다. 몸은 더 이상 작동을 하지 않을거라고 항의하고 정신은 저 멀리서 밤하늘을 보며 땅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누군가 지나가다가 보면 영락없이 객사한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다친걸 회복하지도 못하고 사람들을 보호해 여기까지 온 구세주가 죽었다해도 이상한 일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구세주라는 이름만 아니었으면, 그랬으면 이미 저번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

아낙사는 그를 구세주로 부르지 않았다. 온전한 이름과 과거에 파묻어둔 고향까지. 밀밭에 선생님이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해봐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너의 꿈은 무엇이지?

파이논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뭔가 알 것만 같았다. 아끼는 사람들과 평범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 그들이 행복하게 소원을 이루는 것이 꿈인데... 동시에 그는 이제 이 꿈을 실현할 수 없었다.

밤하늘의 별이 쏟아져내리고 그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잠깐, 아주 잠깐만 눈을 감기로 했다. 내일이 오기 전에 아낙사를 좀 더 기억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