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주위에 시든 잡초 한 뿌리 없는 황량한 사막이었다. 그 사막의 한복판에는 마치 달의 크레이터와 같은 거대한 구덩이가 패여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았는지 그 주위로 흙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배트-항공기를 몰며 브루스는 시내 한복판이 아님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브루스는 인터콤을 작동시켰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 정도 거리에서는 그냥 육성을 이용해도 들렸겠지만, 지금 그의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클락? 너 정신 차린 거 다 알아. 들리면 대답해.”
상대에게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끙 앓는 소리뿐이었지만, 의식이 있다는 정보를 알았으니 브루스에게 대답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아, 클락.” 브루스가 한탄했다. “항상 히치하이커를 조심하라고 들었는데. 특히나 알몸의 히치하이커를 말이야. 하지만 너는 예외로 해줄게.”
농담도 진지하게 하는 목소리에 다른 때 같았으면 장단을 맞춰줬겠지만 클락은 이마만 감쌌다.
“브루스…… 머리 울려.”
몸을 일으킨 클락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인터콤을 꺼버렸다. 큰 폭발 중에도 어찌어찌 살아남아 작동하는 조그만 기계가 용했다.
항공기가 근처에 착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뿐이었다. 그 안에서 운전하고 있는 남자가 뭐라고 꿍얼거리고 있는지, 클락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클락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평범한 인간의 것이었다. 겉도, 속도.
몸을 일으켰다. 체중을 끌어당기는 중력이 평소보다도 무겁게 느껴졌다. 클락은 비틀거렸다. 눈앞에 나타난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딛고 올라섰다. 맨발에 닿는 쇠의 감촉이 선뜩했다.
“클락. 기분이 어때?”
브루스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유달리 산뜻한 것 같았다. 클락의 기분과는 정반대였다.
“방금 조리가 끝난 스테이크 같아.”
클락이 눈앞의 남자를 잘 알지 못했더라면, 분명 카울 뒤에 감춰진 얼굴이 웃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있잖아, 클락. 네 새로운 능력을 실험해 볼 때마다 내가 널 데리러 올 수 없다는 거 알지.”
클락은 제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 남자를 무시하고 물을 들이켰다. 시원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에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계획을 짜거나 아니면 네가 이 배트-항공기 움직이는 데 드는 연료 비용을 내는 게 어때.”
“내 월급에서 떼어 가.”
“기자 월급? 그런 쥐꼬리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 켄트.”
브루스가 좌석 뒤를 가리켰다.
“언제나처럼 알프레드가 너 먹으라고 음식 싸둔 게 있어. 옷이랑 담요는 의자 밑에 있고.”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피크닉 바구니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빵과 와인 병이 보였다. 알프레드, 당신은 성자예요. 클락은 알프레드가 메타휴먼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브루스의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냉랭한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클락은 쑤신 관절을 움직여 그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막 엉덩이를 붙이려던 찰나에 다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클락? 부탁 좀 들어줘.”
부탁을 받은 남자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박쥐의 차림을 한 남자는 제 목숨이 걸려있어도 부탁하는 법이 없었다.
“이번엔 옷 입기 전에 앉을 생각하지 마.”
끙. 클락은 목 뒤로 앓는 소리를 삼켰다.
능력은 하루면 되돌아왔다. 언제나 그랬다. 평소와 비슷한 양의 햇볕을 쬐거나, 하늘이 흐린 날에는 와치타워에 올라와 태양 빛을 직접적으로 쐤다. 다시 능력이 충전될 때까지는 절대 24시간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더이상 네 택시기사 노릇 할 수도 없으니까, 다른 계획이 있는 게 좋을 거야.”
브루스가 그렇게 말했다. 배리가 하는 게임 소리를 배경으로 하고, 다이애나에게 커피를 건넨 그의 입가에는 미소 비슷한 것이 걸려있었다. 그의 말에 클락은 뭐라고 답했던가.
“난 언제나 인간이 되면 어떨까 궁금했어.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인간임을 느껴본 적은 없잖아. 지난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느껴봤는데, 마음에 들더라고. 특히 음식 말이야.”
곧장 브루스의 비난하는 듯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음식? 정말로? 많고 많은 것 중에?”
하지만 검은 카울 아래의 입술은 분명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클락은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 친구의 미소는 정말 드문 것이었고, 접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웃는 얼굴은 그쯤하고, 궁금한 게 있어.”
다이애나의 차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능력이 완전히 돌아왔는지, 어떤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알아야겠어.”
“좋은 지적이야.”
게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배리가 동의했다. 아서가 그의 어깨를 치자 마지못해 게임을 종료한 배리는 투덜거리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럼 실험해보는 수밖에 없겠지?”
클락은 구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배트맨은 커피 컵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
민첩성, 힘, 기타 등등. 클락은 모든 방면에서 정상이었다. 클락은 사실 저스티스 리그 멤버들이 실험해보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힘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JL1-1A인지 뭔지 하는 테스트는 사이보그가 즉석에서 만들어낸 이름임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어울려준 이유는, 클락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이 새로운 능력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했다. 최근 실험해보고 있는 것은 일종의 업그레이드된 히트비전과 같았다. 기억나는 부분이 많지는 않았다. 어차피 옷은 다 타버리기 때문에 속옷 차림으로 실험실 가운데에 앉았고, 리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히트비전을 이용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숨을 들이마셨고, 잠시 멈췄다가 내쉬었다. 그러고는 온통 빛이었다. 시야가 돌아왔을 때 주위는 온통 연기가 자욱했다. 클락은 바닥을 짚은 제 손등을 볼 수 있었다. 손등도, 팔뚝도 연기가 휘감고 있었다. 잠시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때 검은 인영이 연기를 뚫고 걸어왔다.
“Hey, hotshot.”
방금 태양열에 지지고 온 기분만 아니었더라면 브루스의 드문 농담에 맞받아쳐 줬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틈이 없었다. 클락의 머리는 온통 물음표로 가득했다. 이 일종의 태양열을 뿜어내는 것은 다른 무엇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능력이 발전하고 있는 것인지, 발전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것이 끝일지 아니면 이것도 발전하는 단계에 있는 것인지. 확실한 것은 없었다. 어떻게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단순한 히트비전과 이 능력 사이의 경계, 일종의 방아쇠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제야 감을 잡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는데, 이 능력을 사용하고 난 뒤에는 전적으로 클락의 모든 능력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즐길 수 있는 기회라고 말을 하기는 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클락의 능력은 천부적인 것이었다.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능력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클락에게는 그의 초인적인 능력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능력을 잃으면 그것이 언제나 다시 돌아오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의문점들에 대한 답을 최대한 빨리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클락은 도움이 필요했다.
차가운 손이 뺨에 닿았다. 평소보다 차갑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신의 체온이 평소보다 뜨겁기 때문이리라. 차가운 온도에서 기대하기 어려울 만큼 부드러운 손길이 자신의 양 뺨을 감쌌다. 클락은 자신도 모르게 그 손에 기댔다. 열에서 깨어난 것처럼 아래로 향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마치 감고 있던 눈을 뜨는 느낌이었다.
“클락, 이해해.”
브루스의 입술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벌써 세 번째인가 보는 미소였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 모양이었다. 고담의 범죄자들은 절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배트맨은 말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능력을 잃은 지금조차도, 클락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능력이 있었다고 해도 사용할 필요 없이 클락은 그냥 알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들이 함께 겪어온 세월과 그 세월 동안 조금씩 커진 우정이 말해줬다.
“클락, 네가 하고 싶은 질문이 많겠지만, 지금 당장은 내가 너한테 물어볼 게 하나 있어. 아주 중요한 질문이야.”
단호한 목소리였다. 사람을 따르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눈앞의 남자 뒤로 다이애나의 눈을 손으로 가린 배리와, 그런 둘과 자신을 번갈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아서의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클락의 파란 눈동자가 오로지 눈앞의 남자에게만 머물렀다. 미세한 근육 움직임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을 작정인 집중력이었다.
배트맨은 장갑 너머로 클락의 얼굴 근육이 긴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입꼬리를 좀 더 끌어당겼다. 큰 노력이 드는 일은 아니었다. 검은 머리칼이 반듯한 이마에 어지러이 내려앉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클락의 눈망울은 길 잃은 강아지 같았다.
“배고프니? 저녁 먹자.”
물론 저녁은 저녁으로 끝나지 않았다. 저녁은 가벼운 한 잔으로 이어지고, 클락은 한 잔을 끝내기는커녕 잔의 반도 못 비우고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테이블에서 오갔던 대화의 80퍼센트는 자신의 말이 차지했을 것이다. 클락은 테이블의 차가운 기운이 뺨에 닿는 것을 느끼며 웃음을 흘렸다. 뱃속에서 비눗방울이 방울방울 올라오는 것처럼 자꾸만 웃음이 새고, 말이 멈춰지지를 않았다. 테이블에 머리를 박기 전, 다이애나가 “클락, 목소리 좀 낮춰!” 하고 일깨워주지 않았더라면 테이블 위에 올라가 고성방가라도 했을 뻔했다. 지금으로써는 테이블과의 입맞춤에 주의를 기울이는 클락의 뒤통수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떨어졌다. 묵직한 바리톤이었다.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는 세상에서 클락의 마음에 쏙 드는 목소리였다.
“브루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무슨 일은. 취한 거지.”
“아냐, 나 안 취했어. 더 마실래. 나는 슈퍼, 슈, 슈우……” 하늘을 향해 치솟던 클락의 손가락이 멈췄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클락의 손이 쿵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번엔 테이블을 배회했다. 마침내 맥주잔의 손잡이에 손가락이 스치자마자 다이애나가 낚아챘다.
“이제 일어나는 게 좋겠어.”
“그래. 나도 내일 출근해야 해. 그럼 저 주정뱅이 친구는 누가 데리고 갈 거야?”
배리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브루스는 계산을 하러 가고, 아서는 메라에게서 전화가 왔다며 급하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다이애나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더우먼에게 남자 한 명쯤이야 무거울 리 없었지만, 주정뱅이를 어깨에 들쳐 메고 가는 것은 그다지 달가운 귀갓길은 아니었다.
“내가 데려다줄게. 눈 깜빡할 사이에 우리의 기자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는 것쯤이야 뭐.”
“고마워, 배리.”
“싫어.”
다이애나가 다가오자 클락은 떠나지 않겠다는 기세로 테이블을 끌어안았다.
“클락.”
“싫어. 집에 가기 싫어.”
“클락.”
“시잃어.”
다이애나의 단호한 목소리에도 클락은 테이블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배리가 키득거렸다.
“클락, 엄마가 화내기 전에 얼른 집에 가는 게 어떨까?”
플래쉬는 원더우먼의 눈빛 공격을 받고는 조용해졌다.
“무슨 일이야?”
그때 마르지 않는 지갑을 가진 고담의 황태자가 나타났다. 플래시는 어둑어둑한 식당 내부가 마치 홍해 바다로 보이는 착시현상을 느꼈다.
“다이애나, 다음 미팅 때 봐. 난 갈게, 안녕!”
그리고 배리는 붙잡기도 전에 사라졌다. 식당에는 이제 다이애나와 브루스, 그리고 굉장히 취한 -외계인이었지만 지금은 능력을 모두 잃어서 일시적인 인간이 된- 클락만이 남았다.
“브루스?”
다이애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주정뱅이 남자들이란, 그냥 남자들보다 상대하기 싫었다. 남자는 남자가 다루라고 해야지.
“클락이 집에 가기 싫대.”
“그래서? 여기 두고 가면 되지.”
“브루스, 농담하는 거지?”
“내가 언제 농담하는 거 봤어?”
다이애나는 순간 클락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것을 분명 보았다.
“가자.”
그리고 브루스는 정말로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단호하게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가는 브루스의 뒤로 검은 코트 자락이 망토처럼 휘날렸다. 다이애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어찌 됐든 최고의 지략가는 브루스였다.
“자, 잠깐만.”
젠장, 브루스. 혀가 꼬인 목소리가 다급하게 그들을 붙잡는 순간 다이애나는 눈앞의 인간에게 감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삼십 초 안으로 안 나오면 그냥 갈 거야. 그전에 나오면 차 태워줄지도 몰라.”
“배트카?”
“클락. 지금 내가 배트맨으로 보여?”
“아니, 브루스으.”
클락의 눈동자가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밝게 빛났다. 술에 취한 클락은 정말 소년 같아서, 옆에 선 남자의 이마가 짜증으로 깊게 패여도 다이애나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십 초 지났다.”
날카로운 목소리에 클락이 주춤주춤 일어섰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클락을 바라보며 브루스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데미안이 똑같이 맥주를 마셔도 저 정도로 취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이애나가 여기저기 쿵쿵 부딪히는 클락을 못 봐주겠는지 다가가서 그를 부축했다. 마침내 클락이 브루스의 앞에 서자, 다이애나의 어깨에 늘어져 있다시피 하던 클락이 한 마리의 거대한 문어처럼 브루스의 어깨로 옮겨왔다. 알코올 냄새가 섞인 뜨거운 숨결이 브루스의 목덜미에 닿았다.
“굿나잇, 브루스. 굿나잇, 클락.”
다이애나가 코트를 여미며 브루스와 클락의 뺨에 입을 맞췄다. 두 남자에게 손을 흔드는 걸 마지막으로 다이애나는 떠났다. 마주 흔들어줄 수도 있었지만, 브루스의 양팔은 한쪽 어깨를 점령한 남자의 체중을 지탱하느라 바빴다.
“클락, 클락? 내 어깨에서 잠들기만 해봐.”
“브루스, 나 너무 졸려. 우리도 자자. 굿나잇, 브루스.”
클락의 축축한 입술이 브루스의 턱에 닿았다. 다이애나와 했던 것처럼 뺨에 입맞춤하는 인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술에서 깨기만 하면 두고두고 놀려먹으리라. 브루스는 주정뱅이 크립토니안을 위한 어두운 복수 계획을 머릿속으로 차곡차곡 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보다 조금 더 큰 남자를 끌다시피 하고 차를 주차한 곳으로 느리게 움직였다.
“클락, 아니 잠깐만, 클락. 잠들지 마. 차까지만 가자. 내 차에 가서 자. 뒷좌석이 넓으……,”
순간 입술에 스치는 감촉에 브루스의 목소리가 끊겼다. 클락의 술에 취한 멍청한 뇌가 마침내 방향감각까지 잃은 모양이었는지, 한쪽 뺨에서 반대쪽 뺨에 갔어야 할 입술을 그 중간에서 멈춰버린 것이었다. 클락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브루스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이내 후회했다. 마주 닿은 입술에서 뿜어내는 숨결이 그대로 브루스의 입속으로 들어왔다. 이제 숨을 내쉬는 것이 문제였다. 브루스는 숨을 참은 채로 얼굴을 돌렸다. 클락의 입술이 마침내 원래 도착지였어야 할 뺨에 닿았다. 입술이 화끈거렸다. 브루스는 마침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클락,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얼굴에 멍이 한두 개 생겼다면, 넌 계단에서 구른 거야.”
브루스는 정말로 클락의 얼굴에 한 방 먹여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뺨에 얼굴을 문지르며 아빠 수염 같다고 칭얼대는 주정뱅이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브루스는 자신까지 한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정도로 취한 것으로 봤을 때 어차피 클락은 자고 일어나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 키스……가 아닌 접촉사고는 물론이고 아마 맥주를 처음 입에 댄 순간부터 기억이 함께 날아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찌어찌 바윗덩어리처럼 무거운 근육 덩어리 남자를 - 뒷좌석에 눕혔다가 언제 토할지 알 수 없으므로 - 조수석에 태운 브루스는 운전석에 앉고 나서야 어깨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아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시동을 걸던 브루스는, 문득 세상 평화롭게 잠이 든 조수석의 남자를 곁눈질했다.
이걸 그냥 확…… 주먹을 치켜들었던 브루스는 그 대신 클락의 뺨을 꼬집었다. 아주 세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강철 남자를 꼬집어보겠는가. 좀 유치하고 사소한 폭력이었지만, 술 취한 클락을 상대로 하는데 좀 유치해져서는 어떠랴 싶었다. 더불어 배트맨의 악력을 무시하는 인간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클락의 뺨이 빨개지고 끙끙 앓는 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고 나서야 브루스는 잠든 남자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빨간 것은 그의 손에 학대당한 뺨만이 아니라서, 브루스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고개를 돌린 브루스는 차를 몰았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알프레드에게 손님 한 명이 더 있다고 연락을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알프레드가 자고 있을지도 몰랐다. 오랜 친구이자 늙은 집사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소 같은 덩치를 하고는 잔뜩 웅크려서 자는 남자를 힐끔 쳐다본 브루스는 살짝 열려있던 창문을 닫았다. 두 사람에게서 풍겨 나온 술 냄새가 금방 차 안을 메웠다. 브루스는 그 냄새를 탓했다. 멍청한 주정뱅이 클락의 실수를 지워내지 못하고 계속 떠올리는 것을. 입술이 달아올랐다. 술 냄새 때문이었다.
웨인 저택에 도착한 브루스를 알프레드가 맞이했다. 당연히 알프레드는 자신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잠들지 못할 것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브루스는 굳이 알프레드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손님방을 준비할까 묻는 알프레드에게 브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자요, 알프레드. 클락은 내 방 구석에 던져놓을 테니까.
그의 대답에 알프레드는 순순히 물러나면서도 묘한 눈빛을 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프레드에게 왜 전화를 하지 않았는지 스스로의 의중을 파악하기엔 어깨를 짓누르는 클락이 너무나 무거웠다.
알프레드가 나가고, 브루스는 클락을 소파 위에 내려놓으려고 진땀을 흘렸다. 잠든 사람이 힘은 왜 이렇게 센지 브루스의 목을 감싼 팔은 포이즌 아이비의 덩굴인 것마냥 좀체 풀리지를 않았다. 긴 하루였고, 브루스는 피곤했다.
아, 알게 뭐야. 브루스는 클락을 떼어내지 않은 채 침대로 가서 풀썩 누웠다. 등에 푹신한 감촉이 닿는 것을 느꼈는지 그제야 팔에 힘을 푸는 클락을 보며 브루스는 사실 저 얄미운 크립토니안이 내내 잠들지 않은 것이 아닐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누운 클락을 옆에 둔 채, 브루스는 천장을 보고 누웠다. 클락이 침대를 차지했으니 자신이 소파에서 잘 신세가 되었다. 내일 알프레드의 집안일은 모두 클락에게 시키는 걸로 복수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브루스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잠들면 안 되는데… 옷도 갈아입지 못했고 씻지도 않았으며 클락 켄트와 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소파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침대는 푹신하고 이불은 부드러웠다. 잠이라는 어둠이 다크 나이트를 서서히 품에 안았다.
클락은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전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를 넘어 우주 하나도 아닌 여러 우주를 다녀 봤지만 천국의 존재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제 몸을 또 하나의 피부처럼 보드랍게 감싸주는 이불과, 물 위에 누워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푹신한 침대에 계속 누워있을 수만 있다면 이곳이 곧 천국이라고 해도 의심치 않을 것이었다. 클락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살짝 들자마자 밀려오는 두통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이렇게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픈 걸 봐서 천국은 아닌 것 같았다. 클락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왜 머리가 아픈지 알 수 없었다. 약에 취한 것일까? 무슨 공격을 받았던 것일까? 어제 저녁 이후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눈 떴으면 썩 일어나, 농장 소년.”
클락의 고개가 빠르게 목소리를 향해 돌아갔다. 그의 첫 시야에 잡힌 것은 고독의 요새를 감싼 빙하처럼 시린 눈동자 한 쌍이었다. 아침 햇살이 그 눈동자를 축복하듯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어쩌면 천국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소년이라기엔 너무 크지 않아, 브루스?”
“덩치를 봐서는 그렇지. 그런데 주량을 보면…… 신생아라고 안 부른 걸 고맙게 여겨.”
“하하, 재밌네. 그나저나 브루스…… 머리가 아픈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혹 같은 것도 안 느껴지고 누구한테 맞은 기억도 없어.”
“그 누구를 인간들은 숙취라고 하지.”
입술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클락은 브루스가 건넨 물컵을 망설임 없이 받아 들었다. 엑스레이 비전 없이도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머리를 뿌옇게 장악하던 두통의 안개가 조금은 걷히는 느낌에 클락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침대를 차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브루스가 몸을 일으켰다. 상처로 뒤덮인 길쭉한 다리가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다. 고양이처럼 사뿐히 맨발로 마루에 선 브루스가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사라지기 전까지, 클락은 물컵을 손에 든 채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브루스가 가운 차림인 거지? 그리고 클락은 시선을 내렸다. 그제야 본인이 맨가슴임을 깨달았다. 어째선지 떨리는 손으로 클락은 이불을 들춰 보았다. 맨다리였다. 하지만 한 장의 천이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켜주고 있었다. 나는 왜 속옷 차림인 거지?
“마스터 켄트.”
불쑥 튀어나온 연로한 집사의 목소리에 클락은 황급히 이불로 맨가슴을 가렸다. 거울이 있다면 히트비전보다 빨개진 제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조, 좋은 아침이에요, 알프레드.”
“브루스 주인님께서 말씀하시길, 친절히도 아침 식사 준비를 돕겠다고 말씀하셨다고요, 마스터 켄트.”
“제가 그……랬나요?”
“옷은 서랍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알프레드는 등장했던 것처럼 조용히, 홀연히 사라졌다. 시선을 돌리자 알프레드의 말처럼 지난밤의 옷가지가 서랍 위에 가지런히 개켜져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옷을 향해 팔을 뻗던 클락은 문득 떠오른 깨달음에 움직임을 멈췄다. 브루스랑 한 침대에서 잤어.
브루스 웨인이랑 한 침대에서 잤어 . 그것도 속옷 차림으로 .
머리를 쥐어뜯어도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그때 클락의 집은 물론이고 옆집의 옆집까지 포함해야 할 정도로 넓은 브루스의 방 너머 욕실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물소리가 멎었다.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던 작은 소음이 멈추자 방 안에는 완전한 적막이 감돌았다. 그동안 클락에게는 완전한 적막이란 없었다. 언제나 작은 소리들, 지구 반대편까지의 소리들이 그의 고막을 두드렸다.
가장 큰 적막은 항상 귀를 열어두었던 한 사람의 소리였다. 클락은 텅 빈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손바닥으로 그 공백을 쓸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지만 그것을 덥히던 체온의 부재로 인해 차가웠다. 완전한 고독의 감정이 이런 것일까?
클락은 고개를 저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꿰입고 창가로 향했다. 알프레드가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깨끗하게 세탁된 상태였다. 움직일 때마다 제 친구에게서 나던 익숙한 향이 났다.
두꺼운 커튼을 젖히자 희뿌연 햇살이 아침안개를 뚫고 고담의 잠을 깨우고 있었다. 클락은 뱃속에 똬리를 트려는 차가움을 억누르고, 제 뺨에 닿는 태양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내일, 빠르면 오늘 오후면 끝날 감정이었다. 인간임을 느껴보고 싶어. 지금이 그 얼마 안 되는 기회였다. 그 기회가 따뜻하든 차갑든 클락은 제 손에 놓인 기회를 흘려보내는 남자가 아니었다.
“브루스? 브루스! 뭐 먹고 싶어?”
“소리 지르지 마, 클락. 안 그래도 다 들리니까.”
욕실 문이 마침내 열리고 정장 바지에 셔츠차림의 브루스가 나왔다. 클락은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가운 차림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말 다행이었다면 왜 숨을 참고 있었는지, 내뱉은 숨은 왜 한숨처럼 느껴졌는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일까? 머리에 녹이 슨 기분이었다. 클락의 그런 기분을 아는지 - 아마 알 것이었다. 세계 최고의 탐정이란 별명은 땅에서 솟은 것이 아니었으니 - 모르는 척하는 건지 브루스는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여태까지의 세월 동안 뭘 배웠지, 클락? 그 선택은 우리 몫이 아니란 걸 알 때도 되지 않았어?”
“알았어. 알프레드가 하자는 대로 할게.”
“이제야 데일리 플래닛의 사장이 돈을 허공에 낭비하고 있진 않다는 걸 알겠네.”
“그래, 그래. 좋은 아침이야, 브루스.”
억만장자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클락은 따뜻한 게 좋았다. 햇볕은 따뜻하고, 그의 에너지였다. 눈앞의 남자의 미소는 따뜻했다. 어쩌면 햇볕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 어떤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좋은 아침, 클락.”
아랫배에 응어리졌던 차가운 무언가가 녹아내렸다.
브루스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종일 하수도를 기고, 뛰고, 굴렀더니 뼛속까지 습기와 한기가 서린 기분이었다. 물론 평소와 다름없는 일과였지만 오늘은 좀 더 바쁘게 움직였다. 일은 주의를 돌리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브루스는 잠이 들면 한 번 이상은 꼭 중간에 깼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된 악몽이었다. 손발이 차갑게 식을 정도로 악몽이 주는 진저리치는 그 비통함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겠지만, 어제도 한밤중에 잠이 깬 것은 전혀 낯설 일이 아니었다. 옆에서 잠들어있는 남자가 슈퍼맨이란 것만 빼면.
브루스는 목을 죄던 셔츠의 단추를 하나둘 풀어나갔다. 온몸이 식은땀투성이였다. 어차피 잠이 깬 김에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면 악몽에도 도움이 될 것이었고, 브루스는 그렇게 했다. 브리프 차림으로 욕실을 나서려던 브루스는 잠시 망설이다 가운을 집어 들었다. 잘 땐 아무것도 안 입고 자는 편이었기 때문에 맨살에 닿는 실크의 감촉조차 조금 거추장스러웠지만, 이 한 장의 옷감이 다음 날 아침의 불편함을 방지해줄 것을 알기에 브루스는 조용히 침대 위로 돌아왔다.
다시 누우려고 생각해보니 클락은 신발도 채 벗지 않은 채 자고 있었다. 불편하긴 한 모양인지 클락의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잡혀있었다. 브루스는 기왕 침대도 내준 김에 좀 더 호의적인 호스트가 되고자, 목이 답답해 보이는 셔츠 단추도 한두 개 풀어주었다. 이만하면 충분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단추가 하나씩 열릴 때마다 그 아래 감춰진 살갗이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상체는 초인간적으로 탄탄한 근육으로 짜여있었다. 단추를 풀 때마다 손마디에 살갗이 스쳤다. 입고 있는 실크 가운보다 부드러운 것 같았다. 마침내 마지막 단추까지 모두 풀어낸 브루스의 오므린 손이 조금 펴졌다. 손 한 마디 전부가 다른 남자의 가슴에 닿았다. 초인간적인 능력을 모두 잃었다는 것이 거짓말인지 그 순간 브루스는 맞닿은 부분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황급히 손을 뗐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상대에게 들릴까 호흡을 가다듬으려던 브루스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있는 남자의 귀에는 더이상 제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브루스는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멀찌감치 엉덩이를 뒤로 뺐다. 역시 호의는 자신에게 맞는 단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작을 했으니 끝을 봐야 했다. 브루스는 클락의 몸과 거리를 둔 채로 상체를 숙여 클락의 발치로 팔을 뻗었다. 복숭아뼈가 불거진 발목을 잡아 신발을 대충 바닥에 던진 후, 양말을 벗겼다. 피부 접촉을 최소화하고자 브루스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자리를 옮겼다. 감사히도 다리를 어깨보다 조금 더 넓게 벌리고 잠들어있는 클락 덕분에, 브루스는 어떤 접촉 없이 안전하게 클락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손가락의 최소 부분만 이용해 지퍼를 내렸다. 쇠붙이가 마찰하는 소리가 섬뜩하도록 크게 들려서 브루스는 잠깐 행동을 멈추고 잠든 남자의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 브루스는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술 취한 친구의 옷을 벗겨주는 것뿐이었다. 긴장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설령 클락이 잠에서 깨더라도 브루스는 결백했다.
바지를 내리는 그의 손이 좀 더 대담해졌다. 클락의 허리 밑으로 손을 집어넣은 후 다른 손으로 바지를 끌어내렸다. 허리를 쉽게 빠져나오던 그 옷자락은 그다음 신체 부위에서 걸렸다. 바지를 무사히 벗겨내려면 그 신체 부위를 잡아들어 올려야 했다. 우스꽝스러운 쫄쫄이를 안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몸이란 건 눈에 보이니까 알고 있었지만 막상 잠깐 스친 클락의 엉…… 그 신체 부위는 놀랍도록 탄탄했다.
마침내 옷을 벗기는데 성공한 브루스는, 다른 때 같았으면 제 업적을 감상하며 잠깐의 뿌듯함을 즐겼겠지만 지금은 고개를 돌린 채 크립토니안의 벗은 몸을 재빨리 이불로 덮었다. 어차피 몸의 윤곽이 다 드러나는, 흔히들 쫄쫄이라고 불리는 슈트를 입고, 서로의 벗은 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어째선지 브루스는 시선을 차마 그쪽으로 둘 수 없었다. 브루스는 쓰러지다시피 천장을 보고 누웠다. 갑자기 피로가 바위처럼 온몸을 짓눌러댔다. 같은 이불 안에서 뿜어져 오는 타인의 온기에 잠기며, 브루스는 도로 수마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다음 날 브루스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벗은 몸과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클락에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유지했다. 클락이 얼떨떨한 얼굴로 웨인 저택을 나서고 자신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브루스는 마침내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지. 이렇게 자꾸 엄한 생각이 떠오를 줄 알았다면 차라리 이불을 도로 덮어주기 전에 한 번 쳐다보기라도 할 걸 그랬다고 브루스는 후회했다. 그랬다면 손으로 느꼈던 찰나의 감촉과 그간의 기억이 뒤섞인 클락의 옷을 입지 않은 여러 신체 부위가 자신의 머리를 점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덕분에 평소보다 정신적으로 힘든 하루였다. 곧장 침대 위로 쓰러져 잠들어버리고 싶었지만, 패트롤을 마치고 돌아온 브루스를 맞이한 것은 알프레드가 알린 ‘손님’의 방문이었다. 카울을 잠시 만지작거리던 손이 문고리를 잡았다. 그 ‘손님’은 브루스의 손님이기도 했지만 배트맨의 손님이기도 했다. 아마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전자보다는 후자이리라.
불이 켜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배트맨의 예상과는 달리, 방문을 열자 그를 반기는 것은 어둠이었다. 고담의 우중충한 야경과 희미한 달빛만이 방 안의 윤곽만을 시야에 허용했다.
“클락……?”
메트로폴리스에 돌아간 것 아니었어? 브루스는 질문을 삼켰다. 답을 아는 질문은 물음이 무의미했다.
클락은 지금쯤 능력이 돌아와서 일상으로 되돌아가 있어야 맞았다. 알프레드가 클락의 방문을 알려줬을 때 브루스는 슈퍼맨의 방문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반나절 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 메트로폴리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알려주거나, 아니면 능력을 되찾은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서라든지 그런 일들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배트맨조차 짐작하지 못한 것이었다.
창가에 선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배트맨은 한 걸음씩 거리를 좁혔다. 그의 직감이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마침내 눈이 어둠에 적응하고, 서로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다가서자 배트맨은 걸음을 멈췄다.
배트맨을 마주하는 파란 눈동자는 동공이 확장되어 있었다. 아마도 어둠 때문이리라. 어둠 속에서 빛나는 크립토니안의 벽안은 어째선지 배트맨에게는 낯설었다. 밤낮을 떠나 어떤 시간대에서라도 마주한 적이 있건만 배트맨의 기억에 각인된 것은 빛을 받은, 혹은 빛을 등진, 혹은 빛을 뿜어내는 눈이었다. 클락의 눈은, 아니 클락은, 슈퍼맨은 빛 속에 있어야 하는 남자였다. 배트맨 자신이 그림자와 어둠 속에 속하는 것처럼.
“……브루스.”
망설이는 목소리에 브루스는 망설임 없이 카울을 벗었다. 무언가가 잘못된 것 같던 직감이 맞았다. 하지만 클락은 배트맨이 아닌 브루스를 불렀고, 박쥐의 가면을 벗은 브루스라는 남자는 부모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돈만 많은 불행한 남자에 불과할 뿐일지라도, 가면을 벗고 나서도 바람둥이에 백치라는 또 다른 가면 속에 자신을 숨기는 비겁한 남자에 불과할 뿐일지라도, 브루스는 바로 그 보잘것없는 남자가 지금 클락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클락. 돌아올 거야.”
언제 그의 능력이 돌아올 수 있을지 브루스는 알 수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다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을 거야. 그런 말들은 물거품 위의 모래성보다도 연약한 허상이었다. 브루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았다.
“돌아올 거야. 항상 그랬듯이.”
침묵이 떨어졌다. 어둠 속에 잠겨 아무 말이 없는 남자는 언뜻 보기에 저와 다를 바 없었다. 항상 긍정적이고 밝고 자신과는 정반대인 슈퍼맨이 짜증 난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브루스는 단 한 순간도 슈퍼맨이 자신과 같기를 바라지 않았다.
“브루스. 부탁할 게 있어.”
“말해.”
“오늘…… 오늘 하루만 여기서 자고 가도 될까?”
로이스는? 불쑥 솟구친 생각은 돌덩이처럼 목에 걸렸다. 어찌 됐든 지금 당장 클락의 앞에 서있는 사람은 로이스가 아닌 자신이었다. 지금 필요한 대답은 그것이 전부였고, 그에게 허용된 대답도 그것이 전부였다. 브루스 자신의 문제였다. 클락에게 짊어지울 수 없는 일이었다. 브루스는 뻑뻑한 목을 삼켰다. 브루스의 침묵을 부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클락이 다급하게 제스처를 취하며 한 걸음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알프레드를 부를 필요 없어. 그냥 빈방에 있는 소파 아무 데서나 자면 되니까. 정말이지 브루스, 안 쓰는 방마다 침대는 왜 있는 거야……”
긴장한 미소를 슬며시 지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빨간 망토를 휘날리며 너른 어깨를 펼친 슈퍼맨보다는, 두꺼운 안경을 끼고 제 몸보다 두 사이즈는 큰 옷을 걸친 서투른 기자 클락 켄트에 가까웠다. 영웅이 아닌 그저 한 명의 인간이었다. 위로가 필요한 남자일 뿐이었다.
“로이스랑은 싸워서…… 아니, 이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 브루스, 부탁할게.”
브루스의 이전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덧붙인 클락의 변명에, 브루스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 위로가 필요할 때 클락 켄트의 일 순위는 그녀였다. 브루스 웨인은 자신이 일 순위가 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남자였다. 하지만 언론이 말하는 브루스 웨인이 아닌 클락의 앞에 선 브루스 웨인은 역시 또 한 명의 남자일 뿐이었다.
클락의 시선이 방 안을 배회하다 다시 상대의 눈을 찾았을 때, 브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클락이 웃었다. 크립토니안의 눈에 달빛이 고여 새파란 호수처럼 빛났다. 브루스는 호수에 빠졌다.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이란 것은 시작부터 알았다.
다음 날도 능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클락은 1층에서 뛰어내렸지만 날아오를 수 없었다. 하다못해 점프조차 안 됐다. 발목을 삔 대가로 돌아온 건 능력은커녕 알프레드의 잔소리와 브루스의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꼼짝없이 침대 신세를 지게 된 클락은 한숨을 내쉬었다. 브루스는 브루시 웨인으로서 참여해야 할 미팅이 있다고 나갔고, 알프레드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몰랐다. 거대한 저택 안에서 클락은 완벽히 혼자였다. 유일한 위안은 누워있는 침대가 브루스의 것이란 것뿐이었다. 케이브를 제외하곤, 언제와도 낯선 웨인 저택에서 얼마 안 되는 익숙한 곳이었다.
바로 그 점이 클락은 견딜 수 없었다. 일개 인간으로서 클락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평범한 기자 클락 켄트는 로이스 레인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기사를 쓰지 못했다. 슈퍼맨이 아닌 클락 켄트는 여기저기 부딪히고, 넘어지고, 쓰러트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남을 돕기는커녕 지금 이렇게 발목이 삐어서 침대 신세를 지며 더 큰 문제만 만들지 않으면 다행인 신세가 평범한 인간으로서 클락에게 주어진 삶이었다.
평생을 슈퍼맨으로서 인간들을 돕기 위해 살아왔다. 만약 영영 능력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영영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슈퍼맨의 존재 의의가 사라지게 된 이상 그건 곧 슈퍼맨의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클락은 눈을 감았다. 알프레드가 건네줬던 진통제인지 뭔지 주의 깊게 듣지 않아 기억나지 않는 약의 효과가 이제야 나타나는지 졸음이 몰려왔다. 달리 할 것도 없었다. 스스로의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니 클락은 무의식의 세계에 몸을 맡기는 편을 택했다.
와치타워에서 사이보그의 보고를 받은 브루스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왜 아직도 클락의 능력이 안 돌아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쪽도 오리무중이었다. 애초에 클락에게 생긴 새로운 능력에 대한 사실도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그래도 브루스는 정답이 없는 수수께끼가 싫었다.
패트롤을 가기 전, 브루스는 제 방문 앞에 섰다. 클락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클락의 반응은 어떨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걱정이었다. 저스티스 리그의 멤버들은 모두 각기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능력만큼이나 다양하고 강력한 개성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람은 슈퍼맨이었다. 슈퍼맨이 없는 저스티스 리그는 심장이 없는 것과 같았다.
브루스는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조절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문에 이마를 기댔다. 클락은 자신의 숨소리는커녕 심장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호흡을 죽일 필요가 없는데도 지난 세월 동안 쌓인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브루스는 제 마음조차 가다듬기 전 덜컥 문을 열었다. 어차피 결과가 같다면 시간을 끌어서 얻는 이득은 없었다.
클락은 제 키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긴 것 같은 창문 앞에 서있었다. 약을 먹고 한숨 자고 났더니, 발목은 아직도 얼얼했지만 붓기는 많이 빠졌다. 체중을 그쪽으로 싣지 않게 조심하면서 클락은 창가에 몸을 기댔다.
길쭉한 유리를 휘감고 있는 장식은 클락이 지구에서 산 시간보다, 아니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보다도 오래됐을 것이었다. 클락은 울퉁불퉁한 표면을 손끝으로 훑었다. 시선이 창밖으로 옮겨갔다. 세상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해 질 녘이었다. 쏟아지는 그 태양 빛은 메트로폴리스의 것과는 달랐다. 물론 그 출처는 같았지만, 어쩐지 피부로 와 닿는 느낌은 전혀 다른 듯했다. 단지 그가 인간이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는 눈부신 메트로폴리스의 햇빛과는 달리, 고담의 햇빛은 언제나 그림자를 품고 있었다. 그 도시의 다크 나이트를 가호하듯 어둠을 품은 빛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으면, 몸을 쓰지 않는 다른 능력 -히트비전이라든가 엑스레이 비전 등- 을 써보려고 종일 고군분투했더니 지금은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였다. 오랜 시간 햇볕을 맞았는데도 평소처럼 힘이 돌아오는 느낌이 없었다. 더이상 불멸의 존재가 아니었다. 발목의 통증이 선연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브루스.”
언제부터 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클락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능력이 사라진 보통 인간으로서는, 클락은 상대방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을 때만 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뱃속에 차가운 것이 똬리를 틀었다. 클락은 항상 상대의 존재를 먼저 알았다. 아무리 어둠 속에 또 다른 그림자처럼 녹아드는 배트맨이라도, 클락은 항상 알았다. 언제 어디서나.
“와치타워에서 연구 결과가 나왔어.”
“아.”
“아무것도 알 수 없대.”
“아아.”
침묵이 감돌았다. 클락은 정적 사이를 메우는 작은 소음을 잡아내려고 귀를 기울였다. 브루스의 옅은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주 집중해야만 간신히 들리는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클락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항상 귀를 열어뒀기에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그 소리가 필요했다. 그 주인만큼이나 침착하고, 흔들림 없이 일정한 그 소리가 필요했다.
창틀을 움켜쥔 클락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그 소리가 영원히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클락은 알 수 없었다. 능력이 없었다. 클락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랫배에 자리 잡았던 차갑고 불쾌한 감정은 독처럼 온몸에 퍼졌다. 그 독의 이름은 공포였다. 그 깨달음이 클락의 뺨을 내리쳤다. 지킬 수 없다는 공포. 클락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클락……?”
브루스는 머뭇거렸다. 위로와 배트맨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럴 때 딕이라면, 배리라면, 아니 클락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브루스는 머리를 굴렸다. 조용히 다른 남자의 옆에 다가선 브루스는 잠시 또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클락의 떨리는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힘을 줘야 할까? 아니면 쓰다듬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가만히 이대로 있는 게 좋을까? 떼는 게 나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도출하기도 전에 클락이 몸을 틀었다. 눈이 마주쳤다. 브루스는 그 자리에 굳었다. 남자의 눈물은 포이즌 아이비의 독보다 강력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클락이 쓰러졌다. 한때 우주라는 거대한 암흑을 등에 지고 지구라는 조그만 천체를 발밑에 거느리던 그 남자가 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아니, 쓰러졌다기보다는 내던졌다. 그 충격에 브루스는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쳐야 했다. 클락의 반듯하던 이마는 온통 구겨져 있었다. 굽슬거리는 검은 머리칼이 브루스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클락은 브루스의 가슴팍에 제 얼굴을 문질렀다. 지구 상 최고의 탐정에게 그 행동의 의미가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란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셔츠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지만 브루스는 밀어내지 않았다.
“클락, 왜 그래?”
“브루스…….”
부드럽던 테너는 물에 젖은 솜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클락의 조각상 같은 얼굴에 번졌던 눈물이 자꾸만 떠올라 브루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클락이 안기는 통에 놀라서 떨어졌던 손을 다시 어깨에 올려야 할지, 아니면 등에 올려야 할지 브루스는 손을 쥐락펴락했다. 등 뒤의 사정을 알 리 없는 클락은 제 얼굴을 브루스의 가슴팍에 더욱 밀어붙일 뿐이었다.
“클락, 너 발목……,”
클락은 멈추지 않았고, 그 힘에 브루스의 허리는 뒤로 꺾였다가 결국 뒤로 넘어갔다. 딱딱한 책상이 등뼈에 닿았다. 서류철인지 만년필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무용품에 등이 배겼지만, 브루스는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일 마음도 없었다.
한참 브루스의 셔츠 자락에 입술을 달싹이던 클락이 고개를 들었다. 소용돌이치는 파도가 브루스의 시선을 집어삼켰다.
“브루스, 네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아.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아무것도 안 들려. 들을 수가 없다고. 우습지 않아? 난 너의 그 빌어먹게 차분한 심장 소리가 싫었어. 싫었다고. 그랬는데……”
“클락……”
“만약…… 만약에 네가 죽…… 아니 크게 다치면, 심장이 잠시 멈춘다거나 아니면 너답지 않게 엄청 빨리 뛴다거나…… 하더라도 나는 알 수 없어. 인터콤이 고장 났는데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이제 네가 바나나 머핀이라고 말해도 나는 들을 수 없어. 널 구할 수 없어. 브루스. 나한테는 아무 능력이 없어.”
브루스의 뺨으로 클락의 눈물이 떨어졌다. 브루스는 손을 뻗었다. 목적지에 닿기 전 잠깐 멈칫한 그 손길을, 클락은 거부하지 않았다. 브루스의 엄지가 클락의 뺨에 닿았다. 손끝에 물기가 옮았다. 맞닿은 피부가 뜨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락의 얼굴만이 아니었다. 독감에 걸린 사람처럼 그의 온몸이 뜨거웠다. 브루스는 할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브루스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알았다.
상처 많은 단단한 손이 부드러운 손등 위에 겹쳐졌다. 많은 일들을 함께 마주한 두 사람이었지만 서로의 지문 끝에 닿는 상대의 감촉은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브루스의 손이 클락의 손바닥과 손등을 감쌌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사람 손에 매달리는 것처럼 클락의 손이 곧장 상대의 손을 그러쥐었다. 비록 지구인을 능가하는 힘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그 악력은 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강했다.
클락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브루스는 남자의 촉촉하게 젖은 검은 머리칼을 헤집었다. 서투른 손길로 제 가슴팍에 묻힌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저항할 것이라고 예상한 바와는 다르게 클락은 순순히 브루스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소용돌이치는 파란 눈동자가 보다 옅은 색의 파란색과 마주쳤다.
시선을 얽은 채 브루스는 클락에게 잡힌 손을 서서히 움직였다. 손을 빼려는 줄 알았는지 나지막하게 앓는 소리와 함께 손에 가해지는 악력이 세졌지만, 브루스는 쉬쉬 속삭이며 다른 손으로 클락의 뺨을 쓰다듬었다. 시선을 떼지 않았다. 관자놀이와 턱뼈의 긴장이 손바닥 아래서 조금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클락.”
크립토니안의 주의가 완전히 자신에게 쏟아졌다고 확신하는 순간, 브루스는 그의 손을 제 심장 위에 포갰다. 클락의 손 너머로 자신의 심장 박동이 어떤지 느낄 수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 귀로는 들을 수 있었다. 심장이 고막에 달린 것처럼 박동했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이 들렸지만 브루스는 구태여 진정시키려 하지 않았다. 지금 클락에게 필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였다.
“브루스…….”
성난 들고양이처럼 흔들리던 파란 눈동자의 소용돌이가 점점 차분해졌다. 클락의 눈동자는 어느 인간의 것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새까만 동공, 흩뿌려진 홍채와 파란 눈동자를 반쯤 가리는 검은 속눈썹까지. 하지만 그 눈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은, 그 감정을 품고 있는 마음은 어느 평범한 인간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것이었다. 바로 그 마음을, 그것과 비슷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브루스는 싸워왔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 얼마나 그것을 소중히 하는지, 사랑하는지, 브루스는 알고 있었다. 내내 그래왔었다. 이제야 깨달은 것뿐이었다.
브루스는 손바닥 한쪽 끝에서 작은 근육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맞닿은 피부를 타고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그 움직임을 따라 브루스의 얼굴 근육도 미미하게 움직였다. 미소였다.
“거기서 뛰고 있는 게 심장이라는 것 정도는 초인적인 힘이 없어도 알 수 있겠지?”
“맙소사, 브루스.”
“왜?”
“아니야, 그냥…….”
브루스의 가슴께를 머무르던 클락의 손이 위로 뻗었다. 턱에 닿는 뜨거운 체온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브루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클락의 손가락 끝이 닿은 곳은 그의 입술 끝이었다. 브루스의 시선은 클락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눈썹의 움직임, 얼굴 근육의 떨림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표정 변화를 관찰했다. 촉촉하게 젖은 풍성한 속눈썹 너머의 클락의 눈동자는, 안경이 필요한 사람처럼 잔뜩 집중해 있었다. 점점 관찰하고 있는 얼굴이 가까워졌다. 상대의 뜨거운 호흡이 브루스의 코끝을 간질였다. 이 거리에서 클락의 입술 주름 개수까지 셀 수 있을 것이라고 브루스는 확신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우리 이랬던 적이 있었던가?”
길 잃은 어린애 같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여전히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클락의 얼굴은 이제 의문으로 가득했다. 브루스는 능력이 있든 없든 크립토니안의 머릿속을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뭘?”
클락이 더욱 거리를 좁혔다. 이보다 더 가까워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브루스의 생각은 틀렸다. 서로의 입술이 스쳤다. 얇은 피부를 가진 신체 부위는 작은 자극만 닿아도 예민하게 감각을 받아들였다. 마치 허락을 기다리는 것처럼 클락은 잠시 그렇게 멈춰있었다. 브루스는 움직이지 않았고, 클락은 마지막 거리를 좁혔다.
서로의 입술만 겹친, 키스라고 부르기도 뭐한 입맞춤이었다. 브루스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클락이 울었고, 서로 당황했고, 앞으로 인간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바로 그 남자와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조커가 어떤 장난을 준비해놓는다고 해도 이보다 놀랍지는 않을 것이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그런 클락을 밀어내지 않는 자신이었다.
물론 원해온 것이었다. 브루스가 관계에 서투르다고 하더라도, 똑똑한 남자였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클락은? 그의 마음을 브루스는 읽을 수 없었다. 혼란스럽고, 로이스는 없지 며칠간 옆에 있던 사람은 알프레드를 빼면 자신뿐이었다. 스스로의 혼란을 이겨내기 위해 상대방을 이용한다고 하기에 클락은 너무 착했다. 하지만 지금은 특별한 상황이고, 확실하게 해둔다고 나쁠 건 없었다.
브루스는 손으로 클락을 밀어내며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입술을 벌렸다. 그것이 실수였다.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곧장 말캉한 혀가 그 틈을 가르고 들어왔다. 제 온몸을 뒤덮는 체온과 입속을 휘젓는 혀는 온통 뜨거워서 브루스는 당장 녹아내릴 것 같았다. 뇌세포까지 녹아서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클락을 밀어내려던 손은 어느새 그의 옷깃을 움켜쥐고 있었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입속에 혀를 집어넣은 이상, 단순히 슬픔을 이겨내고자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보기엔 이제 어려웠다. 브루스는 일단 주어진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클락의 목뒤를 움켜쥐었다. 키스가 깊어졌다. 숨이 차기는커녕 멀쩡해 보이는 클락과는 달리 브루스는 호흡이 가쁘기 시작했다. 산소가 부족해지는지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기분이었다. 기분만이 아니었다. 브루스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곧장 눈이 번쩍 뜨였다. 고개를 돌리며 클락을 밀쳐냈다. 바윗덩어리를 밀어내는 것처럼 꼼짝도 안 해서 브루스는 주먹으로 남자의 가슴을 내리쳤다. 마침내 클락의 입술이 떨어졌다.
“브루스?”
밥그릇 뺏긴 것 같은 표정에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브루스는 턱 끝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돌아온 걸 환영해, 슈퍼맨.”
“와우.”
클락의 키스로 붉게 물든 입술이 동그랗게 오므라들었다가, 이내 호선을 그렸다.
“브루스, 내가 무슨 말 하려고 했는지 알아?”
그를 바라보는 클락의 눈은 평소대로의 클락의 눈처럼 반짝거려서, 브루스는 설마 클락이 ‘사실은 실수였다’, ‘방금 일은 없었던 걸로 하자’ 등의 거절을 저런 표정으로 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뭔데?”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어. 그렇게 말하려고 했어.”
클락의 입술이 브루스의 뺨에 빠르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귀가 빨개질 정도로 선명하게 ‘쪽’하는 소리가 났다. 빨개진 브루스의 귀를 본 클락의 입술이 귀에 걸렸다.
“근데 우리 지금 정말 하늘을 날고 있잖아!”
클락이 웃음을 터뜨렸다.
“클락, 잠깐……!”
눈 깜빡할 사이에 창문이 열리고, 주위 풍경은 온통 밤하늘이었다. 클락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맞닿은 가슴에서 울려 퍼졌다. 브루스는 클락이 자신을 안고 있는 자세가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아 내려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능력을 되찾은 남자가 조금 더 기쁨을 즐기도록 두기로 다짐했다. 클락이 웃을 때마다 별이 내렸다. 브루스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그의 입술에도 별빛이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