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輪 (수레바퀴 륜)

Work Text:

-1962년, 미국 뉴욕

 

찰스는 여동생 레이븐을 데리고 소더비 경매에 참석했다. 오늘 경매에 등장한 것은 어떤 그림이라고 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그린 그림이라는데, 웬 군인 한 명이 꽃밭에 쓰러져 있는 그림이었다. 레이븐은 전혀 그림에 흥미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찰스는 정 반대였다. 꼭 자신이 전쟁 중에 나이가 많았다면 저 모습이 아니었을까? 찰스는 최고액으로 그 그림을 사 왔다. 오빠, 왜 또 그런 걸 샀어? 레이븐은 찰스를 다그쳤지만 찰스는 뉴욕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기에 이깟 그림 하나를 산다고 해서 재산에 흠이 가는 것도 아니었다. 찰스는 그림을 볼수록 꼭 어디선가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날 것 같다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이야기를 레이븐에게 했더니만…….

 

“뭐? 오빠가 미신을 믿어?”

“아니, 그게 미신인 게 아니라……, 기분이지!”

“그게 기분이 아니고 미신이야, 이 바보야!”

“내 말 좀 들어 봐. 그러니까 말이야, 조만간 내가 누군가를 데려올 것 같다고.”

“……어휴, 말을 말지.”

 

레이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후 방을 나갔다. 묘하게 기분 나쁜 그림이 걸려 있는 것도 싫고, 평생 헛소리 한 번 않던 오빠가 날마다 이상한 소리를 해 대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찰스는 그림을 벽에 다시 걸어 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찰스는 창문을 닫으려고 일어섰다. 그때, 현관 쪽에 누군가가 비실비실 걸어와 툭 쓰러지는 것을 본 찰스는 급히 1층 현관으로 뛰어갔다. 괜찮아요? 찰스는 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여긴 어디죠?”

“뉴욕 웨스트체스터입니다. 어휴, 멀리까지 오셨네요. 제 집은 맨해튼 쪽도 아니고 한참 걸어야 있는 곳인데, 어쩌다 이곳까지 오셨죠?”

“……걷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찰스는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설마……, 찰스는 고개를 두어 번 젓고 웃으며 빈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찰스는 직접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과 커피 두 잔을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그새 씻고 나와서 침대에 놓인 새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찰스의 질문에 남자는 ‘에릭’이라고만 답했다. 더 이상의 신상정보가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듯 에릭은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제 이름은 찰스 자비에입니다. 지금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지요.”

“이 집이 대학원생의 집이라고요? 그러기엔 너무 크지 않나……?”

“아버지 재산이에요.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지만 말이죠.”

“아, 전 폴란드에서 왔습니다. 뉴욕에 온 건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온 것이고, 길을 잃어서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네요.”

 

찰스는 여유롭게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에릭이 아무리 자신의 정보 노출을 최소화하려고 해도 찰스는 에릭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곳까지 왔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시고 내일 아침식사는 8시입니다, 그때 봐요 에릭. 찰스는 문을 닫고 방 밖으로 나왔다. 에릭 랜셔, 1930년생. 폴란드 출신 유대인. 능력은 자기장이나 금속을 이것저것 잘 다루는 것.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나치 사냥꾼. 머릿속 한 번만 훑어봐도 다 아는데 왜 굳이 숨기려 드는지, 찰스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었다. 찰스는 전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다음 날 아침, 6인용 식탁에 오랜만에 세 명이 앉았다. 레이븐은 간밤에 들어온 손님을 보고 기겁하며 누구냐고 소리를 질렀다. 진정해, 잠깐 길을 잃은 분이셔. 찰스는 레이븐을 말리며 아침밥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에릭은 점잖은 표정으로 일관하며 빵조각을 우물거렸다. 얼마 먹지도 않고 에릭은 잘 먹었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릭? 어디 급히 가시는 것 같은데.”

“……굳이 그쪽이 절 붙잡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쪽이 아니고, 찰스 자비에라고 제가 제 이름을 알려 드렸던 것 같습니다. 이쪽은 제 여동생 레이븐이에요.”

“……그렇군요, 찰스. 아침식사는 잘 했습니다. 그럼 이만.”

“잠깐만요, 에릭!”

“……?”

 

난 당신이 뭘 원하고 있는지, 당신이 하려는 일이 뭔지 모두 알고 있어요. 찰스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에릭은 당황한 듯 가방을 집어들고 나가려다가 찰스의 이상한 행동에 동작 그만 상태로 굳어 버렸다. 당신이 나치 전범을 쫓고 있다는 것쯤이야 나도 잘 알고 있지, 그리고 당신만 그런 이상한 능력을 가진 건 아니라고? 찰스는 에릭을 풀어 주며 말했다. 그새 찰스는 소파에 앉아 있고, 레이븐은 파랗게 변해서 찰스의 옆에 서 있었다.

 

“……당신들……, 사기꾼이지?”

“사기꾼이라니요. 말이 좀 심한 것 같은데.”

“레이븐, 손님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니. 에릭, 잘 들어 봐요. 저희는 사기꾼이 아니에요. 원한다면 나치 전범 추적을 도와 드리죠.”

“……대가를 요구합니까?”

“우리가 대가를 요구할 것처럼 보여요? 척 보니까, 그쪽도 돈은 좀 많아 보이는데 우리가 아마 그쪽보단 재산이 두 배 이상은 많을 걸요.”

“대가는 딱히 없습니다. 당신의 정체를 숨겨 드리고 나치 전범의 추적을 돕는 대신 나중에 제가 당신을 찾아가서 특별한 것을 요구할 지도 모르는 일이죠.”

 

에릭은 어리둥절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거액의 돈 같은 것을 요구하기 마련인데 이 잘난 도련님과 파란 아가씨는 자기보다 돈이 배로 많다면서 대가가 필요 없단다. 도대체가 무슨 꿍꿍이속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집안이다. 에릭은 어이없어하면서 두 남매의 제안을 수락했다. 찰스는 환하게 웃으며 에릭이 제안을 수락하는 의미로 내민 손을 잡고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