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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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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사라진 꽃

“더워…”

튤립 사이사이 도사린 클로버와 민들레를 척출하는 오도로키 위로 내리쬐는 여름 햇살은 맑고 투명하고 온 대지를 태울 정도로 무자비했다. 나름 궂은 일은 다 섭렵해 봤다고 자부하는 오도로키마저 바싹 마른 입술 사이에서 가느다란 푸념이 새어나올 정도였다.

불평을 입 밖으로 낸 걸 알아차리자마자 오도로키는 그 생각을 털어내려는 듯 머리를 몇 번 약하게 흔들었다. 입 밖으로 내봤자 나아지는 것도 없는데…괜히 숨만 낭비한 기분이 들었다. 튤립은 아직 몇 백, 몇 천 송이나 남아 있었고, 얼마 안 나가는 몸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짓이겨진 무릎과 손바닥의 둔통, 어깨의 뻐근함은 아직 견딜 만한 수준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직 쉬는 시간까지 두 시간은 남아 있었다. 둔통이 격통으로 변하는 그 순간 즈음이면 쉬는 시간이 되겠지.

뭐, 그때도 안되면 그냥 그대로 쓰러지면 되겠지만.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일했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에는 온갖 소원이 나돌았다. 차갑고 투명한 물 한 잔만 마실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진저 에일. 이렇게 땡볕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찬 맹물을 마시면 토하고 병이 든다고, 옛날 사과 농장의 늙고 등이 굽은 일꾼 중 한 명이 지나가는 말처럼 조언해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농장에서는 항상 쉬는 시간마다 진저 에일을 거대한 나무 양동이에 담아 가져다주었다. 차가운 우물 물에 얼음과 레몬 조각이 듬뿍 떠다니고, 생강과 설탕으로 맛을 낸 다갈색 에일을 양은 국자로 한 번 퍼서 마시면, 단맛과 함께 코가 찡해지는 매운 맛이 온 코와 혀를 얼얼하게 타고 올라왔다. 그 차갑고 달달한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자만할 수 있었다.

여기는…진저 에일을 줄까?

불과 어젯밤에 이 저택에 도착해 오늘 일을 시작한 오도로키는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원사들을 관리하는 아우치란 사람이 그것마저 담당이었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고아원의 학대와 굶주림을 못 참고 뛰쳐나온 오도로키는 그런 지배인들을 몇 번이고 만나 왔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압박을 밑에 풀어 이성을 유지하는 사람들. 아니,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오도로키의 몸을 장식하는 채찍의 흉터는 그것의 산 증거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갑자기 오전 휴식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벌써? 아직 체력이 남은 것 같았는데…이렇게 되면 나중에는 정말 쓰러질 때까지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도로키는 휴식에 대한 기쁨보단 그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앞섰다. 농장의 종류는 밀, 보리, 옥수수 등 다양했지만 항상 일하는 주기는 비슷했기에 곧 익숙해졌는데, 정원은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오도로키는 일어서서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에 젖은 목과 얼굴을 닦아냈다. 이 또한 새로운 행복이었다—농장에서 일하는 수십 명의 일손에게 수건을 일일이 주기엔 천이 남아돌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오도로키는 비처럼 주룩주룩 내리는 땀방울을 팔로 훔치려다 포기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 곳은 수건을 일꾼들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었다. 심지어 밤에 수건을 놔두면 아침에 다시 빨아서 가져다 준다고 했다. 이토록 너그러운 일자리는 오도로키의 짧은 인생에 처음이었다.

다른 일꾼들을 따라가자 항상 일꾼들이 함께 자는 숙소 앞에 뚱뚱하고 넉살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거대한 양동이 두 개 앞에 서 있었다. 일단 한 개는 투명한 물이 찰랑거리며 넘쳐흐르기 직전까지 채워져 있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물이 아니었다. 얼음과 레몬이 잔뜩 들어 있었다. 에일인가?

하지만…샛노란 색이었는데.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일단 액체였고, 얼음이 떠 있었다. 오도로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양동이 앞에 생긴 줄의 맨 뒤로 가,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레모네이드 줄까, 물 줄까?” 아주머니가 물었다. 레모네이드…레몬으로 만든 것 같았지만, 정확히는 몰랐다. 굉장히 비싸다는 어쨌든 물을 마시면 안된다는 충고가 떠올라 오도로키는 말없이 샛노란 액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른 사람들이 입맛을 다시며 시원하게 들이키는 걸 보면, 어쨌든 나쁜 맛은 아닌 것 같았다.

특이하게도 이곳은 양은 국자를 입에 대고 마시는 것이 아닌, 나무 잔에 담아주는 방식으로 마실 것을 나누어주었다. 오도로키는 자신의 잔을 들고 어딘가 앉을 자리를 찾았다. 마침 너도밤나무 밑에 앉을 만한 평평한 돌이 한 개 있었고, 오도로키는 서둘러 그 자리로 향했다.

처음 맛본 레모네이드는 눈이 동그래질 정도로 짜릿하니 시고, 달고, 맛있었다. 진저 에일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넌 처음 보네. 넌 이름이 뭐야?”

갑작스레 드리워진 그림자와 밝은 목소리에 오도로키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아이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오도로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선명한 홍당무색 포니테일이 인상적이었다. 까만 드레스와 흰 앞치마를 보면...아마 저 아줌마와 같은 하녀였을 터. 저 아이도...이곳에 팔려온 걸까. 불쌍한 아이.

“오도로키.” 짤막하고, 무뚝뚝하고, 건성인 대답이었다. 정신이 말짱히 붙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눈치를 채고 자리를 비켜줄 터였다. 애초에 오도로키는 이딴 여자아이와 이야기하느라 귀중한 쉬는 시간, 그리고 숨을 낭비할 정도의 여유는 없었으니까.

“오도로키구나. 난 코코네! 풀 네임은 키즈키 코코네야. 엄마랑 아빠랑 이 곳에서 일하고 있어. 두 분은 정비사라서, 이 저택에서 뭐가 고장나면 무조건 엄마 아빠를 불러. 너도 혹시 부모님이랑 함께 온 거야? 두 분은 뭐하셔?”

“얼굴을 한 번이라도 봐야 알지 않을까.” 수많은 폭언을 견뎌오며 서슬이 퍼렇도록 날이 선 혀로 오도로키가 빈정거렸다. 코코네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두 손을 입에다 짝 소리가 나도록 갖다댔다.

“으으…미안…멋대로 아픈 곳을 건드렸구나.” 한순간에 풀이 죽은 채 코코네가 사과했다. 서글픈 표정에 오도로키는 양심이 마음의 아주 구석진 한 켠을 쪼아대는 것을 느꼈지만, 그런 것 쯤은 쉽게 짓이길 수 있었다. 겨우내 얻게 된 침묵에 만족하며 오도로키는 아무 말 없이 레모네이드의 나머지를 들이켰다. 한 잔 가득 마셨는데도 아쉬워서 혀를 내두르게 되는 맛이었다. 그래도 이런 걸 주는 저택이라면…나쁘진 않았다. 역시 부잣집은 부잣집이구나…

“더 먹을래?” 빈 컵을 눈치채고 코코네가 물었다. 오도로키는 너무 놀라 까칠하게 구는 것도 잊고 키즈키를 올려다봤다.

“그, 그래도…되는 거야?” 오도로키가 더듬더듬 물었다. 깨끗한 물을 구하는 것도 서민들에게는 힘든 일이어서, 농장에서는 탈수로 쓰러지지 않을 정도만 줘도 감지덕지였다. 그런데 그 물(로 만든 음료수긴 했지만)을 아낌없이 퍼줄 수 있을 정도라니…키즈키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잔뜩 남아 있어.” 오도로키가 움직이기도 전에 키즈키는 손에서 컵을 뺏어가 레모네이드 양동이로 총총 달려가더니, 레모네이드를 잔뜩 퍼내서 다시 돌려주었다.