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망할 엘리베이터에 갇혔다. 하필 지금 고장이 날 줄이야. 차가 막혀서 정비사가 오기까지엔 시간이 걸린다는 알프레드의 연락이 왔다. 한숨이 나왔다. 그냥 엘리베이터의 손잡이를 딛고 도약해서 환풍기를 부숴서 탈출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엘리베이터 안에는 동행이 있었다. 브루스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좀 걸린다고 하네요.” 자신의 말에 남자는 등을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브루스는 두 걸음 걸어 맞은편 벽에 기댔다.
“우리 구면이죠? 저는……”
“브루스 웨인이죠.”
“그쪽은 기자 양반이고. 캠프?”
“켄트입니다.”
“아, 겐츠.”
“켄트…… 됐습니다.”
남자의 입매가 씁쓸하게 굳었다. 브루스는 그 얼굴을 피해 머리를 벽에 기대며 천장을 응시했다. 브루시 웨인을 만나면 보이는 두 반응 중 하나였다. 저 사람보다는 내가 그나마 낫다는 안도 혹은 경멸. 남자는 후자였다. 두툼한 안경테 너머로도 가릴 수 없는 기자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은 면도날처럼 그를 훑고 지나갔다. 익숙해진 지 오래인 눈빛이었지만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어서 그런지 브루스는 어깨 근육이 긴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인터뷰 좀 해주시죠.”
한참의 침묵을 뚫고 나온 남자의 말이었다. 앞뒤 자르고 대뜸 본론부터 얘기하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신입이었다. 브루스 웨인의 인터뷰를 신참이 맡는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브루스는 이마를 문질렀다. 누가 인터뷰를 하느냐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한테도 인터뷰해주고픈 마음이 없었다. 대중 앞에 보이는 이미지에 맞춰서 대답하려면 생각을 두 번 해야 했다.
“이봐요, 켈트 씨. 브루스 웨인의 시간은 매우 비싸요.”
“켄트입니다. 첫째, 저는 당신 아들이 아니고 둘째, 어차피 기다려야 하잖아요. 뭐 하려고요? 공상?”
감자포대 같은 옷을 입고 어리숙한 곱슬머리를 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입술이 내뱉는 말은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브루스의 입술에 피곤한 미소가 걸렸다. 자신은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못 됐다.
“그럼 한 가지 질문만 받죠.”
남자의 파란 눈동자에 곧장 빛이 스쳤다.
“웨인 씨, 배트맨……”
아니나 다를까. 브루스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거 말고.”
“……이 불법 자경단원으로 고담을 활보하는 것을……”
브루스는 성큼 다가가 허리를 숙이며 손으로 남자의 어깨 옆 벽을 짚었다. 기자의 손에 들린 수첩에는 정체불명의 필기체가 휘갈겨져 있었다. 브루스는 단어를 으깨듯 내뱉었다.
“이봐, son. 그 염소 한 입 거리 같은 수첩에 적어요. ‘배트맨에 대해 브루스 웨인은 이렇게 말했다.’ 적었어요? 그 밑에 적어요. ‘노 코멘트’라고.”
남자는 받아 적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다. 뿔테 안경과 검은 속눈썹 너머의 눈동자는 이질적으로 파랬다. 그 시린 색깔의 눈동자에서 브루스는 뜨거운 열기를 보았다. 속으로 신참 기자를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했다. 달콤한 사탕발림이나 유려한 말재주는 없어도 남자에게는 기가 있었다.
“노 코멘트는 무효로 치고 한 가지 더 묻죠. 웨인 씨, 당신은 원래 이렇게 싸가지가 없나요?”
“이제 알았어요?”
딱딱하게 굳어있던 기자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브루스는 남자의 앞에 앉았다. 기자는 수첩과 펜을 도로 가방에 집어넣고 있었다. 이번에는 억만장자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인터뷰 안 하려고요?”
“당신에게서 인터뷰를 따느니 국장님에게 목이 졸리겠어요.”
“사람 보낼게요.”
“왜요?”
“동영상 찍어오라고.”
“웨인 씨, 정말 못 됐네요.”
“알아요.”
브루스는 세운 무릎 위에 팔을 올렸다. 남자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그를 향한 혐오가 한층 누그러졌다. 브루스는 새삼 제 앞의 남자가 어리단 것을 절감했다. 저돌적일 뿐 아니라 단순했다. 감정이 표정에서 그대로 다 드러났다. 저래 가지고서 기자 일 어떻게 하려고. 그렇다고 해서 불편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에게 기자는 항상 불편했다. 자신은 진실을 숨기는 것이 업이었고 그들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 업이었다. 지금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 또 불쑥 배트맨이 어쩌고 조커가 어쩌고 이야기를 꺼낼지 몰랐다. 브루스는 젊은 기자가 들이박기 전 화제를 전환해두는 편이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때마침 남자는 핸드폰이 부숴져라 두드려대고 있었다.
“여자친구?”
“네? 아뇨, 맞아요, 네. 선배예요. 어디 있는지 찾을까 봐 연락을 해두려고 했는데 선배가 이미 연락을 했었어요. 부재중 전화가 한 통, 두 통…… 문자도 쌓였고…… 전 이제 죽었죠.”
“여자 친구한테 미안하다고 해요.”
“여자 친구 아니라니까요.”
“얼굴이 빨개지는데?”
“우리 둘 중 누가 기자죠?”
“아무튼 컬트 씨, 얘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지지만 여자 친구는 아닌 여자분에게 꽃이라도 보내요. 브루스 웨인의 조언이니까 믿어 봐요.”
남자는 안경테 너머로 눈을 깜빡였다.
“왜요?”
이번엔 브루스가 눈을 깜빡였다.
“기자 양반, 어디서 왔어요?”
“스몰빌이요.”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군요. 그럼 말이 되네요.”
“뭐가 말이 되는데요? 스몰빌이 어때서요?”
“발끈하지 말죠, 시골 남자 씨. 그럼 이렇게 말해두죠. 당신보다는 여자 경험이 두 배…… 아니 몇십 배는 더 많은 사람의 조언이라고 생각해요.”
“몇십…… 지금 부자라고 자랑합니까?”
“돈이 많은 게 물론 장점이 될 수 있기는 하지만…… 감정 상하지 말고 들어요, 캣트 씨. 당신 완전 목석같아 보여. 여자 꼬셔본 적이 있기는 해요?”
“그러는 당신은 여자 꼬시는데 도가 텄고요?”
“기자 양반, 확실히 합시다. 우린 급이 다르죠. 누가 그러던가요? 내가 꼬신다고.”
예리한 파란 눈동자가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것이 느껴졌다. 브루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곤란한 질문을 피하며 시간을 죽이느니 이 나무막대같이 뻣뻣한 남자에게 브루시로서 보낸 세월 동안 익힌 유혹의 기술 한두 가지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억만장자의 손끝이 남자의 어깨부터 손목까지 스치고 내려갔다.
“만약 당신이 바에 왔어요. 정말 이상형인 여자가 당신 옆에 이렇게 앉아서 술 한 잔 사도 되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 거죠?”
아래를 배회하던 브루스의 손이 남자의 허벅지에 내려앉았다. 놀랍도록 단단한 근육이 만져져서 속으로 감탄을 삼키는데, 남자의 얼굴엔 불편함이 역력했다.
“뭐하는 겁니까?”
“뭐라고 대답할 거냐고 물었잖아요.”
브루스는 남자의 허벅지를 격려하듯 다독이다가 손을 뗐다. 남자의 손이 재빨리 제 손이 있던 곳을 채웠다.
“어…… ‘저는 이미 계산했습니다’?”
“프흡.”
브루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의 이마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같잖은 것에 웃음을 터뜨리는 이상한 놈으로 보는 시선이었다.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입에 발린 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브루스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여자 친구 있기는 했습니까, 칸프 씨? 뭐, 이런 모습을 귀엽다고 생각하는 여성도 있긴 하겠죠.”
“어떤 돈만 많고 머리는 빈 속물의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과 속이 빈 화려한 칭찬에 넘어가는 여자라면 저도 싫습니다.”
브루스의 손이 남자의 바지선을 따라 미끄러져 신발로 향했다. 풀려있는 한쪽 구두끈을 묶으며 브루스는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로 남자와 시선을 맞췄다.
“그런 전략을 나 같이 돈 많고 머리 빈 속물들은 유혹이라고 하죠. 당신의 그 지루할 정도로 정직한 모습에 넘어오는 여자들 말고, 당신이 원하는 여자가 한 명쯤은 있지 않았나요? 아, 당신 발목이 예쁘군요.”
“예?”
브루스의 손이 가볍게 남자의 종아리, 허벅지, 골반을 스치고 올라가 허리에 닿았다가 가슴에 내려앉았다. 억만장자의 굳은살이 박인 손아래 느껴지는 가슴이 넓고 단단했다. 그의 손이 광활한 가슴을 훑으며 목 끝까지 잠긴 단추로 향했다. 우아한 손가락이 남자의 단추를 하나, 둘, 세 개까지 풀었다. 맨살이 드러났다. 곧은 쇄골과 억센 근육이 깜빡이는 조명 아래서 꿈틀거렸다.
“이런 몸이라면 브랜드는 중요하지 않죠. 다만 사이즈는 좀 줄이고……”
브루스의 손이 남자의 머리로 향했다. 기자가 단박에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악력이 강했다. 브루스는 쯧, 혀를 한 번 차며 손목을 틀어 유려하게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무릎을 세워 일어선 그는 한 걸음 상대와 거리를 좁혔다. 그의 한쪽 무릎이 남자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가고, 한쪽 손으로는 남자의 어깨 위 벽을 짚었다. 그의 손가락이 굽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머리를 이렇게…… 조금 손보면……”
“비키시죠, 웨인 씨.”
셔츠 목깃에서 탈출한 남자의 목젖이 울렁거렸다. 브루스는 순순히 남자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던 손을 떼는 대신 상체를 기울였다. 남자의 손이 제 양팔을 움켜쥐며 접근을 저지했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합니까, 컴프 씨?”
브루스는 남자의 턱선이 짙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의 목덜미에 속삭였다. 향수를 뿌리는 건 어때요. 들이붓지 말고, 한 방울만. 그리고 마침내 남자는 브루스를 밀어냈다. 찰나였지만 무릎이 공중에 뜬 것 같았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품이 넉넉한 옷 속에 감춰진 몸이 잘 짜인 근육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보다 반 뼘쯤 큰 남자를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 괴력의 소유자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화가 난 얼굴이었다. 아무 의미 없이 스친 손끝에도 귀가 빨개져서는 뻣뻣하게 굳는 반응이 재미있다고 너무 놀린 모양이었다.
“취했습니까, 웨인 씨?”
“제게서 술 냄새가 나덥니까, 기자 양반?”
브루스는 무릎을 털고 일어선 후, 흐트러진 양복을 가다듬었다. 놀리는 재미도 있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본 신참 기자는 보는 재미도 있는 남자였다. 아름답고 강한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이 원하는 힘과 자신이 버렸던 순진함을 동시에 가진 사람은 진귀했다. 발정 난 플레이보이 놀이를 오래전에 졸업하지 않았더라면, 그 곧은 아름다움에 안겨 제 자신도 그와 같은 양 하룻밤 꿈을 꾸어도 좋았으리라.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 말이 옳다는 겁니다. 나 같은 사람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돈을 써서 가지죠. 하지만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어요. 당신 말처럼 겉만 번드르르한 거짓말과 녹색 종잇장으로 나는 여자들의 마음이 아닌 하룻밤을 삽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전부죠. 하지만 당신은 하룻밤 이상을 원하겠죠? 스몰빌이니까. 내가 방금 한 조언은 당신보고 누군가의 마음을 가지고 싶다면 거짓으로 위장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제 뜻을 잘못 이해했다면 기자 공부를 다시 하고 오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요점을 찾아내는 것이 기자의 덕목이니까요.”
브루스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비사가 5분 내로 도착할 것이라는 알프레드의 연락이 왔다.
“요약하자면 당신이 원하는 여자가 있다면 준비하시라는 말이었습니다, 커트 씨. 아르마니 양복도 훌륭한 전투복이 될 수 있답니다.”
남자는 내민 손을 잡았다. 브루스는 남자를 일으켜 당겼지만, 아래서 끌어당기는 힘이 더 강했다. 억만장자의 몸이 기자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증명이었습니까?”
남자의 육감적인 입술이 코끝을 스쳤다. 말만 저돌적인 게 아니었군. 브루스는 남자의 안경테를 잡았다. 그리고 양 손목이 모두 잡혔다.
“뭐가 말이죠?”
브루스는 입술 사이의 거리를 좁히며 입꼬리를 당겼다. 기자의 목에서 긁는 소리가 났다.
“인정할게요.”
브루스는 되묻지 않았다. 들어오는 혀를 받아들였다. 남자의 혀는 그 주인을 닮아 저돌적이고 강했다. 치열을 두드리며 훑고 들어가더니 그의 혀를 곧장 얽어맸다. 손목을 붙잡고 있던 힘이 느슨해지고, 대신 뒤통수가 잡혔다. 그의 입안을 모두 점령할 것처럼 뒤통수를 끌어당기며 남자의 혀가 더욱 깊숙이 침투했다. 브루스는 허벅지를 살짝 들어 올렸다가 내리며 위치를 조절했다. 그의 엉덩이가 남자의 다리 사이를 스쳤다.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호흡이 부족해 시야의 끝이 까매질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정비사가 도착했고, 브루스는 제 뒤통수를 감쌌던 남자의 손을 잡아 내리며 그의 무릎 위에서 일어섰다. 어쩌면 기자의 손을 잠시 제 엉덩이를 스치게 했을지도 몰랐다.
“당신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어.”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브루스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지친 미소를 입술에 얹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다가 마침내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졌다. 브루스는 엘리베이터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시선을 파란 눈동자로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웨인 사의 회장은 제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꽃을 사 가세요, 클락 켄트 씨.”
“브루스 웨인.”
“바로 나죠.”
억만장자는 떠나고, 데일리 플래닛 기자의 가슴팍에는 명함 한 장이 꽂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