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ons

Work Header

Only A Boy

Chapter Text

 

"구교(The Old Religion)는 지구의 마법 그 자체다. 모든 것을 결속시키는 본질과 다름없지. 인류의 시대를 넘어서 오래도록 지속될 거다."

 

킬가라(Kilgharrah)

 


 

운명.

참으로 이상하고, 어떤 점에선 웃기기도 한 것이었다. 물론, 멀린은 운명의 변덕에 관해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아서를 인도하고 지키는 것. 소서러들의 피가 잔뜩 적셔진 이 땅에 다시 한 번 마법을 가져오는 것. 또 현대 마법 시대를 불러오는 것.

그는 이 커져가는 마법 사회가 그를 어떻게 부르는지 들은 적이 있었다. 엠리스, 인챈터들의 왕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저 한 명의 소년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래서 그의 두 푸른 눈이 즐거움으로 반짝이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아서가 마법의 역사에 관해 가장 중요한 문서를 떨어뜨릴 뻔 했을 때 코웃음을 터뜨렸는지도 모른다. 여러 기억들이 그의 눈 앞에 스쳐지나가며 한때 평화로웠던 시절에 머물렀다―그의 손아귀에서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기 전까지.

 


 

"멀린!"
아서가 유난히 그의 이름을 강조하며 소리쳤다. 그와 대화할 때마다 항상 그랬다.

"네, 전하?"
씩 웃으며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아서의 노려봄 뿐이었다. 멀린은 미소로 화답해주며, 그들의 앞에 서 있는 네 명의 무리로 눈을 돌렸다―모두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몇 달 동안 궁정에 손님으로 머물면서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익숙해 진 것이 틀림없었다.

아서에게 문서를 건넨 크고 건장한 남자는 거친 적갈색 머리카락과 다부진 턱을 가지고 있었는데, 헝클어진 수염은 이를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그의 이름은 고드릭 그리핀도르로, 멀린은 그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항상 아서가 떠올랐다―아서보다는 좀 더 친절했지만. 그의 옆에 앉은 장신의 창백한 남자는 깔끔하게 빗은 흑발과 짓궃은 농담을 할 때마다 가늘어지는 선명한 녹안을 지니고 있었다. 살라자르 슬리데린은 그의 친한 친구가 되었다―가이우스가 그들의 장난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일주일동안 모든 망토와 현수막을 녹색으로 바꿔놓는 건 정말 재미있었다.

로웨나 래번클로와 헬가 후플푸프는 앞선 두 명보다는 별로 잘 알지 못했다. 둘 다 세련된 여성이었지만, 후자는 술집에 아주 살림을 차린 상태였다. 헬가가 커다란 맥주잔에 벌꿀술을 가득 부어 들이킬 때에는, 음, 좀 덜 세련된 여성이 된다고 하자. 이미 그가 웃고 있는 중이라 다행이었다. 곱슬거리는 짙은 금발의 여성이 술상 위에서 개춤을 추는 장면을 상상한다면 그 누구도 웃음을 못 참았을 테니까.

로웨나는 헬가보다 좀 더 키가 컸고, 섬세한 이목구비와 꽤나 진지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리며 아서의 연설에 집중하라고 넌지시 주의를 줄 때마다 알 수 있다. 마치, 당신이 쓴 연설이니 분명 외워는 놓아겠지? 라면서 말이다.

이번 연설은 아이들이 마법을 올바르게 배우는 방법을 배우는 곳,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이름에 대해 몇 주 동안이나 계속 싸워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알비온 아카데미가 더 마음에 들었다―호그와트는 무슨 질병 이름같이 들렸다. 가이우스가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웃음을 참는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엠리스."

낯선 언어가 살라자르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멀린이 고개를 돌렸다. 뱀의 언어, 파셀텅이었다. 몇 주 전 그들이 발견한 것이었다. 멀린은 드래곤 로드의 언어를 가르쳐 주려고 했지만, 별로 성과는 없었다. 대신, 그들은 혈통 마법에 기초한 발전형인 파셀텅을 발견했다. 물론, 거의 힘은 품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꽤 쓸만했다.

"왜?"
그가 쉭쉭거렸다.

살라자르가 능글맞게 웃었다.
"여전히 악센트를 못고쳤군,"
그가 속삭였다. 단어 하나하나가 길게 늘어지며 함께 맞아떨어졌다.

멀린은 거의 눈을 굴릴 뻔 했다.
"네 쪽이 이상한 거야."

"이쪽이 훨씬 더 깔끔하게 들려."

"아니거든."

"멀린? 뭐 하는 거야?"

갑작스래 들려온 영어에 멀린은 깜짝 놀라 아서를 바라보았다. '너 미쳤냐'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것도요,"
그가 재빨리 대답했다.

"방금까지 쉭쉭거리고 있었잖아."

"제가요? 잘 모르겠는데요."

"어쨌든,"
아서가 목을 다듬었다.
"네가 구교의 고위 사제니 어서 승인해."

놀라운 건 아서가 본인도 믿기지 않는지 멀린의 직위를 정말 영혼없이 말했다는 것이다. 멀린이 그 영향을 끼치기는 했다. 그가 이렇게 위대하고 강력한 마법사라고? 게다가 이젠 수석 보좌관이기까지 해? 더 이상 갑옷을 닦지 않아도 된 건 천만 다행이었다.

"네."
멀린은 살라자르를 슬쩍 흘겨보며―이젠 더 크게 히죽거리고 있었다―아서가 테이블 위로 펼쳐놓은 문서로 다가갔다. 이번 주만 해도 백 번은 더 훑어본 표제를 다시 읽은 후, 그는 손에서 반지를 뺐다. 공식 문서에 서명하기 위한 인장이 필요해지자, 그가 마법으로 직접 만든 반지였다. 매끄러운 검은 금속의 표면에는 안개 속을 날아가는 쇠황조롱이(merlin)가 조각돼있었고, 그 날개에는 용 킬가라가 준 연한 푸른색의 아름다운 보석 조각들이 박혀있었다.

그는 아서가 움찔하는 모습을 무시했다. 그의 왕은 이렇게 아름다운 반지를 왁스에 찍어누르는 걸 엄청난 죄악으로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멀린은 반지에 인챈트를 걸어놓았다. 아무도 이 반지를 낄 수 없고, 손상이 가지 않고, 언제나 멀린에게 돌아오도록 하는 인챈트를 말이다. 마치 반지가 왁스에 눌러붙을까 걱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억이 형체를 잃으며 변해갔다. 장면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며 뼈에 사무치는 듯한 떨림이 그를 꿰뚫고 지나갔다. 이상하게도 고통은 없었지만, 그 거슬리는 느낌은 그를 급격하게 치고 몰아갔다. 중압감이 그의 심장을 움켜잡았다. 인상과 색체, 소리와 감정이 바람에 실려온 나뭇잎처럼 순식간에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무언가 이미 잘못되었다. 무언가 바뀌었다―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예기치 못한 난항처럼―도대체 뭐길래?

한편으로 멀린은 운명이 그에게 뭔가 새로운 것―어쩌면 그를 죽일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걸 알았다. 그의 주위를 소용돌이치는 옛 마법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것보다 더 강력하고, 생생했다.

숨이 막혀왔다.

그를 앞으로 확 잡아당기며, 순수한 마법의 기묘한 끌림이 그를 불가능한 속도로 끌어당겼다.

눈앞에 다시 장면들이 번뜩였다. 엉망진창인 내면의 표면 위로 잘 떠오르지 않았던, 반쯤 기억해낸 기억들이었다. 그의 눈앞에서 카멜롯이 비틀리기 시작했고, 매 순간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기억을 잃고 있었다.

그날 아침의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이 어둠 속에 잠기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지? 그는 끝없이 휘몰아치는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날 해가 떠오르기는 했던가?

워록은 패닉에 빠지기 시작했다. 아서가 이 땅에 마법을 가져다 준 이후로 처음있는 일이었다. 잠깐, 아서는 이제 막 마법의 합법화 선언에 서명하는 중이었는데. 아니, 이제 막 그에 대한 회의를 하던 중이었어. 그는 기억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아서는 그의 비밀을 몰랐다. 그는 엠리스가 누구인지,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그의 목숨을 구했는지 알지 못했다.

멀린은 자신이 처음으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어린 소년처럼, 그리고 처음으로 실수를 저지른 십대 소년처럼 느껴졌다. 그는 눈을 뜨려고 했지만, 떠지지 않았다. 팔과 다리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시 하인이 되면서,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그가 누구인지를 잊었다.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 그의 기억들이 다시 지워지기 시작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미 무언가가 일어났다. 수년 간의 괴로움과 슬픔이 연이어 그에게 밀어닥쳤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그의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에, 그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또 다른 고대의 마법이 연달아 부딪혀오자, 그는 미간을 좁혔다. 금방이라도 비명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인간의 것이 아닌 괴성과 애원이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하나같이 뒤틀리고, 왜곡된 의식들이었고, 각각의 부정확한 화음들이 마치 충격파처럼 그를 덮쳐왔다. 그는 더 이상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몰랐다. 몇 달, 몇 년이었는지도.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추었다.

그는 군중 속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자줏빛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성이 통로를 걸어오는 것을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는 선명한 붉은 망토에 왕관을 쓴 금발의 남자와 손을 잡았고, 함께 입을 맞추었다. 그는 군중들과 함성을 지르며 환호하고 있었다―그녀가 왕관을 쓰고, 하인에서 왕비가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

 


 

"당신이 발견하기 전에 이 아이가 밖에 얼마나 있었나요?"

멀리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해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집중하려고 했다.

"몰라요, 한 두세 시간?"
이번에는 남성의 목소리였다. 흥미없다는 듯 날카롭게 들려왔다.

"불쌍한 것,"
다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번엔 좀 더 명확하게 들려왔다.
"너무 말랐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 아이를 닮았구나..."
그녀는 말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 따뜻하고, 애정어린 할머니같은 목소리에 멀린은 다시 의식적 사고의 영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산한 소리를 들려왔고, 따뜻한 손이 그의 이마를 짚었다. 라벤더 향기가 났다.

"실라스, 물 한 컵 가져다 주겠니?"

"언제 일어날까요?"
새로운 목소리―어린 소년의 목소리였다. 불안한 듯 하면서도 신이 난 것 같았고, 특별한 선물을 받기라도 고대하는 것처럼 단어 하나하나에 기쁨이 묻어났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가이우스는? 완전히 깨어난 그는 익숙한 치료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멀린이 신음을 내뱉자, 여성이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그의 옆에서 몸을 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내 말이 들리니?"

"네,"
숨을 몰아쉬며 그가 대답했다.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수분이 없는 건가?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지자, 그는 손가락으로 눈을 문질렀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고, 그는 마침내 간신히 눈을 떴다. 먼저 천장이 눈에 들어왔고, 곧 이곳이 성이 아니라는 냉정한 깨달음이 그를 짓눌렀다. 그는 지금까지 저런 벽을 본 적이 없었다.

"여긴 어디예요?"
새된 목소리로 물으며, 그는 몸을 홱 일으켰다―그 즉시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다시 한 번 의식을 잃을 뻔 했다. 그는 머리를 움켜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당신은 누구죠? 가이우스는요?"
점점 말을 할수록, 뭔가 아주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건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얘야, 진정하렴."
여성이 다시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가이우스는 누구니? 네 아버지시니?"

"네?"
멀린은 다시 눈을 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가장 가까이 있어 눈에 띄는 사람은 나이든 여성으로, 밝은 회색의 머리카락을 뒤로 팽팽하게 당겨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거의 가이우스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나이가 있어 보였다. 친절해 보이는 주름진 얼굴은 광대뼈가 높고 턱이 둥근, 젊었을 때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짙은 갈색의 눈은 철사 테가 달린 직사각형의 안경 뒤에서 걱정으로 좁혀졌다.

그녀의 뒤에는 짙은 회색의 옷을 입은 희끗희끗한 머리의 남성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남자는 어딘가 조급한 듯 자꾸 손목에 있는 무언가를 흘깃거리며 혀를 찼다. 마지막으로, 이리저리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과 헤이즐색 눈을 가진 어린 소년이 침대 발치에 있는 철제 기둥을 붙잡고 있었다.

모든 게 이상했다. 이게―도대체 이게 다 뭐지? 저 남성이 입고 있는 옷이나 이 여성이 입고 있는 해바라기 무늬 드레스는 지금까지 그가 본 적도 없는 옷들이었다. 그리고 천장에 달린 빛나는 공들은 촛불 수십 개를 합한 것보다 더 밝게 방을 비추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귓가에 피가 맴돌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누구지? 여긴 뭐하는 곳이야? 패닉이 그의 생각을 잠식하자,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불빛들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진정해야 해.

마법은 금지되었다. 아서는 아직 그가 마법을 쓸 수 있는 걸 몰랐고, 이런 식으로 알아내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진정하렴,"
여성이 다시 또렷하게 말했다.
"이제 괜찮단다. 넌 런던의 울스 고아원에 있어."

"런던이요?"
멀린이 놀라서 대답했다. 그는 런던이란 곳을 처음 들어보았다. 어쩌면―어쩌면 룬덴브루(Lundenbruh)를 잘못 말한 걸 수도? 아니 그래도 여전히 말이 안 되잖아! 룬덴브루는 카멜롯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게다가 그는 방금 전까지 그웬의 결혼식과 대관식에 참석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래, 얘야."
여성이 그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깊게 들이쉬렴.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가이우스는 누구니?"

거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멀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는 가이우스의 명성이 널리 퍼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가 다른 왕국인 걸 생각하면...

"제 보호자면서 치료사세요,"
그가 천천히 대답했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뼈저리게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건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너무 어리게 들려왔다.

"네 할아버지시니?"

"아뇨,"
멀린은 혹시라도 구석에 숨어있는 가이우스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최근에 절 맡아주셨어요. 전 줄곧 가이우스의 일을 돕고 지냈구요."

여성은 그의 말에서 뭔가 심오한 의미를 찾아낸 모양이었는데, 그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안심을 시켜주려는 듯 부드럽게 쥐어왔다. 

"때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한단다."
그녀가 아주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뭐, 뭐가요?"

"네 어머니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네가 가이우스와 함께 살도록 계획을 세웠어, 내 말이 맞니?"

멀린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그저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이건 네 탓이 아니란다."
그녀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고, 그 강렬함은 그를 잠시 당황하게 만들었다.
"넌 사랑받고 있고, 이런 취급은 누구라도 받아선 안 돼"

"네,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부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그의 대답에 당황한 듯 했다. 그는 확실히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 그녀는 살피는 듯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더니,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냈다.
"우린 문간에서 널 발견했단다. 어린아이에게 더 이상 살아있는 친척이 없다면, 다들 이곳으로 데려오지."

뭐라고?

"가이우스는 널 원하지 않았어."

"그게 무슨―"
멀린은 완전히 할말을 잃은 채 고개를 저어댔다.
"하지만 전―"

난 어린아이가 아냐!

그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듯, 다시 한 번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려던 말은 완전히 무시한 채. 하지만―그녀가 이렇게 완전히 그의 몸에 팔을 두르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성인 남성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그의 목소리는 겁에 질린 어린 소년의 작은 목소리였다.

실수로 그의 나이를 되돌려버린 건가?

"이제 가도 됩니까?"
남자가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는 눈 앞의 장면을 완전히 침묵으로 일관한 채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마침내 인내심이 닳아버린 듯 했다.

부인은 그에게 두른 팔을 풀며―드디어!―남자를 노려보았다.

"네, 나가도 좋아요."
그녀는 왜 여태 나가지 않았냐는 듯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작게 불평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바쁘게 방을 나섰다. 그녀는 다시 멀린을 바라보았다.

"저 분이 널 발견했단다,"
그녀가 닫힌 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경이라도 써 준 게 다행이구나, 저런 사업가같은 부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멀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떨고있는 걸 눈치챘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의 마법을 제어하며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최대한 정리해나가고 있었다. 그는 이상하고,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마치 마음에 상처라도 난 것처럼. 마치 무언가가 그에게서 거칠게 찢겨져나갔고, 아직 그의 마음이 그 고통을 처리하는 중인 것처럼. 그웬의 결혼식과 지금 사이에는 뚜렷한 공백이 있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혼잡한, 옛 마법의 흔적마저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강한 바람이 지나간 후 남아있는 먼지같았다.

그는 기억해 내려고 애쓰며 눈을 감았다.

추락. 그는 추락했다―하지만 진짜가 아니었다, 단지 느낌이 그랬을 뿐. 그는 구교를 떠올렸다. 그에게 균형을 되찾아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지구의 마법이 그를 여기로 데려온 걸까? 아니면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는 어떤 목적을 위해 그 스스로 이곳으로 온 것일까? 새로운 운명을 위해? 하지만―

아서!

그의 눈이 탁 트였고, 거침없이 밀려오는 패닉에 그의 입이 벌어졌다―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갑자기 무언가가 그를 진정시켰다.

그 느낌.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아서가 안전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 뚜렷한 공백은 점점 덜 공허해지고 있었다. 그는 마음의 눈으로 희미해져가는 장면들을 얼룩진 그림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아직 한 장도 그려내진 못했지만. 그는 집중하기 위해 머리를 움켜쥐었고, 최근의 일을 생각해 내려고 할 때마다 어둠이 강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부인은 그의 움직임을 잘못 이해한 모양이었다.

"누워있으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인 거 안단다."
다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틀렸다―그는 버려진 강아지처럼 버림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된 건지 알아내는 중이었다. 부인은 다시 한 번 침묵하며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그는 그녀가 침대 발치를 맴도는 다른 소년을 조용히시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사건들을 종합해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떠올린 장면들은 기껏해야 흐릿한 정도였고, 그는 머리를 울리는 고통에 그 장면들을 치워냈다.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그는 감정을 추스렸다.

아서가 안전하다는 결론에는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사실, 카멜롯 전체가 안전한 것처럼 느껴졌다. 설명할 순 없었다. 현재는 이러하지만, 언젠가 그의 기억이 모두 돌아올 것이다.

부인이 그를 살펴보더니, 그가 진정했다는 걸 눈치챘다.

"난 마사 그린, 예절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단다. 내가 자란 20년대에도 다들 그랬으니 말이야. 그냥 마사로 충분하단다."

"네."

20년대라니 무슨 소리야?

그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빛이 비친 모양인지, 그녀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네 이름은 뭐니?"
그녀가 물었다. 다른 아이가 여전히 커다란 눈으로 그를 지켜보며, 앞뒤로 발을 흔들기 시작했다.

"멀린이에요."

"우와!"
아이가 신이 난 듯 소리쳤다.
"마법사처럼 말이야? 아서왕 전설의 그 멀린?"

"뭐?"

"재촉하지 마렴, 실라스,"
마사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멀린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설이라고?

"잠깐만요."
둘 다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날짜가 어떻게 돼죠?"
그는 자기가 한 말이 얼마나 바보같이 들리는지 알았다. 그들의 당황한 표정도 한 몫 했다. 하지만―

"수요일이야,"
꼬마, 실라스가 말했다.

"실제 날짜 말이야."

"6월 21일이야."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알기론 4월이었다.
"년도는!"
그는 자기가 얼마나 날카로운 소리를 냈는지 알면서도 다그쳤다.

그들은 마치 그의 귀에서 벌레가 기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1991년이란다,"
마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약물이 어쩌니 하고 그녀가 중얼거렸지만, 그는 더 이상 듣고있지 않았다.

그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 멀린 암브로시우스는 천 년이 지난 미래에 있었다. 가이우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아직 900 AD에 도달하지도 않았고, 시간을 기록하는 건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이는 그의 현 곤경을 아주 아이러니하게 만들었다. 그는 시간과 기억, 삶을 잃었고, 현재 아주 머나 먼 미래에 있으며, 멀린 본인은 전설로 전락해버렸다. 더불어, 그가 현재 열 살짜리 몸이 돼버린 것은 아주 확실했다.

멀린은 이렇게 수많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칠 때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했다.

그는 기절했다.

 


 

뭐, 더 잘 대응할 수는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되니까―모르가나가 타락하고, 란슬롯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고, 프레이야가 물웅덩이에 서 있는 모습을 봤을 때처럼. 그런데 그는 열 살짜리처럼 반응하고, 바로 기절했다.

누가 그를 탓할 수 있겠는가?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마사와 실라스는 보이지 않았고, 방 안은 어두웠다. 커튼이 쳐진 창문 틈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기절하기 전에 봤던 천장의 불빛처럼 이상하고 어둑한 노란 빛이 들어왔다. 흔들거리는 촛불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어둠 속이라 내부의 구조만 간신히 알아볼 정도였다.

그는 열 살이었다. 그리고 미래에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는 아직도 그웬의 대관식 이후의 일들이 기억나지 않았다. 동시에 머릿속에 있는 그의 주문 도서관의 카탈로그를 빠르게 훑은 후, 그가 기억할 수 없는 부가적 지식들에 대한 모든 책장들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뭐, 그가 왜 구교와 이런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되었다―그의 발밑에서 지구가 숨 쉬고, 고동치는 것을 이렇게 생생히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몇 년의 세월을 잃어버린 거지? 엄청 많이 잃어버린 것 같았다―그의 안에서 휘몰아치는 마법의 양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가이우스는 나이가 들수록 마법이 강해진다고 했다―하지만 멀린의 마법은 항상 강했다. 만약 그것이 어린 그의 다듬어지지 않고 본능적인 자질과 합쳐진다면?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어쨌든―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금방 알아낼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도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시간이동을 하면서 어디 머리라도 부딪힌 건가? 아니면 뭔가 사악한 음모에 휘말려서? 멀린은 고개를 저었다―어둠이 다시 그에게 밀려왔다. 마치 송곳으로 뇌를 휘젓는 느낌이었고, 그는 움찔하며 생각을 멈추었다.

뭐, 적어도 아서가 안전한 건 알았으니 되었다. 시간이동이 연관되어 있으니, 그가 카멜롯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다시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 일은 당분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그의 혀끝에서,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맴돌고 있는 그 느낌이 느껴졌다. 이러니 그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운명? 물론 좋다, 그런데 우선 그게 뭔지 알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는 짜증을 내며 침대를 굴렀다. 킬가라의 수수께끼라도 지금은 환영이었다. 이곳의 마법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그의 마법을 지구와 섞어나가자, 곪아터진 염증같은 휑한 상처가 느껴졌다. 구교는 균형을 요구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일어났어?"

멀린은 문 쪽으로 머리를 틀어 어둠 속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마루판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소년―실라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는 두 손을 움켜잡고 뒤를 흘깃 보더니, 멀린의 침대로 뛰어와 아까처럼 침대 발끝에 맴돌았다.

"마사는 그 가이 어쩌구 하는 사람이 형한테 약물을 먹였다고 생각하나봐. 경찰에 신고하려 하고 있어."

어느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가이우스 말이야?"
그가 천천히 물었다.

"응, 그 사람."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부드럽고 활발한 아이였다. 발소리도 이를 닮아있었다.

"그 사람 성이 뭔지 알아? 그럼 쉽게 체포할 수 있는데!"
아이는 그 생각에 몹시 기뻐하는 것 같았다.

"어, 아니. 가이우스는 나한테 그런 짓 안 해."
물론 할 때도 있지만 지금은 별로 상관없었다.
"가이우스는 좋은 분이셔. 아마도 내가―그게, 더 이상 그 분이 내 곁에 없다는 걸 잊어버린 것 같아."

"아."
실라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멀린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다시 두 손을 움켜잡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 사람 착했어?"

"어... 가끔은 신경이 날카로운 날도 있었어."
멀린이 그 생각에 미소를 떠올리자, 실라스도 같이 미소지으며 발을 앞뒤로 흔들었다. 아이는 한 눈에 봐도 뭔가 묻고 싶은 게 있지만, 필사적으로 자제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계속되자, 멀린은 한숨을 쉬었다.
"궁금한 게 뭐야?"

"형 이름 진짜 멀린이야?"
꼬마가 불쑥 말했다.
"그 전설처럼?"

그래. 여기선 전설이었지. 멀린은 난처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미래에 있다는 현실감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들을 기억한다고? 혹시 나만의 서사시가 있을까? 사람들의 그의 이야기를 노래한다는 생각은 그를 멍하게 만들었다.

"전설?"
그는 실라스가 그 전설에 대해 설명해주길 바랬다. 다행히 아이는 실망하지 않았다.

"응!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 멀린!"
실라스는 침대 기둥에서 떨어져 그의 침대 끝에 앉아 점점 빠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멀린은 언어 역시 긴 세월을 지나 발전한 것을 느꼈다. 꼬마가 하는 말을 놓치지 않고 따라간 게 기적이었다.

"물론 마사는 그저 신화일 뿐이라고 하지만. 어떤 이야기에선 사실이든 아니든, 이젠 너무 왜곡되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데. 너무 옛날에 일어난 일이라 잘 모르겠지만, 난 진짜일 수 있다고 생각해. 어쨌든 마사는 정말 똑똑해. 밤마다 우리들한테 이야기를 해 주는데―음, 우리가 먼저 물어봐야 하는데 싫다고 한 적은 없었어. 멀린은 그그, 엄청나게 긴 하얀 수염을 가진 사람이야. 바위에서 엑스칼리버를 뽑은 아서 왕의 스승이었어!"

그렇게 아이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름다운 귀네비어 아가씨와 가장 용감한 기사인 란슬롯의 불륜, 멀린의 가장 무자비한 대적자인 사악한 마녀 모르가나, 심지어 멀린의 연인이었던 호수의 귀부인에 대한 이야기까지―실제와 엄청 틀리긴 하지만. 이야기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멀린이 아서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멀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카멜롯에 돌아간다면 아서에게 말해줘야겠다―정말 잊을 수 없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실라스는 거의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늘어놓다 문이 다시 열리자 도중에 그만두어야 했는데, 멀린이 이름을 놓친 한 전투에 대해 설명하는 중이었다.

"실라스! 뭐하는 거니? 멀린은 자는 중이라고 했잖아."
마사가 팔짱을 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괜찮아요, 마사,"
실라스가 도와달라는 듯 멀린을 흘깃거렸다.
"이미 깨어나 있었는걸요. 저한테 아서왕과 멀린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고 했어요!"

마사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엄한 눈길을 보냈다. 멀린은 침을 삼켰다. 실라스가 곤란에 빠지기를 원하진 않았다.
"진짜예요,"
그가 미소를 지어보냈다.

마사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미심쩍게 바라보면서, 벽에 있는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갑자기 방 전체가 백색 불빛으로 환해지자, 멀린은 깜짝 놀라 몸을 들썩였다. 마법을 부린 건가? 하지만 주문을 외우는 소리는 안 들렸는데. 그는 고개를 들어 천장에 달린 유리공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전구를 너무 빤히 쳐다보면 안 돼!”
마사가 다그치듯 말했고, 그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야에 보라색 반점이 묻어났다. 그래, 마법이 아니구나. 기술의 발전인 걸까.
“실라스, 넌 이제 잘 시간이란다. 방으로 돌아가렴.”

실라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필요 이상으로 허둥대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멀린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내일 다시 봐!”
이 말과 함께, 아이는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사는 그런 실라스를 향해 고개를 내저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고 나서 침대 옆에 있는 서랍을 열어 가늘고 검은 무언가를 꺼내 그의 눈에 가져다댔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즉시 그의 눈이 멀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움츠러들며 손으로 눈 앞을 가렸다.

“오, 진정하렴. 그냥 플래시 라이트일 뿐이란다.”

플래시, 뭐?

결국 멀린은 손을 내려놓았고, 그녀가 뭘 하려든지 간에 마음대로 하도록 냅두었다. 왜 전구는 쳐다보지 말라면서 그의 눈에 플래시 라이트를 가져다 대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 몇 초 뒤, 그녀는 불빛을 끄고 뒤로 물러났다.

“흠, 약물 반응은 보이지 않는구나. 네 눈은 정상적으로 반응하고 있어.”

멀린이 눈을 깜빡거렸다.
“치료사세요?”
그의 어린 목소리엔 숨기지 못한 호기심이 드러났다.

마사는 또 다시 그에게 당황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녀는 그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난 간호사로서 훈련을 받았단다,”
그녀가 대답했다. 멀린은 지금까지 유모(wet-nurse)밖에 알지 못했다. 어쩌면 여기선 간호사(nurse)가 여성 치료사를 가리키는 걸지도 모른다. 

“그럼,”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니?”

“아까 런던이라고 하셨잖아요.”

“네가 다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란다.”
그녀의 입꼬리가 아래로 살짝 내려갔다.
“네가 말한 그 가이우스란 남자에 대해 일단 경찰에 신고했단다. 네가 더 자세히 말해준다면 그 사람들에게 진전이 있을―”

“아뇨,”
멀린이 끼어들었다. 그는 침을 삼키며,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는 왠지 마사가 가이우스처럼 쉽게 거짓말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아마도 떨어질 때 머리를 부딪혔나봐요. 가이우스는, 가이우스는 이제 없어요.”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선 조언을 구하러 가이우스에게 달려갈 수도 없었고, 그 사실은 그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렇구나.”
마사가 그의 거짓말을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더 이상 케묻지 않았다.
“그럼 이제 네 서류를 작성하는 게 좋겠구나.”
그녀가 힘차게 일어섰다.

“서류요?”
멀린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여기 울스 고아원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기록이 필요하단다.”

“저 이제 여기서 살아요?”
어쩌면 그게 그가 수많은 장소들 중 이곳으로 떨어진 이유일지도 모른다.

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몇 가지만 더 알면 끝이야.”
그녀는 방의 반대편에서 책상을 뒤지고 있었다. 멀린은 이곳이 뒤편에 사무실이 딸린 일종의 의무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침대는 세 개 뿐이었고, 그의 것을 제외한 나머지 두 침대는 창백한 커튼이 둘러져 있었다.

“네,”
멀린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이미 십 년을 거스른다면 그가 어느 해에 태어났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 예상은 다음과 같았다.

“생년월일은?”

“어… 1980년 7월 31일이요.”

“태어난 곳은?”

멀린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모르겠어요.”
이 시대에 엘도어는 도대체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까? 여성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이름은?”

“멀린이요.”

그녀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가 말을 계속하기를 기다리다, 그가 입을 열지 않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실제 성을 알려줄 수 없었다. 믿을 리가 없으니까! 

“성은?”

“그냥 멀린이에요.”

그녀는 한숨을 쉬며 부드럽게 말을 열었다.
“멀린, 나에게 숨길 필요는 없단다.”

그는 여러 성들을 생각해내려고 애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가 아는 성들은 모두 카멜롯에서 유명한 것들이었고, 펜드라곤은 암브로시우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의 시선은 맞은편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책에 닿았다. 책등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뭐,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에반스,”
그가 다시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멀린 에반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